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벚꽃이 활짝 피어 있는 풍경을 보고 있다.
만개한 꽃이 바람과 햇빛 속에서 춤을 춘다.
오, 찬란하다.
광합성으로 저장해 두었던 에너지를
꽃을 피우는 데 모두 쏟아붓고
열매를 맺을 준비를 하며 다시 햇빛을 쬔다.
오오오, 풍요롭다.
어라, 그런데 지금 왜 벚꽃이 피어있지?
분명 가을이 시작되고 있었는데……
감탄과 동시에 의심이 스쳤고, 꿈의 세계가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꿈은 봄의 생동감으로 가득했지만, 역설적이게도 잠은 고요했다.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침대에 똑바로 누워 있다. 아, 꿈이었다. 그래, 지금은 가을 아침이로군. 눈을 감고 잠에서 빠져나오기를 기다린다. 때마침 알람이 협탁을 울려댔다. 진동을 동반한 알람 소리에 5초 만에 해제 버튼을 누르고 침대에서 벗어나 창가로 향했다. 좋은 꿈이었다. 꿈을 곱씹으며 아파트 공사 현장을 내려다보았다. 무슨 작업이 진행 중인지 아침마다 루틴처럼 공정을 확인한다. 매일 변화의 기척은 느끼지 못해도, 세상은 아주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 공사 현장만큼 그 변화를 잘 알 수 있는 곳도 없다. 기본적으로 공정표에 따라 움직이기에 단계를 밟아 완성되어 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콘크리트 덩어리 같던 건물이 어느새 집의 형태로 변모하고 있다. 아, 그런데 그 꿈은 무엇을 상징하는 걸까? 오늘 하루 종일 그 암시를 추측하게 될 것 같다. 하루하루 달라지는 현장을 보다가 문득 팬데믹 시기의 거리 풍경이 떠올랐다. 그때와는 너무 달라진 지금. 이런, 또 잊고 있었다. 가까운 과거도 너무 쉽게 잊는다. 우리는, 틀림없이 망각의 동물이다. 흑백 사진을 꺼내 보듯 잠시 그때 그곳으로 되돌아가 본다.
모든 흔적이 지워진 듯, 도시는 움직임을 멈춘 듯했다. 택배차가 몇 번 오간 것을 제외하면 길거리는 텅 비어 있었다. 눈을 감았다 뜨면, 모퉁이를 돌면 누군가 나타날 법도 한데 정말 아무도 없다. 현실인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무음의 골목길에 내 발자국 소리만 선명하게 울려 퍼졌다. 이 기묘한 상황을 더욱 실감 나게 한다. 멀리 보이는 인왕산 풍경도 미세먼지 때문인지 흐릿하다. 감염된 도시 속을 걷다 보면 마스크 안에서 들숨과 날숨의 리듬이 흐트러진다. 숨이 차고, 얼굴이 끈적거린다. 불쾌함, 답답함, 두려움. 복합적인 감정들이 마음속을 휘젓는다. 디스토피아를 그린 영화의 한 장면이 지금 우리에게 일어나고 있다. 훨씬 더 미래의 일이라 생각했는데, 우리는 이미 그곳에 와 있었다. 운이 나빠서가 아니라 사람에 의해 만들어진 세계였다.
병 그 자체보다 두려움과 충격이 우리를 강타했는지도 모른다. 한동안 몸을 웅크리고 살았다. 그래서일지도 모르겠다.
폐쇄와 멈춤 뒤의 움직임에서
그 어느 때보다
나는 자유를 느꼈다.
나도 모르는 사이 눈으로 움직이는 것들을 쫓고, 몸을 움직이며 탐험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시작된 움직임에 관한 탐험이다. 소설 『어둠의 속도』에서 자폐 스펙트럼을 지닌 주인공이 의사와 면담하는 장면이 있다. 몸을 앞뒤로 흔들고 있는 그는 방금 전 책 표지에 비친 빛이 더 이상 나타나지 않자 몸을 흔들어 빛을 찾아내려 한다. 몸을 움직이자 빛이 다시 반짝인다. 그 행동을 반복하며 주인공은 즐거워했고, 의사는 부정적인 문장을 보고서에 덧붙였다. 빛의 움직임은 우리 눈으로 관찰할 수도 있고, 직접 몸을 움직여 찾아낼 수도 있다.
그래. 움직임을 탐험할 수 있는 장소를 직접 찾아보는 것도 좋겠다. 음… 가장 가까이에서 관찰할 수 있는 곳을 생각해보니, 그건 사람의 몸속이 아닐까? 직접 들여다볼 수는 없지만 어렴풋이 감지할 수는 있다.
시선을 내 몸으로 가져갔다. 몸 안의 움직임에 귀 기울인다.
물이 꿀렁꿀렁 내려간다.
지끈지끈 통증들이 비명을 지른다.
근질근질 자리를 바꿔가며 가렵다.
움직일 때마다 뚝뚝 관절에서 소리가 난다.
쿵쿵 심장에서 박동이 느껴진다.
맥박이 미세하게 팔딱거린다.
소름 돋은 살갗과 솜털에서 긴장감이 배어 나온다.
원인 모를 작은 경련이 일어난다.
세포가 생성되고 소멸되며, 물과 음식물이 에너지로 바뀌고 다시 소비되는 끝없는 순환. 몸은 하나의 살아있는 공간이다. 그 움직임이 우리를 살아 있게 만든다. 더 이상 작동하지 않고 멈추면, 그것이 곧 죽음이다.
최근, 몸 여기저기에서 찌릿찌릿 저림 현상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위험의 알림이 진동을 보내고 있었다. 몸이 예전 같지 않음을 꺠달은 시점. 건강과 운동에 대한 지식을 속성으로 습득해 나갔고, 여러 가지 시도 끝에 맨발 걷기를 시작했다. 처음 땅 위에 발을 내디뎠던 순간을 기억한다. 땅 밑에서 발을 타고 올라오는 시원한 기운, 작은 돌을 밟을 때의 따끔한 자극, 마르고 바스러진 잎의 포근함, 잘 다져진 흙의 부드러운 촉감.
마침내 땅과 연결되었다.
이 문장이 떠올랐다.
지구의 일부가 된 느낌.
뭔가를 잃어버렸다가 되찾은 것처럼
마음에 평온이 깃들었다.
한참을 땅을 보며 걷는 행위에 집중하다 보니, 몸에 열이 나고 땀이 맺혔다. 몸 안의 흐름이 제대로 작동하기 시작한 걸까? 정확히는 모르지만, 몸 안에서 끊임없이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만약 신발 없이 맨발로 흙을 밟으며 살아가도록 진화되었다면, 삶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우리는 좀 더 몸에 귀 기울이며 살았을지도 모른다. 도시는 그에 맞는 재료와 디자인으로 설계되어 지금과는 전혀 다른 풍경이었을 것이다. 우리 몸에 닿는 면적이 넓어졌을 테고, 재료를 선택함에 있어 신중했을 것이다. 아쉽지만 진화를 되돌릴 수는 없다. 나는 그저 좀 더 자연스럽게 살고 싶을 뿐이다.
세상은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곳에서도 움직임으로 가득 차있다. 멈춰 있던 세계 뒤에 비로소 움직임의 가치를 깨닫는다.
팔과 다리에 힘을 빼고 몸을 가볍게 움직여본다. 우리가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행동 패턴으로 살펴보는 것도 좋겠다. 가늠하기 쉽게 가로 2미터, 세로 1.65미터의 공간을 떠올려본다. 1평에 해당하는 면적이다. 이곳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눕거나, 앉거나, 서 있을 수 있다. 책을 읽고 가벼운 스트레칭도 가능하다. 벽에 기대거나 바닥에 눕거나, 서서 근력 운동을 하거나 춤을 출 수도 있다. 가구 없이 비어 있는 공간이라면 여러 가지를 시도해 볼 수 있지만, 오래 머물 공간은 아니다.
그럼 이제 좀 더 크기를 넓혀 작은 방을 떠올려보자. 가로 2.7미터, 세로 3.3미터의 공간. 책장과 책상이 놓인 작업실에서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쓴다. 가끔 스트레칭을 하다가 일어나 방을 서성이며 생각에 잠긴다. 문득 재미있는 문장이 떠오른다.
침대와 암체어가 놓인 침실에서는 자기 전에 소설책을 읽는다. 어떤 책을 읽느냐에 따라 꿈의 내용이 달라지기도 한다. 오늘은 SF소설을 읽다 우주로 떠날 계획이다.
식재료를 보관하는 팬트리에서는 요리를 하기 전 재료 준비를 한다. 시들어가는 채소들을 꺼내 계획에 없던 반찬을 만들어도 좋겠다.
옷을 보관하는 드레스룸에서는 셔츠와 스커트를 고르고, 귀걸이를 한 다음 스카프로 외출 준비를 마친다. 날씨를 확인하다가 재킷 하나를 꺼내 팔에 걸쳤다.
벽 전체에 스크린이 설치된 방. 좋아하는 영화를 열 번째 보고 있다. 같은 장면에서 울고 또 웃는다. 아마, 내가 여전하다는 위로를 받기 위한 루틴일지도 모르겠다.
작지만 이곳에서 새로운 세계를 만든다. 우리는 공간에 맞춰 행동 범위와 패턴을 만들어내는 존재다.
방문을 열고 거실로 나간다. 섬처럼 독립적이었던 방들이 모두 연결되어 집이라는 공간으로 확장된다. 그로 인해 행동 방식이 좀 더 다양해진다. 그리고 ‘나’는 ‘우리’가 된다.
샤워를 하고 세탁기를 돌린 뒤, 나는 우리는 요리를 시작했다. 사과와 바나나, 무화과를 먹고 가지와 버섯을 넣은 샌드위치를 준비했다. 원두 두 가지를 섞어 커피를 내리고 식탁을 차렸다. 로맨틱 코미디 드라마 한 편을 틀어두고 브런치를 즐겼다.
식탁을 정리한 뒤 소파에 앉아 남은 커피를 마신다. 창밖에서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공간을 훑고 지나간다. 창가로 다가가 산을 바라보니 숲 사이사이, 갈색으로 물든 점들이 보이는 듯하다. 마음속에서 가을을 이미 받아들였기 때문일까?
방에서 집으로 공간이 확장되면서, 정적이었던 움직임이 좀 더 다이내믹해졌다. 혼자가 아닌 둘의 움직임이 교차되어 집안의 공기가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냄새, 소리, 맛, 색, 촉감… 잠들어 있던 감각들이 깨어났다.
이제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볼까? 한정된 공간에 머무는 대신 길 위를 걸어보는 거다. 공간적 제약이 줄어들수록 움직임을 관찰할 수 있는 확률이 더 높아질 테니까.
눈앞에 무엇이 보이는가?
도로 위, 점멸하는 신호등 불빛이 다소 어두운 낮의 풍경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초록불을 기다리는 동안 자동차 엔진 소리가 귀를 사로잡는다. 움직임을 극대화한 기계. 그것이 바로 엔진이다. 더 빠르게, 더 멀리— 어디든 갈 수 있는 원동력. 신호가 바뀌고 버스와 차들이 바로 옆을 스쳐 지나 시야에서 사라진다. 이전까지의 움직임보다 속도가 빨라졌다.
하천을 건넌다. 며칠 내린 비로 물의 양이 많아졌다. 다리를 건널 때 느껴지는 소리와 풍경도 평소와 완전히 달라졌다. 햇빛과 비를 충분히 받은 탓인지, 물가의 풀들이 야생처럼 서로 얽히며 흔들린다. 움직임은 우리에게는 의식적인 일이지만 자연에겐 훨씬 자유롭고 유연하다. 뭐든 당연한 것은 없다는 듯이 자연스럽다. 매콤한 풀 냄새가 바람을 타고 와 후각을 자극한다.
하천 가장자리 산책로를 따라 걷는다. 야생화들 사이에서 바람개비가 돌아가고 있다. 바람에 의해 움직임이 시각화되는 순간. 바람개비는 그 움직임을 보기 위해 만들어진 오브제다. 바람을 맞으며 나란히 서서 같이 움직여볼까 상상해본다. 웃음이 난다.
천천히 걷고 있는데 어디선가 경보음이 울린다. 센서가 오작동한 걸까? 한참을 울려댄다. 움직임을 포착하는 범위 안에서 센서가 작동하면 곧바로 소리로 알림이 울리는 원리. 움직임을 쫓는 것은 나 혼자만이 아니었다. 문득, 센서에 감정이입이 된다.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하더니 보슬비로 바뀐다. 작게 튀어나온 처마 밑에서 비를 피한다. 방금 전과는 완전히 다른 풍경이 눈앞에 펼쳐진다. 비야말로 움직임을 대표하는 존재 아닐까? 빗방울이 바닥에 튀며 흙냄새가 공기 중에 섞인다.
움직임은 우리가 보고, 듣고, 냄새를 맡고, 손으로 만지는 감각을 통해 다양한 방식으로 감지된다.
광장시장으로 가는 버스를 갈아타기 위해 서울역 버스 환승센터에 내렸다. 수많은 움직임이 교차하는 곳이다. 갈 때마다 늘 헤맨다. 버스 선택 장애가 일어나곤 한다. 편의를 위해 버스를 한 곳에 모아둔 장소지만, 나에겐 늘 정신없는 곳이다. 유럽과 비교해 보면 버스도, 사람도 너무 많다. 지금 이 순간 이곳에 함께 머무는 사람과 자동차만 해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서울이라는 도시가 얼마나 거대한지를 움직임이 교차하는 환승 정거장에서 새삼 깨닫는다.
버스에서 내려 광장시장 안으로 들어갔다. 물건을 파는 자와 사는 자가 교차하는 곳이 시장이다. 동선이 명확한 마트와 달리 이곳은 서로의 움직임이 뒤섞인다. 입구에 들어서자 기름에 굽는 냄새, 매콤한 냄새가 코를 자극다. 냄새와 소리, 비주얼까지—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움직임이 포착된다. 음식을 만들고 서빙하는 주방과 그 앞에 밀착된 좌석. 일시적인 관계지만 자연스럽게 친밀감이 형성된다. 맛은 어떤지, 재료는 무엇인지 이야기하고 괜한 넋두리도 나눈다. 푸드코트에서는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장면이다. 그 친밀함은 좁은 거리에서 나온다. 그래서일까? 혼자 있고 싶다가도 문득 재래시장에 오고 싶어질 때가 있다. 그 시끌벅적함이 가끔 그립다. 최인훈의 소설 『광장』이 떠오른다.
“광장은 대중의 밀실이며 밀실은 개인의 광장이다. 인간을 이 두 가지 공간의 어느 한쪽에 가두어 버릴 때,
그는 살 수 없다.”
어쩌면 나는 그 균형점을 찾기 위해 집과 길, 하천을 지나 환승센터와 시장과 광장을 오가는 탐험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멈춰 있던 세계에서 움직이는 세계로 탈출해 자유를 만끽하고 싶어 핑계 삼아 나온 것일지도.
내가 주체가 되어 움직임을 경험할 수도 있지만, 관찰자가 되어 움직임을 지켜볼 수도 있다. 그들은 사람들의 행동에 집중하고 패턴을 읽어낸다. 인류학자는 "우리는 왜 이런 행동을 할까?"라는 질문을 던지며 인간을 이해하고 싶어 한다. 교도소 중앙에서 죄수들을 감시하는 사람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위험을 대비한다. 중앙 감시실의 리더는 컨트롤타워가 되어 사건 전체를 조망하며 해결을 도모한다. 통찰의 시선이 없다면 단 한 번의 결정이 모든 것을 그르칠 수 있다. 조류학자는 새의 이동 경로와 서식지를 관찰하며 자연이 제대로 순환하는지 확인한다. 디자이너는 좀 더 편한 의자, 쾌적한 도시를 만들기 위해 사람과 자연을 관찰한다. 뮤지션은 움직임 속의 리듬을 포착해 새로운 음악을 만들고자 한다. 설치미술가는 감각을 자극하는 움직임들을 교차시켜 사람들에게 감동을 전하려 한다. 그리고 이 모든 관찰자를 압도하는 사람이 있다. 안무가. 움직임을 관찰하고 몸을 연구하며 포즈와 동작을 만들고 이야기에 맞춰 춤을 완성한다. 그들은 움직임의 언어를 창조하는 사람들이다. 움직임은 당연한 듯 보이지만 분명 에너지가 필요한 일이다. 그 방향성은 각자의 생각에 따라 정해진다.
사람들을 관찰하며 길을 걸었다. 이어폰을 끼고 음악을 듣는 사람, 큰 목소리로 전화 통화를 하는 사람, 문자를 보내는 사람, 메일을 확인하는 사람. 눈앞에는 없지만 분명 그곳에 있는 움직임.
발아래, 머리 위, 벽 너머, 도로 밑 그리고 아무것도 없는 빈 허공—
공간들을 하나하나 떠올리며 머릿속에 자리를 만든다. 그곳에 감지되는 보이지 않는 움직임들이 어쩌면 눈에 보이는 것보다 더 강하고, 더 다이내믹할지도 모르겠다.
우리를 둘러싸고
물이 흐른다.
전기가 흐른다.
가스가 흐른다.
전파 신호가 흐른다.
사람들의 은밀하고 사적인 대화와 기록들이 떠다닌다. 수많은 목소리가 담긴 전화 통화, 의미를 담은 문자와 이미지가 오고 간다. 라디오 DJ가 전하는 사연과 음악이 허공에서 스쳐 지나간다. 이제는 얼굴을 마주하기보다 목소리와 글, 마음과 생각이 전파와 전류, 바람을 타고 서로에게 전해진다. 유리병 안에 종이를 넣어 강물 에 띄우던 낭만은 없지만, 우리는 보이지 않게 서로 연결되고 있다.
노란색 파이프 안엔 가스가 흐른다. 집을 따뜻하게 데우고, 요리를 위한 연료를 공급한다. 가스 없는 세상도 있었겠지만 이젠 상상할 수조차 없다. 전류는 땅 속과 허공을 가르며 전선을 타고 흐르고, 마침내 벽 속 콘센트에 도착한다. 전기는 냉장고와 전자레인지를 돌리고, 전등의 불빛으로 집 구석구석을 밝힌다.
미로처럼 복잡하게 도시를 훑는 전선, 케이블, 파이프. 서로 중첩되어 무질서해 보이지만, 그 네트워크는 도시 전체를 하나로 연결한다. 일상을 지탱해 주는 동력들이 그곳에 모두 달려 있다. 시스템이 무너지면 리스크는 커질 수밖에 없다. 아무것도 연결되지 않았던 과거보다 지금은 훨씬 편리해졌지만, 그만큼 통제라는 양면도 함께 안고 살아가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더 이상 멀어질 수 없다. 이 편리함을 누리며 오늘 하루를 살아간다. 멀리서 바라보면 에너지의 근원은 점점 눈에 보이지 않는 선으로 변한다. 그 선을 따라 흐르는 움직임이 세상을 연결한다.
문득, 잊고 있던 지난밤의 꿈이 떠올랐다. ‘꽃이 만개하는 꿈’을 검색해보니 운이 트이는 꿈이란다. 미래는 알 수 없지만, 몇 단어를 입력해 얻어낸 글이 오늘 하루의 기분을 한층 끌어올려 주었다.
눈에 보이거나
보이지 않거나
방금 피어나기 시작한 꽃처럼
새롭게 만들어지는 세계가
이곳에 있다.
바로
움직임이 이끄는 세계다.
감각을 깨우는 움직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