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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의 길을 따라 피어나는 세상

by 귀리


물 한 모금.

꿀꺽.

입 안을 지나 목으로, 몸 구석구석을 적신다.

그 순간,

몸 안에 길이 열린다.

생명을 깨우는 길,

물의 길.


비가 내린다.

쏴아아아.

빗물은 땅속으로 스며들어 나무뿌리에 닿는다.

줄기와 잎 끝까지 물이 끌어올려지고,

나무 안에도 생명의 흐름이 열린다.


물은 하나다.

나뉘어도 다시 만나고,

흩어지고 변해도
언제나 어딘가에 있다.
돌고 돌아, 결국 다시

그 물로 돌아온다.


칼칼한 목을 타고 내려가는 물의 감각. 눈을 감고, 촉촉하게 젖어드는 그 시원함을 음미한다. 식도를 따라 내려간 물은 지금쯤 위와 장에 닿았을까. 보이지 않지만, 물은 쉼 없이 몸을 순환하고 있다.

바스락바스락 마른 풀, 흐느적 녹아내리는 대지 위로 톡톡, 빗방울이 떨어진다. 쩍쩍 갈라진 땅 틈새로 물이 스며들고, 촉촉해진 흙과 풀은 다시 숨을 쉰다. 표면을 적시던 물은 조용히 땅속으로 스며든다.

멈추지 않고 묵묵히 나아가는 물, 그 한결같음을 따라, 나도 물의 길을 걷고 싶어진다. 우리에게, 그리고 도시에게 물은 어떤 존재로 남아 있을까? 물처럼 흐르듯이. 그렇게, 탐험을 시작한다. 가장 가까운 곳, 테이블 위에서부터.



경계를 만드는 물

또르륵. 투명한 유리컵에 물을 따른다. 볼록하게 솟아오른 물의 표면. 한 방울씩 더해도 넘치지 않고, 한계점에 이를 때까지 팽팽하게 탱글거린다. 물 분자들이 서로를 잡아당기며 만든 긴장감이 볼록한 형태로 드러난다. 표면을 최소화하려는 본능이 결국 물이라는 존재의 지향을 드러낸다. 물과 사물이 만나는 경계는 언제나 물이 결정한다.

하지만 또 한편으론, 물은 주변의 다른 것들에 자신을 맞춘다. 테이블 위에 놓인 둥근 컵, 사각 컵, 좁고 긴 컵. 모양이 다른 컵을 바꿔가며 물을 따르면 매번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신한다. 둥근 물, 사각 물, 좁고 긴 물. 환경에 따라 자기 모습을 바꾸는 카멜레온보다 물의 변신은 몇 수 위다.

자신을 또렷이 주장하면서도 주변에 맞추기를 주저하지 않는 존재.

물은, 강하고도 유연하다.


돌고 돌아, 다시 물

문득, 책상 위에 담아놓은 물이 흔적도 없이 말라 사라졌던 순간이 떠올랐다. 달리 갈 곳이 없는데 사라졌다는 건, 다른 상태로 변환된 것이다. 물은 기체로 변신해 공기 속에 모습을 감추고 숨어들었다. 건조한 공기가 물 분자를 품어 촉촉해지고, 밤 사이 기온이 떨어지며 기체 상태를 유지하지 못한 물은 유리창에 작은 물방울로 맺혔다. 안과 밖의 온도 차이가 이 상태 변화를 불러온 것이다. 돌고 돌아, 물은 다시 자신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투명인간이라도 된 듯 자유자재로 변신을 이어가며, 그릇에 담겨 있던 물은 어느새 유리창으로 자리를 옮겼다. 형태는 달라졌지만, 이 작은 공간 안에서도 자연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고 순환하고 있었다.

불균형한 것을 균형으로 맞추고, 한 곳에 머물지 않고 계속 움직여 결국 제자리로 돌아오는 것. 어쩌면 자연뿐 아니라 우리 삶의 이치도 결국 그렇게 되고 마는 게 아닐까.


눈물, 순환의 입자

몸속에 저장된 물이 슬픔의 입자들과 만나 상태 변화의 변곡점을 지나며 눈물로 맺혔다.

또르르. 눈에 맺힌 물.

눈물은 흘러, 다시 피부 속으로 스며들거나 공기 중으로 흩어졌다. 어제 마신 물이 눈물이 되어 나온 것일까?

물의 또 다른 형태, ‘눈물’이 떠올랐다. 우리의 몸조차 거대한 자연의 순환 속에서 작동하고 있다. 슬픈 기억이 밀려올 때, 가슴을 울리는 드라마 장면에, 감동의 역전승에, 몸에서 눈물을 뽑아 순환 시스템 속으로 흘려보낸다. 눈물은 샘물처럼 차오른다. 이런 식으로 생각하니 작은 존재 같던 내가 점점 커다랗게 부풀어 오른다. 자연이 잘 돌아가게 하는 데 내가 아주 조금, 일조하고 있을지도.

우리 몸이 물로 이루어진 것처럼, 세상 역시 물의 장면들로 가득하다. 물이 끓으면 수증기가 되고, 기온이 영하로 떨어지면 결정이 생겨 얼음이 된다. 상태만 변했을 뿐, 모두 물이다. 눈, 얼음, 서리, 이슬, 비, 우박, 수증기… 물의 모습은 끝없이 확장된다. 여기에 직간접적으로 영향받는 것까지 생각하면, 세상은 물로 이루어져 있고 물에 의해 유지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물은 자연의 일부이면서, 동시에 도시 문명 속으로 들어와 새로운 길을 만들기 시작했다.

도시에 물이 들어오던 날

물이 우리 일상 속에 가까이 있는 것이 당연하게 느껴지지만,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사람이 만든 문명에는 언제나 시작점이 있었다. 물을 가장 적극적으로 일상 속에 끌어들인 건 로마 시대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물의 가치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 삶의 질을 유지하는 데, 물만큼 중요한 것이 없다는 사실을.

비스듬한 바닥, 물을 담을 수 있는 긴 그릇. 이 두 가지만 있어도 수원에서 로마 시내까지 물을 이을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 놀라운 건, 물의 길을 직접 만든 실행력이었다. 깨끗한 수원을 찾아 헤매고, 적절한 경사도를 실험하고, 수질을 어떻게 관리할 것인지까지 고민했다. 땅속, 평지, 골짜기. 물의 길은 그렇게 여러 지형을 따라 연결되었고, 도시는 결국 ‘물의 도시’가 되었다.

물이 수원에서 흘러 들어오던 그날, 사람들은 어떤 감정을 품었을까. 브라보! 박수치는 소리와 환호가 물소리와 함께 도시를 채웠을까.

그 물은 이전에도 어딘가로 흘러가고 있었겠지만, 그날 처음으로, 물은 인간의 삶 속으로 길을 내며 들어왔다. 나는 물의 발자국을 떠올리며, 문을 열고, 물이 향하던 그 방향을 따라 밖으로 나선다.



물, 열기를 식히는 도시의 숨

강렬한 태양의 열기가 아스팔트를 뚫고 땅속으로 흡수되지 못한 채 반사되어 공기 속으로 흩어진다. 오히려 받은 열보다 더 뜨겁게 되돌려준다. 여기에 자동차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까지 더해져, 도로변은 도시에서 가장 뜨거운 장소 중 하나가 된다.

도시 안에서는 특히 장소에 따라 온도 차가 크다. 바람이 잘 통하는지, 공기가 정체되어 있는지, 바닥이나 주변 건물의 재료는 무엇인지 등 여러 변수가 복합적으로 작용해 각 장소의 온도가 달라진다. 도시를 열감지 카메라로 본다면, 온도의 굴곡이 지형도처럼 드러날 것이다. 그만큼 장소에 따라 온도의 분포가 크다.

아… 그런데 너무 뜨겁다. 아스팔트에서 멀어져야 해!

빠르게 도로에서 벗어나 일단 그늘을 찾았다. 길 건너편, 보도에 드리워진 건물 그림자 속으로 몸을 숨겼다.

그 순간, 어디선가 물 냄새가 났다. 아, 이 근처에 작은 광장이 있었지. 냄새를 따라 걷다 보니, 쏴아아아, 바닥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광장 바닥에서 물줄기가 포물선을 그리며 솟아올랐다가 떨어진다. 물방울은 알알이 부서져 바닥 위로 흩어지고, 곧 배수구로 스며들며 사라진다. 그 일을 반복하는 동안, 물은 조금씩 뜨거운 공기를 잡아채 어디론가 데려간다. 시원해진 공기에 물줄기가 일으키는 바람까지 더해지니, 아까 도로변과는 완전히 다른 공기다.

좀 더 강한 소리가 들려 고개를 돌려보니, 반대편 벽에 인공폭포가 있다. 물이 얇은 막을 이루며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떨어진다. 낙하의 힘에 유속이 더해져, 물은 근육질의 피부처럼 무늬를 이루며 흘러간다. 태양이 내리쬘수록, 물은 그 열기를 받아내고 대신 식혀낸다.

바닥분수와 인공폭포, 연못 같은 수공간을 계획하는 일이 어쩐지 식상하다고 여겨 더 특별한 요소를 넣고 싶어 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하지만 한여름에 잠시라도 밖을 걷다 보면 그런 생각은 금세 무의미해진다. 진리를 깨닫는 데는 경험만 한 것이 없다.

도시는 점점 더 뜨거워지고, 그 열기에 우리는 문을 닫고 실내로 들어가 에어컨을 켠다. 하지만 우리가 외면하는 사이 물은 조용히, 꾸준히 온도를 낮추고 있었다.
도시는 숨을 쉰다.

그 숨결은 물.


물의 발자국 위에 자라나는 것들

공기 속에 수분이 가득하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구름의 색이 심상치 않게 검다. 역시나, 걷다 보니 한 방울씩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비를 좀 맞아볼까? 안경을 의식해 고개를 숙인 채 걷는다. 보도블록 위로 빗방울이 점점이 무늬를 만든다. 곧 빗방울은 굵어지고, 그냥 무시할 수 없는 정도가 된다. 허리에 묶어두었던 재킷을 머리 위에 얹는다. 임시방편의 우산이다.

비 오는 날, 우리는 물을 가장 가까이서 만난다. 빗방울은 보도블록 사이로 스며든다. 물은 낮은 곳을 따라 흘러가다, 빠져나갈 구멍이 보이면 주저 없이 향한다. 눈으로 따라가기 어려울 만큼 민첩하게.

시선을 나무로 돌린다. 온몸이 젖은 채, 나무는 비를 즐기는 듯하다. 주변의 흙은 빗물을 흡수하고, 물의 긴 여정이 시작된다. 땅속을 지나 언젠가는 강과 바다로 나아가겠지. 지금 이 순간의 물과 여정 끝의 물은 완전히 다르겠지만.

후드득후드득. 뚝뚝, 뚝, 뚝......

잠깐 스쳐가는 소나기였다. 빗방울이 잦아들고, 손을 내밀어보니 비가 그쳤다. 구름 사이로 햇빛이 스며 나온다. 언제 그랬냐는 듯, 도시는 수분을 말리고 빛을 낸다. 비는 땅속으로 스며들고, 고여 있다 증발해 공기 중으로 흩어진다.

누군가는 이런 생각을 했을 것이다.

‘물이 증발하거나 땅으로 빠져나가기 전에, 저장해두고 필요할 때 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어쩌면, 가뭄에 시달리던 농부의 생각이었을지도 모른다. 그에 맞는 공간이 필요했다. 벽과 바닥으로 커다란 그릇을 만들었다. 그렇게 유수지, 저수지 같은 공간이 생겨났고, 지금도 그 가치는 유효하다. 물의 발자국 위에 자라나는 생각들은 생명의 길로 이어진다. 물은 지속가능한 재료다. 필요한 곳에서 쓰이고, 다시 순환한다.


물처럼, 다시 흐르다

계속 걷다보니 목이 마르다.

물을 마신다.

꿀꺽.

다시, 물의 길이 열린다.


소리는 소리를 품을 공간을 기다리고,

그림자는 드리워질 벽과 바닥을 기다린다.

물은 언제나 담길 공간을 기다린다.

이제 막 준공을 마친 건물이 눈앞에 있다.

수조, 욕조, 물탱크, 컵.

아직은 비어있는 그릇들.

제로, 0이다.

그곳에 물이 채워지면,

수영장이 되고, 욕조가 되고,

물탱크가 되고, 물컵이 된다.

물은 이곳에 그렇게 스며든다.

그러나 이제는 안다.

머물던 물은 언젠가 바람처럼

또 다른 곳으로 흘러가리란 걸.


어느새 물이 지나간 자리에,

소리가 겹겹이 쌓이기 시작한다.
그리고 나는,

소리의 길로 천천히 발을 옮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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