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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의 얼굴에 말을 걸다

by 귀리


나는 벽 속의 너를 보고 웃지


내 얼굴이 어떤가요?

지금, 나는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요?

나 자신을 볼 수 없기에, 당신에게 물을 수밖에.

방금 스쳐 지나간 건물들의 표정이 어떤지

고개를 돌려 눈을 마주쳐 보세요.

품고 있는 이야기를 술술 내뱉어 주진 않을 거예요.

그러니 이야기는, 우리가 풀어낼 수밖에.


사람의 얼굴, 건물의 얼굴

카페 테라스에 앉아 사람들의 얼굴을 관찰한다. 팬데믹 동안 마스크에 가려졌던 얼굴들이, 마스크를 벗자마자 표정과 감정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것이 흥미롭다. 마치 아웃사이더로 구석에 숨어 있다가 정면에서 들킨 것 같은 느낌이다. 그 솔직하고 직설적인 감정 표현들에 시선이 간다.

모두 다른 얼굴, 다른 표정의 사람들. 이목구비 각각의 비례와 헤어스타일, 피부 톤 같은 디테일의 차이에 따라 완전히 다르게 보인다. 표정은 얼굴의 인상을 좌우한다. 오늘 사람들의 표정은 한껏 여유롭다. 긴 연휴의 전날이기 때문이다. 휴일이 시작되면 시간이 지날수록 아쉬움과 초조함이 뒤섞이지만, 지금은 연휴 바로 전날이다. 입꼬리가 올라가고, 눈가에 주름이 지며, 목소리에 들뜸이 배어 있다. 하지만 각자의 다름을 결정짓는 큰 차이는, 사람마다 묻어 나오는 고유의 분위기, 아우라에서 비롯된다. 삶에 대한 철학과 가치관이 얼굴에 자연스레 스며 있어서, 우리는 첫 만남에서 어렴풋이 상대를 파악하게 된다.

문득 내 얼굴이 궁금해져 거울 속 내 모습을 마주한다. 나는 정작 내가 어떤 사람인지 모른다. 바라볼수록 낯설고도 친밀한 느낌. 왜 이런 이중적인 기분이 들까? 거울 속 나는 분명 내가 틀림없는데도, 마주 보고 있는 나는 낯설다.

카페에서 나와 삼청동, 늘 거닐던 거리를 걸었다. 익숙한 건물들 앞에서 천천히 주변을 배회하다가 걸음을 멈추고, 건물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천천히 하나하나 뜯어볼수록, 내가 일상을 보내며 경험해 온 장소가 아닌 듯한 괴리감이 느껴진다. 목욕탕 굴뚝이 남아 있는 붉은 벽돌집 앞에 서서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문득 머리가 희끗한 노인의 잔잔한 미소를 본 듯, 마음이 여유로워진다. 바로 옆 이층집은 세련되면서도 수수한 도시인 같다. 모퉁이를 돌며 보이는 또 다른 이층집은 프로방스의 분위기를 닮았다. 마당 한가운데 보라색 등나무꽃에서 프로방스 들판의 라벤더를 본다. 휴일 전날의 북적이는 거리. 사람과 건물의 얼굴을 구경하기에 좋은 날이다.



얼굴로 말하는 건물들

걸음을 옮겨 인사동의 작은 교차로에 도착했다. 한 바퀴 빙그르르 돌며, 길을 둘러싼 건물의 얼굴들을 바라보았다. 인사동에 파는 물건만큼, 이곳을 찾는 사람들의 얼굴만큼, 건물들의 얼굴도 다채롭다.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어떤 뉘앙스를 품고 있는지, 우리의 얼굴과 다를 바가 없다.

구불구불 골목을 따라 거닐며 전통 한정식집과 주점들을 마주한다. 오래된 한옥 정면에 커다랗게 음식 사진과 메뉴가 나열되어 있고, 사람들은 어떤 음식을 먹을까 궁리하며 천천히 골목길을 걷는다. 그 목적에 부합하는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이다. 입구를 지나 안으로 들어가면, 전형적인 한옥의 마당과 툇마루가 펼쳐진다. 기대를 충족하는 한옥의 분위기 속에서 막걸리에 파전을 먹는다.

골목길에서 나와 큰길로 향했다. 건물의 폭과 높이가 몇 배로 커져 있다. 건물들은 저마다 말하고 싶은 것, 상징하고자 하는 무언가를 얼굴에 품고 있다. 이곳의 상가들은 자신을 홍보하고 싶다. 그래서 얼굴 대신 간판을 내세운다. 출신 학교와 자격증, 전문가를 평가하는 대회에서 1등 했다는 문구들이 건물 외벽에 도배되다시피 한다. 상업 시설은 직설적인 방식으로 자신을 포장하고 주장하려 한다. 그래서 네온사인이 번쩍이고 간판으로 가득한 건물에서는 준공 직후의 모습을 더 이상 찾아볼 수 없다. 순수 예술이 아닌 이상, 모든 디자이너가 마주하는, 씁쓸한 현실 자각의 순간이 찾아온다.

발길 닿는 대로 걷다 보니 어느새 헌법재판소 앞에 도착했다. 고개를 들어 정면을 바라보았다. 그는 공정하고 위엄 있고 싶다. 그래서 비대칭보다는 대칭을, 단단한 의지를 보이기 위해 입면 전체를 돌로 마감했다. 그로 인해 정말 공정하고 든든한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그 앞에 서면 누군가의 양심은 찔릴 수 있겠다. ‘나는 헌법재판소다’라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다시 태어난 얼굴

떠올리면 가장 기분이 좋아지는 건물의 얼굴. 파리 12구 집 앞에 있던 ‘비아뒥 데자르(Viaduc des Arts)’의 얼굴이 머릿속에 재생된다. 파리에 사는 동안 거의 매일 그 산책길을 걸었다. 바스티유와 뱅센느를 잇는 4.5킬로미터의 철도가 그 시작이었다. 20년 가까이 버려진 채 아무에게도 속하지 않던 폐허의 공간. 철로 아래 텅 빈 아치는 예술가들의 아뜰리에로 채워졌고, 철로 위는 공원으로 다시 태어났다. 본래 얼굴을 가리지 않고, 자신이 지닌 구조와 공간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겉모습은 달라졌지만 본질은 그대로다.

나는 이렇게, 다시 태어난 건물들의 얼굴에 매력을 느낀다. 알함브라 궁전처럼, 이슬람과 르네상스 또는 로마와 가톨릭이 섞인 남유럽 건축들에서도 이런 얼굴을 찾을 수 있다. 역사는 파란만장하지만, 남기고 간 흔적들은 시간 속에서 겹겹이 아름다움을 쌓아가고 있었다. 얼마나 많은 시간을 살아온 얼굴들인가. 변화에 얼마나 유연한가. 물론 건축이란 사람에 의해 디자인되고 만들어지는 것이지만. 이런 건물들은 기본 바탕이 바뀌기 전에도 이미 좋은 디자인인 경우가 많다. 그리고 다시 태어나는 과정에서, 새로운 쓸모가 공간에 자리를 잘 잡았다는 공통점이 있다.


시간이 만든 얼굴들

빌딩 사이를 걷다가 시청 광장에 멈춰 섰다. 길 건너 낮게 펼쳐진 서울도시건축전시관 뒤로, 대한성공회 성당의 얼굴이 보인다. 6층짜리 국세청 별관이 철거되었을 당시, 서울에서 일어난 도시적 사건 중 가장 놀라운 일이라 생각했다. 개발의 논리와 정치의 개입이 난무하는 서울에서 이런 일이 일어났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건물이 사라지고 난 뒤 펼쳐진 풍경이 이토록 아름답다니. 늘 덧붙이기만 하던 서울의 도시 풍경이, 하나를 덜어냄으로써 더 나은 방향으로 바뀐 것이다.

성당의 종소리가 빈 광장을 울렸다. 경건한 마음이 차올랐다. 횡단보도를 건너 전시관의 지붕에 올라 성당의 측면을 바라보았다. 화강석과 붉은 벽돌로 이루어진 로마네스크 양식의 벽 위에, 붉은 기와를 얹은 경사지붕이 이중으로 얹혀 있었다. 기본 양식은 서양에서 비롯되었지만, 구석구석 디테일은 동양적이다. 이 시기의 건축들이 갖는 독특한 매력. 새로움을 받아들이되, 우리다움을 추구하는 정신이 깃들어 있다. 십자형 평면 중앙에 자리한 종탑에서는 종소리의 여운이 길게 맴돌고 있다. 그러고 보니 정오를 알리는 종소리였다. 어쩐지, 시나몬 롤 하나를 손에 들고, 탐험을 이어나갔다. 성당 주변은 유독 일제강점기의 건물들이 많아 시간 탐험을 하는 기분이 든다. 성당을 오른편에 끼고 걷다 보면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까지 피신해 갔던 ‘고종의 길’을 만나게 된다. 그 길을 따라가며, 그 시절을 상상해 보았다.

역사는 멀리 있지 않다. 우리 옆에, 발밑에 지금 여기, 함께 있다.


이젠 이 길이 무섭지 않아


, 감정이 머무는 곳

모두 잠들어 있는 새벽. 며칠 동안 봐 두었던 벽 앞에 서서, 미리 생각해 둔 이미지를 떠올린다. 시작이 중요하다. 달칵. 스프레이를 흔들어 선 하나를 대각선으로 긋는다. 치이익. 칙. 달칵. 치이익. 칙. 코를 찌르는 자극적인 스프레이 냄새. 원래 그려져 있던 배경 위에 그림을 덧씌운다. 벽 위아래를 가로지르는 전선과 설비, 불규칙하게 벌어진 금을 보는 순간, 또 다른 아이디어가 떠올라 원래의 계획을 수정한다. 장소에 기반해 즉흥적으로 태어나는 그림, 그것이 그라피티니까. 누군가 이 스릴 넘치는 시간을 방해할까 두근거리며 그림을 그려 나간다. 완성된 그림을 인증 사진으로 남기고, 빠르게 정리한 뒤 자리를 뜬다. 첫 그라피티의 경험은, 그다음과 또 그다음으로 이어진다.

상상해 보았다. 벽 위에 그라피티를 그리는 마음은 어떤 걸까. 궁금했고, 부러웠다. 사람들은 이런 방식으로도 하고 싶은 말, 표현하고 싶은 감정을 담아낸다. 그리고 그것을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고 싶어 한다. 한강과 도시를 연결하는 토끼굴은 예전 같으면 걷기 삭막한 무서운 장소였겠지만, 그라피티스트들이 벽을 채우기 시작한 이후 힙한 장소가 되었다. 주민들과의 합의 끝에 접점을 찾으면서, 이제 몰래 그리고 도망치듯 떠나는 일은 사라졌다. 을지로 4가의 상가들이 문을 닫고 셔터를 내리면, 그때부터는 셔터 위에 그려진 갖가지 그라피티 그림들을 만날 수 있다. 공공예술에 가까워진 그라피티는 어느새 벽화와의 경계가 모호해졌다. 그 스릴감과 미스터리함이 어쩐지 아쉽고 그립기도 하지만, 도시 속 위트 있는 그림들이 늘어간다는 뜻이기도 하다. 벽 속의 정치인이 눈을 찡긋 윙크를 하고 있다. 자유를 상징하는 캐릭터가 무기를 든다. 잔혹한 장면이 오히려 우스꽝스럽고 아이러니하게 표현된다. 그 위에 유머 한 스푼, 시니컬함 한 스푼을 얹는다. 그라피티 속 그림들은 세계 곳곳에서 우리에게 위트를 날리고 있다. 가볍고 재미있는 단어들, 허무함과 비판이 담긴 문장들, 평화와 자유를 추구하는 메시지들. 문자들이 춤을 춘다. 글자의 획들이 직선에서 곡선으로, 자유 의지를 가진 것처럼 꿈틀거린다. 답사를 다니던 중 우연히 만났던 벽 속의 얼굴들이 종종 떠오른다. 다섯 명의 농구 선수가 벽 속에서 코믹한 포즈로 웃음을 전하고 있었다. 웃기고 말겠다는 각오처럼. 나는 어느새 그들의 표정과 말에 빠져들어, 입꼬리를 올리고 웃고 있었다.



, 나를 닮은 얼굴

상업과 공공의 건물이 광고와 상징에 초점을 맞췄다면, 집은 좀 더 사적이고 다양한 얼굴을 하고 있다. 사람의 표정과 말투에서 그 사람의 태도를 읽을 수 있듯이, 집은 건축가와 집주인의 세상에 대한 태도를 보여준다. 건축이란 디자인하는 자와 디자인을 의뢰하는 자 사이에서 만들어진다. 집주인의 삶에 대한 철학과 건축가의 집에 대한 철학이 건축물에 그대로 투영된다. 문 손잡이부터 바닥 마감재까지, 하나하나 선택하며 그려낸 얼굴이 곧 집이다. 프라이버시와 개방감에 대한 생각에 따라 집은 열려 있거나 닫혀 있을 수 있다. 내향적인지 외향적인지에 따라, 혹은 방해받고 싶지 않다는 욕망에 따라 마당의 위치와 건물의 배치가 달라지고 창문의 크기와 방향도 조절된다. 재료의 선택에서 취향이 드러나고, 환경에 대한 가치관도 엿볼 수 있다. 그렇게 복잡한 선택들을 마주하며 건축가와 건축주 사이의 줄은 이리저리 오간다. 그리고 마침내 마지막 도면에 ‘오케이’ 사인을 하게 된다. 그 타협의 과정과 결과가 집의 얼굴에 배어 나온다.

언젠가 네덜란드를 여행하며, 암스테르담 운하를 따라 늘어선 집들의 풍경을 본 기억이 있다. 집 하나하나의 얼굴 속에 집주인의 취향이 스며 있어서인지 같은 집이 하나도 없었다. 그곳에 나의 집 하나를 넣는다면, 어떤 얼굴이면 좋을까 상상해 보았다. 나를 닮은 집.


나란히 노래하는 벽들

건물과 건물 사이, 이가 빠진 듯 비어 있는 공간들이 눈에 들어올 때가 있다. 법적으로 규제된 최소한의 이격거리다. 하지만 이 공간은 종종 실외기가 자리를 차지하거나, 창이 있어도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 그 쓰임새가 애매하다. 그래서 공간 실효성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지곤 한다. 그 대안으로 건물들을 붙여 짓는 ‘합벽 건축’이 있다. 유럽 도시를 산책하다 보면, 건물과 건물 나란히 붙어 있는 경우가 많다. 비효율적인 공간은 줄고, 대신 마당의 크기를 더 키울 수 있다. 물론 화재 등 위기 상황에 대비해야 하긴 하지만, 합벽 건축은 여러모로 유리한 방식이다. 길에 바짝 면한 건물의 문을 열고 들어가면 입구 홀과 중정이 나온다. 마당은 건물 안쪽 깊숙이 자리한다. 길 위를 걷는 동안에는 도시의 밀도가 높다고 느끼지만, 건물 안으로 들어가면 중정을 중심으로 여유로운 공간감이 펼쳐진다.

비슷한 표정을 지으며 나란히 선 건물들의 얼굴. 공통의 디자인 어휘 덕에 닮아 보이지만, 실제로는 조금씩 다르다. 마치 나란히 서서 화음을 맞추는 아카펠라 그룹 같다. 음악에서 반복 속에 변주를 주듯, 건물도 기본적인 형태나 재료를 공유하면서 디테일에서 각기 다른 특성을 드러낸다. Staccato로 음을 짧게 끊어 연주하듯, 건물의 모서리를 강조한다. Legato로 음과 음을 부드럽게 이어가듯, 서로 다른 건물이 자연스럽게 이어지도록 선을 맞춘다. Pianissimo에서 fortissimo까지 음의 강약을 조절하듯, 창문과 벽, 문과 차양을 통해 분위기를 디자인한다. 마치 하나의 오케스트라 같다. 서로의 소리에 귀 기울이며, 하모니를 이루는 앙상블을 만들어 가는 하나의 팀처럼.

시간이 흐르면 누군가는 사라지고, 또 다른 건물이 그 자리를 채운다. 그렇게 또 하나의 오케스트라가 탄생한다. 나란히 노래하는 벽들 앞에서, 서로 다른 박자와 음색으로 흘러나오는 아름다운 하모니를 바라본다.

Con moto, 도시에 생생한 리듬을 실어 나르며.



얼굴에 담긴 이야기

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왔다. 바깥 풍경을 바라보다가 창이 마치 ‘눈’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은 이 사각 프레임을 통해 잘라진 하나의 장면으로 우리 눈에 들어온다. 하지만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지 않는 한, 건물은 자신의 얼굴을 볼 수 없다. 동시에 서로를 볼 수 없기에, 서로에게 신비로운 존재일지도 모르겠다. 가끔은 안과 밖이 통하고, 가끔은 서로 다른 표정을 짓는다. 건물들의 얼굴을 내가 대신 바라보고, 그 안에 담긴 이야기들을 따라가 보았다.


슬로우 모션으로 재생되는 영화 속 장면처럼

천천히, 그들 모두의 얼굴을 스쳐 지나갔다.

닮은 듯하지만 조금씩 다른,

결국은 모두 다른 얼굴들.

언젠가 다시 스칠 그 날을 기대하며.

그럼, 이만 안녕.


이야기는 세상 곳곳을 떠다닌다.

문득, 순례길 위의 돌 탑이 떠올랐다.

사람들의 바람과 시간들이 겹겹이 쌓여 있는

그곳에 돌 하나와 함께 나의 시간을 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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