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7시.
알람 소리가 침묵을 깨트리며 잠들어있던 집이 깨어난다. 하루를 시작하는 사람들의 소리가 벽을 타고 섞여 든다. 물소리, 문 여닫는 소리, 발소리, 말하는 소리, 자동차 소리. 아침은 상대적으로 소리의 템포가 빠르다. 오후에 이르러서야 느긋해지고, 저녁에는 느려진다. 기본적으로 우리는 시간에 제약받으며 살아가기 때문이다.
환기를 위해 열어둔 창문으로 음식 냄새가 흘러 들어와 아침을 먹는 습관이 없는데도 후각이 자극된다. 입 안에 침이 고인다. 몸의 감각들이 조금씩 깨어나고 있다.
집집마다 아침 준비의 루틴이 재생되며 집은 생명을 얻은 듯 숨쉬기 시작한다. 뭔가를 함께 하기보다는 각자 분주한 시간이다. 그러는 동안 사람들은 하나 둘 문을 열고 집을 나선다.
오전 10시.
사람들이 부재한 집.
창으로 햇살이 들어오며 방안을 유영하던 먼지들의 정체가 드러나고 말았다. 햇빛만 아니었다면 완벽한 독무대가 될 수 있었을 텐데……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 춤을 추던 먼지들이 어쩔 줄 몰라하며 사방으로 흩어진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우리와 함께 집을 공유하며 살아가는 존재들이 있다. 아주 작은 먼지들뿐 아니라 습도 가득한 여름의 공기가 창을 통해 들어와 공기 중에 섞여 있다. 모닝커피를 마시려 끓였던 물의 수증기도 아주 조금 남아있을지도 모른다. 공기정화식물에서 나온 피톤치드와 새벽 내내 빠져나온 나의 날숨에 섞인 이산화탄소가 섞여 있기도 하다. 어제 저녁으로 먹었던 된장찌개의 냄새 분자가 미처 환기되지 못한 채 남아있을 수도 있다. 길 건너 산에서 불어온 바람이 꽃 향기를 몰고 와 달달한 향이 집 안을 맴돌고 있다. 방충망의 작은 구멍에 걸려있던 미세먼지가 바람에 휩쓸려 방바닥에 내려앉아 있다. 집을 이루는 모든 재료로부터 흘러나온 냄새 분자들도 있다. 벽지, 목재와 철제 가구, 콘크리트 벽, 플라스틱과 유리그릇, 패브릭, 종이, 가죽 소파…… 모두 섞여 출처를 알 수 없지만 새 집 냄새는 시간이 지나며 점점 옅어져 우리 집 고유의 냄새로 대체되었다. 그러고 보니 독특한 향신료와 허브 냄새가 집 전체에 깔려 있는 듯하다.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지켜보고 대부분 상상할 뿐이지만 얼마나 많은 일들이 집에서 벌어지고 있는 걸까? 우리가 볼 수 없고 감각할 수 없는 부재의 시간 동안 집은 그들에게 속해 있다. 우리의 부재로 그들의 존재가 드러나는지도 모르겠다.
오후 3시.
전화벨이 몇 번 울리다 멈춘다. 누구인지 알 수 없지만 분명 광고 전화일 것이다. 인터폰이 울려댄다. 빠르게 몇 번 누른 뒤 부재중임을 감지하고 문 앞에 택배 상자를 내려놓고 배송 문자를 남긴다. 예기치 않게 정전이 됐다가 잠깐 사이에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되돌아온다.
삐비빅. 지이잉.
전기의 힘을 빌려 쓰는 모든 기계들이 숨을 멈췄다가 다시 호흡을 되찾는다. 정전됐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흔적은 케이블 셋톱박스가 리셋되어 있다는 정도다. 우리가 없는 사이 벌어진 해프닝들을 그들이 알리지 않을 뿐 집은 끊임없이 다이내믹하게 돌아가고 있다.
저녁 7시.
다시 집은 법적 소유권자인 사람들에게 속한다. 가장 많은 존재들이 의기투합하는 시간이다. 이때를 하루 동안의 클라이맥스로 만든 건 보편적인 라이프 사이클을 만든 사람들이다. 아주 오랜 시간에 걸쳐 만들어진 의식과도 같은 시간이다.
가족들이 집으로 모여들기 시작한다. 집에 조명이 켜져 있는 모습을 보니 집에 돌아왔다는 안도감이 들기 시작한다. 파리에서 혼자 살던 시절에는 캄캄한 집에 들어가자마자 조명을 켜고 티브이를 틀어 쓸쓸함을 대체하려 했다. 누군가 함께라는 것이 주는 따뜻함이 불이 켜진 집을 본 순간 실감이 되는 모양이다.
하나둘씩 식탁에 모여 앉아 저녁을 함께 먹는다. 냄새, 소리, 맛, 이야기가 식탁에서 흐르고 있다. 감각적인 경험들을 공유함으로써 집은 가족을 연결하고 있다.
밤 10시.
야구 스윕승! 소리를 질러대며 응원하다가 흥분을 가라앉히며 방으로 들어갔다. 문을 닫으면 집의 범위가 방으로 축소되지만 가장 사적인 시간이 시작된다. 스탠드의 램프들이 노랗고 하얀빛과 열기를 뿜어내고 있다. 스마트폰 주위에 흐르는 전자파와 노트북에서 나오는 열기와 소리, 통신 덕트와 벽을 통해 들어온 전파들이 가상의 세계를 확장하고 있다. 집을 비워 부재한 상황에서도 무심하게 작동하는 존재들이지만 지금은 나와 함께 존재하고 있다. 블루투스 스피커로 바르셀로나의 라디오를 들으며 오후 3시의 바르셀로나 텐션을 즐기고 있다. 씨에스타 후에 시원한 맥주를 마시는, 휴식 후 휴식 같은 컨셉이다. 낮 동안 높게 올라갔던 텐션을 컴 다운시키며 작업의 다음을 이어간다. 이미 하루 전에 작업한 드로잉이지만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노트에 코를 갖다 대니 나무와 종이, 연필 냄새가 스며있다. 그 위에 색연필로 새로운 흔적들을 덧씌워간다.
새벽 2시.
밤이 점점 깊어가고 있다. 그 많던 존재들이 잠들거나 숨죽이고 있다. 나의 텐션은 낮게 침잠해 바닥으로 가라앉을 참이다. 창 밖에서 들리는 새소리, 가끔 지나가는 자동차 소리. 그 위에 타이핑 소리가 겹쳐지며 묘한 리듬을 만들어낸다.
개인적으로 이 시간이 머릿속이 가장 명료해지는 때다. 하지만 자야 할 시간이다. 조금씩 시간을 연장하다가 3시가 다 되어간다. 창 밖을 내다보니 나와 같은 이들이 점점이 불을 밝히고 있다.
새벽 5시.
아, 지금은 꿈속이다. 나는 분명 집에서 자고 있지만 꿈속에선 비행기 안에 있다. 시베리아 상공을 지나고 있다. 밑도 끝도 없이 이야기를 각설하더니 20대로 돌아가 있고, 파리로 유학을 떠나는 비행기 안이다. 꿈이지만 당황스럽고 막막한 마음이 밀려왔다. 그 후로 이런저런 해프닝들이 벌어졌다. 꿈에서도 힘들었던 탓일까, 문득 눈이 떠졌다. 실제 경험했던 일들이 조금씩 각색되어 꿈속과 현실을 오가며 나는 동시에 여기에 있으면서 저기에, 거기에도 있게 된다. 어느새 다시 잠이 들었는지 알람 소리에 놀라 잠에서 깨어났다. 새로운 하루가 시작되었다.
내가 주체가 아닌 전지적 작가시점으로 집을 관찰하고 엿보는 동안 집의 풍경이 얼마나 많이 바뀌는지 깨닫게 된다. 집 안에 있는 모든 존재들과 우리는 함께 살아간다. 존재하지 않던 것들이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고 평소에 의식하지 않기 때문에 없는 것처럼 느껴졌을 뿐이다. 새로운 존재들을 인식하기 시작하니 늘 그대로인 것 같은 익숙한 집도 색다르게 다가온다.
집에 있는 모든 존재들에게
오늘 하루 즐거운 시간이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