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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귀리 Aug 11. 2023

집의 연대기는 끝나지 않았다


시간을 거꾸로 돌려

동굴을 거주지 삼아 살아가던

혈거인들에게로 가 보자.

살아가는 모습이 많이 다르지만,

우리는 그들로부터 시작되었다.

아니, 그들을 거쳐 수많은 진화를 거쳐 왔다.

이곳 동굴에 변화의 시기가 도래했다.


어느 날, 동굴을 뒤로하고 용감하게 그곳을 걸어 나온 한 사람이 있었다. 거주 공간을 위해 특별히 뭔가를 하지 않아도 좋은 동굴을 찾기만 하면 안전한 환경이 보장되었기에 굳이 그곳을 나오는 것보다 머무는 것이 훨씬 합리적이었을  터였다. 하지만 그는 아니 그들 중 몇몇은 좀 더 쾌적한 환경에서 살고 싶었을 것이다.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선 모험이 필요했다. 습하고 어두운 동굴대신 태양의 밝고 따뜻한 바깥세상을 선택했다.

이제 선택 뒤에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남아있었다.

날씨와 온갖 위험으로부터 몸을 보호할 수 있는 공간을 어떻게 하면 만들 수 있을까? 그것도 숨거나 기댈만한 곳이 없는 이 허허벌판에.

그는, 그들은 고민했다.

강과 숲을 누비고 다니며 공간을 만들 재료를 찾아다녔다. 그리고 재료를 다듬어 공간을 만들 도구가 필요했다. 일상에서 꼭 필요한 도구들은 끈기와 절실함에 의해 발전해 나갔고, 가장 쉽고 단순한 디테일이 끝까지 살아남았다. 건축을 위한 재료들은 가까운 곳에서 구하는 것이 운반에 들이는 시간과 노력을 아낄 수 있었고, 지역에서 가장 쉽게, 많이 구할 수 있는 것들이 최종 선택되었다. 건축 역사를 쭉 훑어보면, 재료의 선택과 도구의 발전은 늘 함께 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재료와 도구들이 갖춰져 갔다.

이제 진화의 속도를 높여야 할 타이밍이다.

잘만하면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우리의 보금자리를.


‘집’이 만들어지기 이전의 이야기다. 동굴에서 용감하게 박차고 나왔던 ‘그’가 이룬 발전 같지만, 그로부터 몇 대에 걸친 이야기다. 발전은 오랜 시간에 걸쳐 이루어진 뒤에야 비로소 눈에 보인다.


처음엔 비와 눈 그리고 강렬한 햇빛을 피할 지붕이 필요했다. 떠받쳐줄 기둥만 있다면 어디에서나 지붕을 펼칠 수 있으니까.

곧 추위와 바람을 막아줄 벽도 필요했다. 바닥과 지붕 사이에 돌을 쌓아 올려 벽을 만들어나갔다. 바람이 멈췄고 추위도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평온함과 안전함이다. 소리마저도 사라져 적막하다. 나는 우리는 그 분위기에 빠져들었다.


아직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일상을 밝혀줄 빛이 들어올 수 있는 창이 필요했다. 벽에 구멍을 뚫어 빛이 나아갈 수 있는 길을 하나씩 만들어나갔다. 빛이 사방에서 쏟아져 들어왔다. 어떤 빛은 약하기도, 강하기도 했다. 혹은 짧거나 길었다. 거칠거나 부드럽기도 했다. 매일 빛이 집 안에 들어왔다가 나가기를 반복하며 우리는 그 밝음에 익숙해져 갔다. 늘 밖에서 보았던 익숙한 빛이 창을 통해 들어오는 것만으로 신비로웠다. 지낼수록 만족스러움이 커져간다.


하지만 계속 머물기 위해서는 필요한 것들이 있었다. 언제든 자유롭게 밖으로 나갈 수 있는 문, 다시 안으로 들어올 수 있는 문이 필요했다. 벽에 구멍을 뚫어 안팎을 넘나들 수 있는 문을 만들어 나갔다. 여기와 저기 그리고 작게 크게. 이로써 원하는 대로 밖이든 안이든 있고 싶은 곳에 머물 수 있는 자유를 얻게 되었다. 문을 통해 누군가 오고 갈 수도 있게 되었다. 이웃과의 관계 형성의 초석이 마련되었다.


겨울이 찾아왔다. 벽만으로는 추위를 견뎌낼 수 없을 것 같다. 따뜻하게 해 줄 온기가 필요하다. 한가운데 마른 장작을 쌓고 불을 피웠다. 따뜻함이 공간을 가득 채웠다. 그와 동시에 연기가 빠져나갈 구멍이 필요했다. 따뜻하지만 질식할 것 같았으니까. 지붕 한가운데 굴뚝을 만들었다. 연기는 흰 곡선을 그리며 위를 향해 굴뚝 밖으로 빠져나갔다. 불 가에 앉아있는 시간이 늘어갔다. 움직이는 빛과 열기에 취하면 좀처럼 불 앞에서 빠져나오기 어려워진다. 이때부터 불은 마성의 매력으로 우리를 붙들어 놓았다. 밖에서 돌아와 몸을 데우고, 물고기를 굽고, 밤에도 밝음을 유지할 수 있었다. 우리는 밤이라는 시간을 얻게 되었다. 그런 만큼 사색의 시간도 늘어갔다. 인생의 의미에 대해 생각하다가 어느새 잠에 빠져들었다.


사람들은 그렇게 차곡차곡 ‘집’을 만들어나갔다.

가끔 머릿속으로 이런 시나리오를 만들어 돌려보곤 한다. 집의 탄생과 성장의 과정을 계속 더듬어 가다 보면 좋은 질문들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왜 우리에게 집이 필요한지, 어떤 집이 우리에게 좋은지 생각해 보고 싶었다. 창, 문, 벽지와 같은 건축 하드웨어와 가구, 인테리어에 가려 그 시작과 과정이 평가 절하된 ‘집’이라는 건축의 본질을 눈을 감고 그려본다.


집은 어마어마하게 커다란 상자.

갖가지 일상을 담아내는 그릇이다.

집은 포근하고 따뜻한 이불.

사람을 품는 둥지다.

집은 거대한 축음기.

일상의 소리를 담아내는 공연장이다.

집은 나의 모든 것을 담아내는

또 다른 모습의 나다.


눈을 뜨고 집을 둘러보았다. 어디에서나 볼법한 74m2의 아파트다. 인터넷에서 같은 평수의 아파트를 검색해 보면 조금씩 크기와 배치만 다를 뿐 기본 평면은 비슷하다. 사람의 라이프 스타일과 취향이 다르기에 같은 공간이어도 모든 집은 유니크 하지만, 이곳은 나에게 맞는 집이 아닌, 집에 맞춰 살아야 할 것만 같다. 아파트란 그런 곳이다.

집의 연대기를 상상하며 기능에 감성이 들어간 이야기가 만들어졌던 것에 비하면, 이곳은 집 자체만으로는 이야기를 만들어내기가 쉽지 않다.

만약 우리에게 현실적인 문제를 배제하고 원하는 집을 가질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집이 어떤 모습이기를 바라는가? 집은 그 사람에게 어떤 곳이냐에 따라 정의된다. 그에 따라 공간이 계획되고 분위기가 디자인될 테니.

내가 거쳐 온 삶의 서사를 바탕으로 현재의 일상을 담고 미래의 방향을 제시하는 등대 같은 공간으로 만들어진 집은 나의 분신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그것도 내가 바라는 이상적인 모습의 분신. 나를 바꿀 수는 없지만 집은 내가 원하는 대로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처럼 집에도 자기만의 이야기가 필요하다. 그래서 나는 제안해보고 싶다. 나와 집이 주인공인 소설을 써보는 건 어떨까 하는. 모든 사람의 삶은 한 편의 소설과도 같고, 그 삶을 담아내는 집은 소설의 메인 스테이지가 되는 것이다. 어떤 해프닝이 벌어질지, 어떤 순간이 좋을지 아주 디테일하게 이야기를 만들어가다 보면 집이 나에게 줄 즐거움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집의 연대기는 끝나지 않았다.
우리가 집에 대해
고민하는 한 언제까지라도.

건축 역사에 대한 책에 그려진 공적인 집의 연대기는 이미 지난 과거의 이야기다. 하지만 지금도 여전히 집은 앞으로 나아가고 있고 미래에도 계속될 것이다.

내가 우리가 만들어내는 집에 대한 소설과 함께 사적인 집의 연대기 또한 멈추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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