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운 유리컵에 맺힌 물방울 위로
자작나무 탁자의 나뭇결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빛이 막, 도착했다.
마치 다른 세계에서 온 것처럼,
탁자 위 유리컵은 이전과 다른 모습이다.
빛에 같은 풍경은 없다.
내가 보는 세상이 얼마나 일관되지 않는지,
얼마나 다른 모습으로 변할 수 있는지…
빛이 향하는 길을 따라간다.
빛이 내게로 오는 길로 한걸음 다가선다.
아주 먼 곳,
태양에서부터 날아온 한 줄기 빛을 따라
오늘의 탐험을 시작한다.
어디로 가볼까?
머릿속에 떠오른 빛의 장소들을
하나씩 꺼내 돌려보다가,
한 장소에서 버튼을 멈췄다.
집 안에 있는 빛을 탐험해 보자.
눈을 뜨자마자 나는 이미 빛을 경험하고 있다. 커튼이 막지 못하는 눈부심을 멍하니 바라본다. 가는 실로 촘촘하게 직조된 천의 씨실과 날실 사이로 천 너머의 풍경이 실루엣으로 어른거린다. 타워 크레인의 윤곽이 드러나면서 그제야 무음이던 세상이 재생되듯 소리가 살아난다. 아파트 건설 현장에서 들려오는 ‘탕탕’ 기계음과 ‘끼익’ 자동차 바퀴 소리가 뒤섞여 조금 소란스럽다. 벌써부터 여름의 열기가 예감되는 아침이지만, 서쪽에서 불어오는 산바람이 그 기세를 누르고 있다. 바람에 커튼 끝자락이 흩날리자 또 다른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유리에 붙어 있던 작은 벌레가 위를 향해 기어간다. 그 뒤를 눈으로 반쯤 쫓다가, 퍼뜩 정신을 차린다. 아, 이제 몸을 움직여야 할 타이밍이다. 요즘 목 디스크 때문에 스트레칭은 하루를 여는 중요한 일과가 되었다. 커튼을 정리하고 온전한 바깥 풍경을 바라보며 운동을 시작한다. 하나, 둘 하나, 둘. 리듬감을 싣는다. 아침부터 빛과 그림자의 대비가 강렬하다. 동쪽에 면한 건물은 밝고, 반대쪽 면은 그림자까지 달고 있다.
베란다에 나가보니 행주가 바싹 말라 개운한 냄새가 난다. 이 냄새를 맡을 때마다 참 묘한 생각이 든다. 자외선으로부터 피부를 보호하기 위해 외출할 때마다 UV 차단제를 챙겨 바르면서도, 행주에 생명이 살 수 없는 환경을 만들기 위해 자외선을 이용한다. 이곳은 인간이 주체인 삶.
공복에 물 한 잔을 마시며 화분을 슬쩍 둘러보니 식물들의 이파리가 귀를 내리고 있다. 왠지 미안한 마음에 창가를 돌며 화분에 물을 주었다. 빛의 양이 많아지면서 식물들이 부쩍 자라 있다. 지구상의 모든 생물은 태양의 빛 없이 살아갈 수 없게 만들어져 있다. 빛이 생명의 시작과 끝을 결정한다. 동굴에 살던 우리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을 뿐이다. 사람은 빛이 없는 환경에서 살기 어려운 존재다. 식물들이 태양을 향해 팔을 뻗듯이, 우울한 날이면 나는 창밖으로 발을 뻗고 햇빛을 쐰다. 축축 처지는 감정이 스며들 틈을 주지 않기 위해. 그래. 이제 밖으로 나가보자.
현관문을 열고, 바깥으로 걸음을 옮겼다. 오늘 처음 도착한 곳은 한강진역 근처의 어느 미술관. 빛은, 이곳의 일부다. 유리창 너머로 스며든 자연광이 그림 위에 부드럽게 내려앉는다. 작가가 의도한 색이 조심스레 드러나고, 그 붓질의 여운까지 살아난다. 붓끝의 영감도, 이 빛 속에서 태어났을지 모른다.
빛은 언제나 빈틈없이, 열렬하게 우리에게 다가온다. 하지만 우리는 늘 같은 빛을 바라지 않는다. 그래서 루버, 차양, 블라인드가 빛을 가만히 눌러주고, 그 결을 부드럽게 정돈한다. 미술관은 그 미묘한 빛의 균형을 관찰하기에 이보다 더 좋은 장소가 없다.
1층 전시 공간은 천장이 높고 정방형 평면으로, 다른 곳과 독립적으로 배치되어 있다. 작품 수보다는 커다란 그림 몇 점에 집중하고 있다. 길에서 작품의 일부가 보이도록 전시되어 있는데, 홍보의 성격이 강한 로비 같은 분위기다.
외부 계단을 올라가면 2층과 3층의 전시공간이 펼쳐진다. 중정을 따라 길게 이어지는 창으로, 부드러운 빛이 고요히 스며든다. 나무 프레임에 끼워진 린넨 천이 유리 앞에 드리워져, 빛의 결을 천천히 정돈한다. 강하지도 약하지도 않게, 눈부심도 어둠도 없이, 빛이 스스로 균형을 찾아가는 듯, 아무 소리 없이 자리를 잡는다.
2층에는 1층보다 비교적 작은 시리즈 작품들과 설치 작업들이 전시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미술관의 최상층은 천창이나 고측창으로 두세 번 반사된 부드러운 빛이 들어오도록 설계되지만, 이 건물은 처음부터 미술관으로 지어진 곳이 아니었기에 필터나 전시벽을 이용해 빛을 조절한다.
작품의 의미를 가장 아름답게 드러내기 위해
미술관은 빛을 다듬는다.
빛은 이곳에서
가장 조용하지만
가장 중요한 재료다.
밖으로 나오니 공기가 습하고 뜨겁다. 열기를 식힐 장소가 필요했다. 지하철을 타고 서울을 벗어나 북쪽으로 향했다. 눈앞에 카페들이 여럿 있었지만, 유혹을 뿌리치고 숲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여름 숲에 들어서자, 주위가 갑자기 어두워졌다. 그 사이 잎과 잎 사이의 빈틈이 채워지며 숲 전체가 하나의 커다란 공간처럼 느껴진다. 밀도와 냄새, 소리, 색. 모두 달라졌다. 완전히 다른 장소로 변신해 있다. 겨울에서 봄, 그리고 여름으로 이어지는 동안 숲이 얼마나 다양한 공간감을 지니는지, 얼마나 변화무쌍한지— 긴 시간 이곳을 걸으며 그 변화를 체감해 왔다.
밀도가 빽빽한 입구를 지나 조금 걷자, 빛이 하늘에서 새어 나왔다. 순간, 숲 전체가 환해졌다. 머리 위에서 쏟아지는 빛은 여름의 열기를 밖에 남겨둔 채, 빛만 홀로 숲 안으로 들어왔다. 나뭇잎들이 한 덩어리로 묶여 바닥 위에 커다란 그림자를 만들고, 그 가장자리에서 삐쭉삐쭉한 잎 모양이 섬세하게 그려졌다. 도시에서도 빌딩 사이로 하늘에서 빛이 쏟아지는 경험은 흔하지만, 나무로 둘러싸인 숲 한가운데서 만나는 빛은 그 분위기부터 다르다.
문득, 온몸에 시원한 공기가 스며들었다. 나무와 흙냄새가 섞여 있다가 숲에 들어서는 모든 이들에게 미스트처럼 뿌려지는 듯한 기분. 모두 같은 냄새가 되어버린다. 우리는 이곳에서 숲의 일부로 존재하는지도 모른다. 잠시나마, 숲에 속해 있게 된다. 길을 따라 걷다 보니 빛이 조금씩, 그러나 확실히 움직이고 있다. 머리 위에 있던 태양이 점점 기울며 빛과 그림자도 함께 길게 드리워졌다.
숲은
다시 또 다른 모습을 드러냈다.
살아있는, 거대한 생명체나 다름없다.
빛이 있는 곳은,
언제나 새로 태어난다.
숲에서의 탐험이 끝나자, 다시 일상의 감각이 서서히 되살아났다. 빛이 만들어내는 일상의 무늬들을 바라보고 싶어졌다. 하루 중 더위가 가장 절정에 이른 시간. 하천 변, 창이 길게 나 있는 카페에 들어가 잠시 냉장 상태가 되기로 했다. 더위에 마비됐던 머리가 조금씩 다시 굴러가기 시작한다. 노트를 꺼내, 빛이 태양에서부터 나에게 도착하기까지의 그 까마득한 길목을 떠올리며 끄적였다.
아주 오래전에 출발해 저편에서 이편으로 날아든 빛 한 조각— 그 자체가 얼마나 기적 같은 일인지…
고개를 들어 창을 바라본다. 빛이 투명한 유리를 통과해 들어온다. 빛은 첫 번째 표면과 만나는 순간, 그 나아갈 길이 정해진다. 그대로 반사되어 튕겨 나가거나, 통과해 굴절되어 그 너머로 나아간다. 거쳐 가는 경로도, 그 끝 지점도 제각각이기에 빛의 여정은 그 수만큼이나 다양하다. 창에 새겨진 카페의 로고가 바닥에 투영되며, 그 빛의 여정이 마무리된다.
시원한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창 밖을 구경하고 있을 때였다. 이 더위에 자전거를 타고 가는 소년. 문득, 자전거 프레임에서 광채가 번쩍였다. 그 이후로도, 지나가는 자동차에서도 잠깐씩 광채가 나타났다 그리고 차와 함께 사라졌다.
빛이란, 어디에나 존재한다. 가만히 따져보면 하늘 위의 구름과 비를 포함한 모든 날씨도 빛에 의해 시작된 것이다. 태양 에너지가 바다에 흡수되며 물이 증발하고, 구름이 되고, 비가 내린다. 지금 지구의 모든 환경 역시 마찬가지다.
빛에 의해 만들어진 세계에
우리는 살고 있다.
돋보기를 통해 한 점으로 빛을 모아 종이를 태우던 어린 시절의 실험. 한 줄기 하얀 빛이 프리즘을 통과하며 여러 색의 빛으로 갈라지던 순간— 그 시절엔, 빛의 존재를 잘 이해하지 못했다. 지금도, 느끼려고 하지 않으면 그 존재감은 금세 희미해진다.
하지만 건축 답사를 다니면서 빛에 대한 나의 인식은 달라졌다. 직사각형 창, 둥근 창, 반원형의 터널, 스테인드글라스, 금속판의 표면, 작은 문틈 사이— 그 다양한 표면들에 빛이 닿는 순간 세상이 바뀌는 그 찰나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 이후로 빛은 내게 늘 첫 번째 탐구 대상이 되었다.
하늘을 올려다본다. 구름이 태양의 경로를 가로막아 빛이 땅으로 내려오지 못하고, 구름 위로 반사되어 다시 하늘로 되돌아가고 있다.
그늘 속에 있을 때는 얼른 이동해야 한다. 그늘을 따라 최적의 길을 찾아 움직였지만, 어느새 태양과 구름의 위치가 바뀌며 다시 강렬한 햇살이 되돌아왔다.
‘앗! 안 되겠다.’ 도서관으로 뛰어들었다. 흐물거리던 몸이 급속 냉장 상태가 되며 빳빳하게 되돌아왔다. 태양의 열(적외선)은 에어컨으로 상쇄되고, 빛(가시광선)만이 영향력을 미치는 공간 안에 들어온 셈이다. 책 몇 권을 뽑아 들고 쾌적한 공기 속에서 독서에 빠진다.
밖을 바라보니 어느새 해가 지고 있다. 도서관 안 가득 조명이 켜져 있다. 이미 켜져 있었지만, 바깥이 어두워지자 비로소 조명의 존재감이 눈에 들어온다. 일출과 일몰 시간을 계산해 보면, 하루 중 적어도 10시간은 태양을 대체할 빛이 필요하다.
시간을 확장하기 위해 만든
인공의 빛이,
바로 조명이다.
밖으로 나와보니 집집마다 조명이 켜져 있다. 식탁에 모여 앉아 있거나, 이리저리 무언가를 하는 실루엣들이 어른거린다. 조명이 일상의 조각들을 드러내고 있다.
건널목을 건너다가 옆을 바라보니, 차의 전조등 불빛이 새하얗게 비추며 순간 눈의 감각이 무뎌졌다. 태양의 빛은 차양이나 루버 같은 장치로 세기를 조절하지만, 조명은 그 자체로 용도에 맞게 강도를 조절해 만든다.
이제 집 앞이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문을 열고 들어가니, 현관에 불이 켜진다. 신발을 벗는 동안의 시간만큼만 조명이 켜졌다가 이내 꺼진다.
‘웰컴!’ 조명이 신호를 보낸다. 그렇다면 나는, 그에 맞춰 집 안의 조명들을 하나씩 깨워야겠지. 밤으로 이어지는 빛들이, 집 안 곳곳에서 하나씩 반짝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