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단을 오르내리는 발걸음, 멈춰 선 거리에서 포착한 미세한 변화, 차창 밖으로 흘러가는 풍경, 시계 초침이 움직이는 1초, 전선 속을 흐르는 전류. 눈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수많은 움직임들이 세상을 채운다.
움직임이란, 과연 무엇이라 말할 수 있을까. 수없이 많은 장면들을 이어 붙여 그 과정을 보여준다고 해서, 그 실체에 가까워질 수 있을까. 셀 수 없이 다양한 존재와 현상 속에 움직임은 스며 있고, 매 순간 다른 모습으로 태어난다. 그 무한한 변주 앞에서 우리는 다만 감각하고 탐색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렇게도 말할 수 있다. 움직임은 살아 있다는 증거라고. 그것은 우리가 ‘지금, 여기’를 감각하는 방식이다. 느린 변화와 작은 떨림까지도 관찰하며, 움직임이 만들어내는 공간과 리듬, 결을 따라가 본다. 감각이 이끄는 대로, 움직임 속으로 들어간다.
또각또각 계단을 오른다. 높이 176센티미터, 너비 270센티미터의 단 위에 발을 내딛는다. 다시 같은 높이와 너비의 단을 오른다. 그리고 또 하나 또 하나… 반복적인 움직임으로 계단의 단을 하나씩 차례대로 밟아가다 보면 어느새 6층에서 7층, 7층에서 8층에 다다른다.
마치 몸 안에
이 과정을 이식해 넣듯,
규칙적인 리듬감에
우리는 금세 익숙해진다.
드디어 13층에 도착했다. 이로써 계단이 품고 있는 잠재적 행위를 이뤄낸 셈이다. ‘계단의 존재 이유가 증명되었다’는 생각이 스쳤지만, 그건 어쩌면 계단이 아닌 나 자신에 대한 투영일지도 모른다. 무언가를 통해 존재를 증명하고 싶어 하는 인간의 본성. 나는 계단을 통해 나의 욕망을 확인한 셈이다.
계단은 계단이다. 계단일 뿐이다. 필요에 의해 태어난 하나의 도구. 우리는 끊임없이 뭔가를 만들고, 만들어진 것을 사용하며 실행하고, 문명을 발전시켜 왔다. 수많은 발명과 진화 속에 계단이 있다.
지형이 다양한 리스본과 같은 도시는 온갖 종류의 계단으로 가득 차 있다. 도시는 겉으로 드러난 모든 땅을 이용하려 하기 때문에, 지형의 변화가 다양한 곳에서는 계단이 지형을 극복하는 장치가 된다. 도시에서 멀어질수록 계단의 형태는 좀 더 자연스럽고 거칠며, 경계가 모호해진다.
오랜 시간 진화의 과정 속에
서서히 만들어져 갔을 계단의 탄생 덕에
우리는 산을 오르는 방식보다
좀 더 쉽게 도시의 지형을 극복할 수 있었다.
처음부터 계단이 세상에 존재했던 것은 아니다. 계기가 되는 어떤 순간이 있었을 것이다. 우연과 필연 속에 태어난 계단 위를 걸으며, 오늘의 탐험을 이어나간다.
고개를 젖히고 계단을 올려다보았다. 지그재그로 반복되는 선들이 위로 갈수록 점점 작아진다. 거푸집을 설치하고, 철근을 배근하고, 콘크리트를 부어 한 층 한 층 올려나갔을 과정들을 떠오른다. 그 시작이 문득 궁금해진다. 계단은 어디에서부터 왔을까? 어느 날 갑자기 뚝딱하고 나타난 도구와 장치는 없을 테니까.
그렇다면 계단이 아직 태어나지 않았던 때를 상상해 보자. 땅은 울퉁불퉁하고, 오르락내리락 지형이 춤을 추고 있다. 깎이거나 다듬어지지 않은 거친 산 자락들. 산은 혼자 우뚝 서 있지 않고, 평평한 지형과 만나는 경계선이 어디인지조차 모호하다. 여러 이미지들이 조합되고 나니 지각 변동과 비, 바람에 의해 만들어진 아주 오래된 원시적인 풍경이 머릿속에 펼쳐졌다.
동굴 생활을 거쳐 유목생활을 하던 우리 조상들은 정착 생활을 시작하며 농사짓기 좋은 평지에 자리를 잡았다. 평평함은 땅에 발을 디디고 서는 데 안정감을 주기 때문에, 힘을 실어 뭔가를 하기 유리한 조건이 되었다. 강과 평야로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그중 일부는 완만한 산자락이나 산비탈로 이동해 정착해 살 수 있는 방법을 고안해 나갔다. 비스듬한 땅을 큰 단으로 만들어 평평하게 바꾸고,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땅으로 바꾸었다. 산자락의 경계는 조금씩 사람들의 흔적으로 지워져 갔다. 그곳에서 자연스레 계단과 비슷한 무언가를 고안해 냈을 것이다.
자연 속 생활에서 건축과 도시에 대한 영감을 축적했듯, 계단에 대한 영감 또한 그곳에서 왔다. 덩굴 식물을 타고 오르거나 나무 표면에 홈을 내어 열매를 따먹으며, 본능적으로 보폭에 맞고 발을 딛기 쉬운 조건과 최적의 경로를 찾으려 했을 것이다. 거기에 계단의 씨앗이 심어져 있었던 셈이다. 덩굴로 된 밧줄을 엮은 외줄 사다리는 지금의 사다리로, 디딤돌을 놓고 높은 곳에 오르던 것이 지금의 계단으로. 결정적인 한 순간이 아니라, 그런 순간들의 합이 지금의 계단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그렇다면 건물에 계단이 등장한 건 언제였을까?
층이라는 개념이 없었던 시기의 집을 상상해 보자. 방금 막 결혼한 젊은 커플이 있다. 그들에게 필요한 아늑한 집을 마련했다. 낡았지만 뼈대가 튼튼한 1층짜리 벽돌집. 어느덧 결혼 생활 5년 차. 아이가 태어났다. 가족이 늘어남에 따라 공간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집 주변에 비어있는 땅으로 공간을 확장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옆으로는 더 나아갈 수 없게 되자 위로 확장할 방법을 모색하게 된다.
1층 면적만큼의 2층이 주어진다면 획기적으로 넓은 집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연결 장치가 필요했다. 바로 그 순간, 계단이 건축 안으로 들어왔다.
벽에 기대어 세워두던 사다리보다 경사도를 낮춰 완만하게 만들었다. 사다리와 디딤돌 사이 어딘가의 형태. 발 디딤판을 사람의 발 크기에 맞추고, 인체의 특성에 맞는 계단의 치수들을 조절했다. 난간을 세워 위험에 대비했고, 공간과 용도에 따라 계단은 원형, 나선형, ㄷ자형, ㅁ자형으로 변신해 갔다.
이렇게 계단은 태어나고, 발전되어 갔다. 계단의 등장으로 2층의 공간을 확보할 수 있었고, 창을 통해 바라보는 풍경도 달라졌다. 사람들은 더 나아가 꿈을 꾸기 시작했다. 건물을 점점 더 높게 쌓는 것에 대해. 기술은 높이 쌓는 것에 초점을 맞춰 건축 재료와 시공 방식을 발전시켰다. 그것이 우리가 지금 보는 세상으로 이어졌다.
열두 번의 계단을 반복하며, 마침내 1층에서 출발해 13층에 도착했다. 후… 호흡을 가다듬는다. 이만큼 올라온 게 아깝지만, 탐험을 위해 다시 엘리베이터를 탔다. 버튼을 누르고, 한 층 한 층 내려가는 엘리베이터를 보며 생각했다. 계단 이후에 나타난 혁명적인 장치가 엘리베이터라는 것을. 밖으로 나와 계단실을 아래에서부터 위까지 눈으로 훑었다. 만약 계단이 없었다면, 이 건물은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다른 관점에서 계단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그것은 모두에게 편리한 장치가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획기적인 일이, 또 다른 이들에게는 관심 밖이었을 수도 있고, 때로는 위험한 일이 되기도 했다.
건물을 높이 쌓아 올려 고층이 되어 갈수록, 건축은 ‘공간 약자’들에게 불편해져 갔다. 계단은 편리함을 목적으로 만들어졌지만, 모두에게 적합하지는 않다. 계단을 오를 수 없는 휠체어는 엘리베이터 없이는 위로 올라가지 못한 채 발이 꽁꽁 묶였고, 아무리 낮은 곳이라도 휠체어 바퀴가 넘지 못하면 경사로 없이 나아갈 수 없었다. 나이가 들면 계단을 오르내리는 일이 점점 쉽지 않아 지고, 계단은 곧 장애물이 된다.
이런 차별과 불균형을 규제할 법. 계단과 난간, 경사로, 엘리베이터에 관한 건축법규가 생겨났다. 공간 이동에 있어 최소한의 권리 정도다. 자유는 여전히 제한적이겠지만.
더 나은 해결책이 필요하다. 소설 [천 개의 파랑]에서처럼, 모든 장애물에 대응할 수 있는 휠체어가 나온다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도 아니면 장애가 더 이상 장애가 되지 않게 하는 의학적 기술이 가능하게 만들지도 모른다. 먼 미래에나 가능한 일이겠지만, 계단으로부터 모두가 자유로워져 높이를 넘나드는 일이 즐거웠으면 하고 생각한다.
평평하고 납작한 세계에서
계단이 우리를 끌어올려
수직의 세상에서 맛볼 수 있는
짜릿함을 주었으니,
이런 감각이 모두에게 공평하기를 바란다.
바람을 뒤로하고 다음 계단으로 발걸음을 향했다. 로비에 있는 계단을 찾아다녔다. 홀로 존재하는, 우아하고 다이내믹한 계단을 보고 싶었다. 층마다 계단이 똑같이 반복되는 곳에서는 찾을 수 없는 것들이 그곳에는 있기 때문이다.
큰 규모의 건물마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나왔다를 반복한 끝에, 드디어 찾고 있던 계단을 만났다.
안내 데스크 왼쪽, 우아하게 곡선을 그리며 서 있는 나선형 계단. 오래된 나무 손잡이의 매끈한 표면에 오른손을 얹고, 계단이 이끄는 대로 그 위를 걸었다.
문득 TV에서, 탱고를 처음 배워보는 사람이 강사가 이끄는 대로 온몸을 따라가던 장면이 떠올랐다. 처음엔 어색하던 몸짓이 금세 그럴듯해져 갔다. 춤을 추듯, 나선형 계단이 이끄는 대로 몸을 맡겼다. 2층에 도착해 계단을 내려다보니, 주름이 시원스럽게 잡힌 드레스 같았다.
몸을 돌려 다시 왼손으로 난간에 손을 얹고 1층으로 곡선을 그리며 내려왔다. 나선 방향으로 턴을 하며 계단 스텝을 밟아 나갔다. 중력의 방향으로 내려올 때는 속도감까지 더해져, 춤에 더 큰 힘이 실렸다.
몇 번 반복해 오르내리고 싶었지만, 주위를 둘러보니 그럴 상황은 아니었다. 밖으로 나와서도 한동안 그 흥에 맞춰 춤을 추듯 걸었다. 내 몸에 곡선의 움직임과 계단을 오르내리는 리듬감이 남아 있었다.
계단의 모양대로
몸을 그곳에 맞춰 걷다 보면
계단과 나란히 안무에 맞춰 춤추는
파트너가 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왈츠도 탱고도 재즈도 아닌
계단을 닮은 춤을.
잠깐 쉬었다 가볼까? 걸음을 멈추고 놀이터 벤치에 자리를 잡고 앉아 당을 보충했다. “어쩜 저렇게 즐거울까.” 생각하며 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구경했다.
문득, 이곳에 사다리와 계단에서 비롯된 놀이기구가 많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다리, 계단, 그리고 그 중간의 형태. 경사로, 그물 계단, 외줄 사다리, 정글짐……
모두 계단에서 파생된 사촌들이다.
계단 위에서 춤추는 것 같다고 느꼈던 것이 기분 탓만은 아니었다. 아이들에게 계단은 놀이 장치가 되고 있었다.
가만히 들여다보니 놀이 기구들이 모두 운동 효과를 준다. 다만 그 사실을 모른 채, 아이들은 그저 노는 것에 집중할 뿐. 그 점이 중요한지도 모른다. 모르는 게 약이고, 왼손이 한 일을 오른손이 모르게 하는 것.
계단을 오르면서 ‘내 몸이 계단을 따라 움직인 것’이 아니라, 내 몸 자체가 계단이 되어버린 감각을 경험했다. 공간의 구조에 몸이 맞춰지고, 그 움직임 속에서 몸과 공간이 하나의 리듬을 이루는 것. 이건 단순한 물리적 이동이 아니라, 몸이 공간을 ‘따르는 동시에 창조하는’ 주체가 되는 경험이다.
나는 당신에게 묻는다.
당신의 몸은 지금 어떤 공간을 따라 움직이고 있나요?
그 공간은 당신의 움직임을 어떻게 빚고 있나요?
계단이 남긴 감각들을 몸과 마음에 새겨 넣고, 질문에 답을 찾기 위해 다음 탐험을 계획한다.
멀리 나온 것도 아닌데, 세상은 이토록 계단으로 가득하다. 아주 우연의 순간, 진화의 방향이 결정되었을지도 모르지만, 우리가 지금 이뤄낸 도시와 건축, 일상의 모습을 보면 계단이 진화의 줄기에 속하지 않을 수 있다는 시나리오는 상상하기 어렵다. 대체 어떤 것이 계단을 대체할 수 있을까? 아주 먼 우주의 끝에, 우리와 전혀 다른 존재들이 이뤄낸 풍경을 본다면 다른 생각이 들 수도 있겠지만, 지금으로선 계단이 가장 본능적으로, 적확한 답으로 느껴진다.
평평하고 납작한 세계에서,
계단은 우리를 끌어올린다.
수직의 세계에서만 맛볼 수 있는
그 짜릿함과 해방감.
계단 위를 오르내리는 동안
몸 안에 새겨진 리듬감.
그 감각들이 몸에 희미하게 남아
우리를 저절로 움직이게 한다.
우아하게 그리고 리드미컬하게
한 바퀴 턴을 한다.
계단 위로, 내 몸 위로
움직임의 이야기들이 춤추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