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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귀리 Aug 22. 2023

물의 길을 따라 피어나는 세상

물은 하나의 물이다.

하나의 물줄기가 또 다른 물줄기를 만나면

하나의 물줄기가 된다.

모든 걸 합쳐도 1이 되고 마는

강하면서도 평화로운 물의 세계.


물 한 모금을 마신다.

꿀꺽.

몸 안에 물의 길이 열린다.

입 안을 거쳐 목을 넘어 몸 구석구석으로 흘러간다.

우리를 살게 하는 생명의 길이다.


비가 내린다.

쏴아아아

빗물은 땅 속으로 스며들어 나무의 뿌리에 가 닿는다.

줄기와 잎 구석구석까지 물을 빨아들인다.

나무 안에 물의 길이 열린다.

나무를 살게 하는 생명의 길이다.


물이 흐르는 길을 따라가 볼 생각이다. 도시 안에서 물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우리에게 물은 어떤 존재일까? 사색을 하며 물의 길을 따라 흐르는 풍경을 감상해 볼 것이다. 탐험은 테이블에서 시작한다.



01.

투명한 유리컵에 물을 가득 따른다. 볼록하게 솟아오른 물의 윗면. 한 방울씩 더해도 넘치지 않고 한계점에 이를 때까지 팽팽하게 탱글거린다. 물 분자가 서로를 잡아당기며 만든 텐션이 볼록한 형태로 드러난 것이다. 표면을 최소화하기 위한 형태를 완성하며 공동의 목표를 이루어냈다. 참으로 자기주장이 강한 물이다. 물과 사물이 만나는 모든 곳을 물이 결정하고 있으니 말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주변의 다른 것들에 자신을 맞춘다.

테이블 위에 둥근 컵, 사각 컵, 좁고 긴 컵.

모양이 다른 컵을 올려놓고 바꿔가며 물을 따르면 매번 다른 형태로 물은 변신한다.

둥근 물, 사각 물, 좁고 긴 물.

자기 모습을 환경에 따라 바꾸는 카멜레온보다 물의 변신은 몇 수 위일 것이다. 나를 주장하면서도 주변에 맞추는데 주저함이 없는 사람처럼 물은 강하고 유연하다.



02.

문득 책상 위에 담아놓은 물이 흔적도 없이 말라 사라져 버렸던 때가 떠올랐다. 달리 갈 곳이 없는데 사라졌다는 것은 다른 상태로 변환된 것이다. 물은 기체로 변신해 공기 속에 모습을 감추고 숨어들었다. 건조한 공기가 희석되어 촉촉해졌다. 밤 사이 밖은 기온이 떨어져 기체의 상태를 더 이상 유지하지 못하고 유리창에 물방울로 맺혔다. 안과 밖의 온도 차이가 상태 변화를 가져온 것이다.

돌고 돌아 물은 다시 물 자신으로 돌아왔다. 투명인간이라도 된 것처럼 자유자재로 물은 변신을 이어나갔다. 그릇에 담겨있던 물이 유리창으로 자리를 옮김으로 물의 형태(shape of water)가 달라졌지만 이 작은 공간 안에서도 자연은 사라지지 않고 순환하고 있었다.


불균형한 것을
균형으로 맞추고,
한 곳에 머물지 않고
계속 움직여
제자리로 돌아와 순환하는 것.

어쩌면 자연뿐 아니라
모든 이치가 결국은
그렇게 되고 마는 것이 아닌가 싶다.



03.

몸속에 저장된 물이

슬픔의 입자들과 만나

상태 변화의 변곡점을 지나며

눈물로 맺혔다.

또르르.

눈에 맺힌 물.

눈물은 흘러 다시 피부 속으로 스며들거나

공기 중으로 흩어졌다.

어제 마신 물이 눈물이 되어 나온 것일까?


물의 또 다른 형태, ‘눈물’이 떠올랐다.

우리의 몸조차 거대한 자연의 순환 속에서 작동하고 있다. 이런 방식으로 생각하니 작은 존재감이 점점 커다랗게 부풀어 올랐다. 자연이 잘 돌아가게 하는데 내가 아주 조금 일조하고 있을지도……

눈물을 떨구는 것에도 용기가 필요한 날들이 있지만 아껴둘 필요는 없다. 늘 울컥하게 되는 드라마 장면에, 감동의 역전승에, 슬픈 기억이 차오를 때 몸에서 눈물을 뽑아 순환 시스템 속으로 들어가면 된다. 흘린다고 말라비틀어지지 않는다.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눈물도 계속 차오르게 되어 있다. 웃음도 눈물도 정해진 정량이 있어 다 채우게 되어 있는 것이라면 아직 그에 못 미치는 나는 더 많이 웃고 울어야 할지도……


물이 끓으면 수증기가 되고, 기온이 영하로 떨어지면 결정이 생기기 시작해 얼음이 된다. 상태변화가 됐을 뿐 모두 물이다. 눈물뿐 아니라 눈, 얼음, 서리, 이슬, 비, 우박, 수증기…… 물의 영역이 확장된다. 거기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받는 것까지 생각하면 세상은 물로 이루어져 있고 물에 의해 유지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우리 몸의 70퍼센트가 물인 것처럼 세상도 물로 가득하다.



04.

물이 우리의 일상 속에 가까이 있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지만 처음부터 그렇지는 않았다. 사람이 만든 모든 문명은 그 시작점이 있게 마련이다.

물을 가장 적극적으로 일상 속으로 가져왔던 건 로마 시대였다. 그들은 매우 실용적인 사람들이었다. 삶의 질을 유지하기 위해 물만큼 중요한 것이 없음을 인식했다. 물을 일상으로 가져오고 싶었다. 비스듬한 바닥과 물을 담을 수 있는 아주 긴 그릇이 있다면 수원으로부터 로마시내까지 길을 만들어 물을 쉽게 운반할 수 있을 터였다. 관찰력만 있다면 물의 속성은 금세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그보다 놀라운 건 물의 길을 만들어낸 실행력이었다. 깨끗하고 지속가능한 수원을 찾아다녔고, 적절한 경사도를 실험했으며 수질을 관리할 방법을 모색했다. 땅 속에서부터 평지, 골짜기에 이르기까지 쉽고 빠르고 경제적인 방식으로 건설할 수 있도록 계획하고 시공했다. 그렇게 로마 주변의 수원으로부터 수로(물의 길)를 만들어 도시 전체를 물의 도시로 만들었다. 물이 수원에서부터 출발해 로마까지 흘러 들어오던 그 역사적인 순간, 모두가 지켜보며 환호를 했을까? 브라보를 외치며 박수를 치는 소리가 물소리와 함께 도시를 가득 채우지 않았을까 상상해 본다.

물은 그 이전에도 어딘가로 흘러갔겠지만 우리의 일상 속으로 물의 길을 열어준 그들을 생각하며 (우리의 조상들은 아니지만) 물이 향하는 곳을 따라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 탐험을 이어나갔다.



05.

강렬한 태양의 열기가 아스팔트를 뚫고 땅 속으로 흡수되지 못한 채 반사되어 공기 속으로 흩어지고 있다. 오히려 받은 열보다 더한 열을 뿜어내고 있다. 자동차의 열기까지 더해 여름에 가장 더운 곳 중 하나가 도로변이다.

어디나 마찬가지겠지만 도시 안에서는 특히 장소에 따라 온도의 변화가 크다. 바람이 잘 통하는지, 공기가 고여있는지, 바닥과 주변 건물의 재료가 무엇인지와 같은 복잡한 변수들이 합쳐져  장소의 온도를 결정한다. 열감지 적외선 카메라로 도시를 보면 그 모습이 지형의 변화가 큰 땅의 지형도와 비슷하지 않을까? 그만큼 장소에 따라 온도 차이가 크다.

아… 그나저나 너무 뜨겁다.

아스팔트에서 멀어져야 한다!

빠른 걸음으로 도로에서 달아났다. 일단 그늘을 찾아 길 건너 보도에 드리워진 건물의 그림자 속으로 숨어들었다.

어디선가 물 냄새가 난다. 그러고 보니 근처에 작은 광장이 있다. 냄새를 따라 걷다 보니 쏴아아아 바닥을 내리치는 소리가 들린다.

광장 바닥에서 물이 줄기가 되어 포물선을 그리며 솟아올랐다가 떨어졌다. 알알이 부서지며 바닥에 흩어진 물이 배수구로 내려가 사라졌다. 그 일을 반복해서 하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 물은 조금씩 더운 공기를 잡아채 어디론가 데려갔다. 시원해진 공기에 물줄기가 일으키는 바람까지 더해 도로변과는 완전히 다른 공기다.

좀 더 강렬한 소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반대편 벽에 인공폭포가 있다. 물이 얇은 막의 형태로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떨어졌다. 낙하의 힘에 유속의 힘까지 더해져 물은 근육이 도드라진 건강한 피부처럼 무늬를 이루며 흘러가고 있었다. 태양의 열기가 더해지는 만큼 물은 열기를 빼내고 있었다.

바닥분수와 인공폭포, 연못 같은 수공간을 계획하는 일이 어째선지 식상하다고 생각해 좀 더 특별한 요소를 넣어 디자인하려 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하지만 한여름에 잠시라도 밖을 걷다 보면 그런 생각이 무의미해진다. 마치 천만 관객이 본 영화를 외면하다가 한참 후에 보고 나서 왜 이제 봤을까 후회하는 것처럼. 진리를 깨닫는 데는 경험만 한 게 없다.


도시는 점점 뜨거워지고
그 열기에 모두 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가 에어컨을 켠다.

우리가 외면하는 사이
물은 온도를 낮추고 있었다.



06.

공기 속에 수분이 가득하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구름 색깔이 심상치 않게 검다. 역시나 걷다 보니 한 방울씩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마음이 답답한 차에 비를 좀 맞아볼까 싶다. 안경을 의식하며 고개를 숙이고 걷고 있자니 보도블록 위에 빗방울이 점점이 무늬를 만들고 있다. 빗방울이 굵어져 그냥 방치할 상황이 아니다. 허리에 묶어두었던 재킷을 머리 위에 얹어 임시방편으로 우산을 만들었다. 여름옷의 특성상 살짝 방수가 되는 듯하다.

물을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날이 비 오는 날이다. 빗방울은 보도블록 사이로 스며들었다. 물은 상대적으로 낮은 곳을 따라 흐르다가 빠져나갈 구멍이 나오면 주저함 없이 그곳을 향했다. 우리가 눈으로 따라갈 수 없을 만큼 민첩하게 움직인다.

나무에 시선을 돌려보니 온몸이 젖은 채 비를 만끽하는 듯하다. 나무 주위의 흙으로 빗물은 빨려 들어갔다. 물의 긴 여정이 시작된 것이다. 땅속을 거쳐 강과 바다로 나아갈 것이다. 지금과 그곳에 도착한 뒤의 물은 전혀 다르겠지만.

후드득후드득 뚝뚝 뚝 뚝……

잠깐 지나가는 비였나 보다. 떨어지는 방울의 횟수가 줄었나 싶어 손을 가져다 대보니 비가 그쳤다. 구름 사이를 뚫고 햇빛이 새어 나왔다. 언제 그랬냐는 듯이 도시는 수분을 바짝 말리고 빛을 낼 것이다. 비는 땅 속으로 스며들기도 하지만 고여있다가 공기 중으로 증발해 날아가기도 한다.


누군가 이런 생각을 한다. ‘만약 물이 증발하거나 땅으로 빠져나가기 전에 저장해 필요할 때 사용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가뭄에 물이 절실했던 농부의 생각이었을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에 맞는 공간이 필요했다. 벽과 바닥으로 커다란 그릇을 만들었다. 유수지, 저수지와 같은 공간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지금도 그 가치는 유효하다.

친환경 건축에서 물은 햇빛, 식물과 함께 가장 중요한 재료다. 그냥 내버려 두면 알아서 순환하겠지만 필요한 곳에 쓰고 난 뒤에도 물은 순환한다.

물은 정말 지속가능한 재료다.


계속 걸었더니 목이 마르다.

물을 마신다.

꿀꺽.

다시 물의 길이 열렸다.



물은 물이 담길 공간을 기다린다.

소리는 소리가 담길 공간을 기다린다.

그림자는 드리워질 벽과 바닥을 기다린다.


이제 막 준공을 마친 건물이 눈앞에 있다.

그곳에 물이 담길 공간이 있다.

수조, 욕조, 물탱크, 컵.

아직 비어있는 그릇들.

0, 제로다.

그곳에 물이 채워지면

말 그대로 수영장, 욕조, 물탱크, 물컵으로 태어나게 된다.

이제 물은 그런 존재로 이곳에 살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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