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귀리 Oct 16. 2023

건물의 얼굴들


나는 벽 속의 너를 보고 웃지 (^‿^)v _ BGM # Misty | Johnny Smith


내 얼굴이 어떤가요?

지금 어떤 표정을 짓고 있나요?

나는 나를 볼 수 없으니 당신에게 물어볼 수밖에.


방금 스쳐 지나간 건물들의 표정이 어떤지

고개를 돌려 눈을 마주쳐 보세요.

품고 있는 이야기를 술술 내뱉어주진 않을 거예요.

그러니 이야기는 우리가 풀어낼 수밖에.



삼청동. 늘 거닐던 거리. 익숙한 건물들. 천천히 주변을 배회하다가 걸음을 멈추고 건물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내가 생활하고 경험했던 공간과 어딘지 괴리감이 느껴진다. 거울을 통해 나와 마주할 때처럼 낯설면서도 친밀한 느낌이 조금 당황스러웠다.

왜 이런 이중적인 기분이 들까?

거울 앞에 서서 거울 속 나를 바라볼 때를 떠올려보았다. 그곳에 낯선 내가 있다. 하지만 분명 내가 틀림없다. 거울조차 내 모습을 왜곡시키는데 타인이 보는 나는 어떨까?

내가 보는 나와 타인이 보는 나 사이에 시선의 차이가 있는 것처럼 건물 안과 밖의 시점은 각자 다른 방향을 향해 있다. 그 이중적인 기분의 실체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이 있다. 서로에 대한 공통의 시선과 그 차이를 포함해 모든 모습들이 합쳐져 내가 되고, 하나의 건물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 얼굴을 관찰하다

카페테라스에 자리를 잡고 앉아 사람들의 얼굴을 관찰했다. 팬데믹 기간 동안 마스크에 가려져 있던 사람들의 얼굴이 마스크를 벗음과 동시에 표정과 생각이 그대로 드러나는 것이 어쩐지 묘했다. 아웃 사이더로 구석에 숨어있다가 정면으로 딱 걸린 것 같은 느낌이 들면서도 그 솔직하고 직설적인 감정 표현들이 흥미로웠다.

각자의 다름은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

사람들의 얼굴을 서로 비교해 가며 바라보다가 ‘어쩌면 이렇게 다르게 생겼을까?’ 감탄을 또 하게 된다. 얼굴형에서부터 헤어스타일, 이목구비까지 아주 조금씩 다르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완전히 다르게 보인다. 비례와 디테일의 미묘한 차이가 전혀 다른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표정은 얼굴의 인상을 좌우하는데 중요하다. 오늘 사람들의 표정은 한껏 여유롭다. 긴 연휴의 전날이기 때문이다. 휴일이 일단 시작되면 하루 이틀 지날수록 시간도 어쩐지 빨리 지나가고 아쉬움과 초조함이 뒤섞인 채 지내게 된다. 그래서 연휴 시작 전 날의 표정이 가장 즐겁게 느껴진다. 즐거움을 1부터 10단계로 나눠 표현해보라고 한다면 예측불허의 결과가 나올지도 모르겠다. 자신의 감정에 단계를 매겨본다니 이건 매우 주관적인 기준이기 때문이다. 벌써부터 점점 모호해진다. 입 꼬리가 올라가거나 크게 웃거나 눈가에 주름이 진다거나 목소리에 들뜸이 배어있다거나 하는 식의 표정과 감정에 대한 표현이 완벽히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다. 표정은 자연스레 나올 수도 있지만 만들어 낼 수도 있고, 어쩌면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사람일 수도 있다. 우리의 얼굴엔 참 복잡 미묘함이 배어있다. 그래서 늘 궁금하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건, 오늘 사람들은 대체로 즐겁고 표정 또한 모두 다르다는 것이다.

사람마다 얼굴에 묻어 나오는 고유의 분위기, 아우라도 빼놓을 수 없다. 삶에 대한 철학과 가치관이 얼굴에 자연스레 스며 나오기 때문이다. 깊게 파인 주름과 함께 지나온 삶에 대한 태도가 얼굴에  드러나 우리는 그 사람을 조금 알 것 같다.



# 건물이 상징하는 얼굴

장소를 옮겨 인사동의 작은 교차로에 서 있다. 한 바퀴 빙그르르 돌며 길을 둘러싼 건물의 얼굴들을 바라보았다. 인사동에 파는 물건만큼 다양한 얼굴을 한 건물들이 이곳을 찾는 사람들의 얼굴만큼 다채롭다. 어떤 모습인지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어떤 뉘앙스를 품고 있는지 우리의 얼굴과 다를 바가 없다. 구불구불 골목을 따라 거닐며 한식집과 주점들을 마주했다. 오래된 한옥 입면에 커다랗게 음식 사진과 메뉴가 나열되어 있었다.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어떤 음식을 먹을까 궁리하며 길을 천천히 걷는다. 그러니 목적에 부합하는 모습이라고 볼 수도 있다.


큰길로 발걸음을 향했다. 건물의 폭과 높이가 이미 몇 배로 커져있다. 모든 건물들의 얼굴에는 말하고자 하는, 상징하고 싶은 뭔가를 품고 있다. 이곳의 상가들은 자신을 홍보하고 싶다. 그래서 얼굴 앞에 간판을 내세운다. 출신 학교와 자격증, 전문가를 평가하는 대회에서 1등을 했다는 식의 문구들을 골라 건물 입면에 도배하다시피 하는 경우도 있다. 완성도가 높은 디자인이라 하더라도 상업 시설은 어느 순간 직설적인 방식으로 자신을 포장하고 주장을 하려 한다. 네온사인이 번쩍이고 간판으로 가득한 건물에서 준공 직후의 모습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게 된다. 씁쓸함, 허탈함이 몰려오곤 한다. 순수 예술이 아닌 이상 모든 디자이너의 숙명과도 같은 현실 자각 타임이 찾아오게 된다.


발길 닿는 대로 걷다 보니 어느새 헌법 재판소 앞에 도착했다. 고개를 들어 정면을 바라보았다. 그는 공정하고 위엄 있고 싶다. 그래서 비대칭보다는 대칭을 선호한다. 단단한 의지를 보이고 싶다. 입면 전체를 돌로 마감했다. 그로 인해서 공정하고 든든한 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그 앞에 서면 누군가의 양심이 좀 찔릴 수는 있겠다. ‘나는 헌법 재판소다’라는 주장을 펼치는 것 같은 느낌 때문에 나는 늘 법원뿐 아니라 관공서 설계와 거리를 두고 싶었다. 나의 성향과 프로젝트의 성격이 맞지 않고 충돌할 때가 종종 있다. 그 간극은 쉽게 채워지지 않아 프로젝트마다 즐거움의 정도가 달라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아…… 이렇게 법원과 상업시설의 예를 들고 나서보니 온통 나의 시선이 시니컬하구나. 되돌릴 수 없게 되기 전에 마음에 드는 얼굴을 떠올려보자.



# 다시 태어난 얼굴

생각났다. 파리 12구 집 앞에 있던 비아뒥 데자르(Viaduc des Arts)의 얼굴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바스티유와 뱅센느 지역을 잇는 4.5킬로미터의 철도가 이 건물의 시작이었다. 20년 가까이 버려진 채로 아무에게도 속하지 않던 폐허의 공간이 예술가들의 아뜰리에로 변모한 것이다. 비아뒥(Viaduc)은 고가도로를 의미하는데, 아치를 이용해 구조를 세워 그 위에 기차가 다니는 길을 만든 것이다. 그러니 처음엔 철로가 핵심이었고 그 아래를 받치고 있던 아치들은 텅 빈 공간이었을 뿐이었다. 철도 운행 체계를 대대적으로 바꾸고 난 뒤 이곳은 쓸모를 잃었던 것이다. 한 번 죽고 다시 태어나며 아치의 공간은 아뜰리에로 채워졌고, 철로는 공원으로 태어났다. 본래 갖고 있던 얼굴을 가리지 않고 자신이 지닌 구조와 공간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이전과 이후의 모습이 달라졌지만, 그는 어떤 면에서 달라지지 않았다.

나는 이렇게 다시 태어난 건물들의 얼굴에 눈길이 간다. 알함브라 궁전처럼 이슬람과 르네상스 또는 이슬람과 로마, 가톨릭이 섞인 남유럽의 건축들에서도 찾을 수 있는 얼굴이다. 역사는 파란만장하지만 남기고 간 흔적들은 시간 속에서 겹겹이 아름다움을 쌓아가고 있었다. 얼마나 많은 시간을 살아온 얼굴들인가…… 변화에 얼마나 유연한가…… 물론 건축이란 사람에 의해 디자인되고 만들어진 것이지만…...

보통 이런 류의 건물들은 기본 바탕이 바뀌기 전에도 이미 좋은 설계, 좋은 디자인인 경우가 많다. 그리고 다시 태어나는 과정에서 새로운 쓸모가 공간에 자리를 잘 잡았다는 공통점이 있다.



# 시간을 가로지르는 성스러운 얼굴

밀도 높은 빌딩 사이를 걷다가 시청 광장에 멈춰 섰다. 광장을 넘어 낮게 펼쳐진 서울 도시 건축 전시관 뒤로 대한 성공회 성당의 얼굴이 보인다. 6층짜리 국세청 별관이 철거되었을 당시 서울에서 일어난 도시적 사건 중 가장 놀라운 일이라 생각했다. 개발의 논리와 정치의 개입이 난무하는 서울에서 이런 일이 일어난다는 것이 놀라웠던 것이다. 건물이 사라지고 난 뒤 펼쳐진 풍경이 이토록 아름답다니. 늘 덧대고 새로 만들던 서울의 도시 풍경이 하나를 덜어내며 시청 광장 주변의 장소성은 좋은 방향으로 변모해 갔다.

성당의 종소리가 빈 광장을 울렸다. 경건함, 성스러움이 차올랐다. 횡단보도를 건너 서울 도시 건축 전시관의 지붕에 올라 성당의 측면을 바라보았다. 화강석과 붉은 벽돌로 이루어진 로마네스크 양식의 벽 위에 붉은 기와를 얹은 경사지붕이 이중으로 얹어져 있었다. 기본 양식은 서양에서 비롯되었지만 구석구석 디테일은 동양적이다. 이 시기의 건축들이 갖는 독특한 매력이다. 새로움을 받아들이되 우리 다움을 추구하는 정신이 깃들어 있다. 십자형 평면 중앙에 자리한 종탑에서는 종소리의 여운이 맴돌고 있는 듯하다. 그러고 보니 정오를 알리는 종소리였다. 어쩐지…… 시나몬 롤을 하나 손에 들고 탐험을 이어나갔다. 성당 주변은 유독 일제 강점기의 건물들이 많아 시간 탐험을 하는 기분이 든다. 성당을 오른편에 끼고 걸어가면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까지 피신해 갔던 ‘고종의 길’을 만나게 되는데 길을 따라가며 그 시절을 상상해 보았다. 역사는 멀리 있지 않고 우리 옆에, 발 밑에 고스란히 지금 여기에 함께 있다.



# 윙크하는 얼굴

모두 잠들어있는 새벽. 며칠 동안 봐두었던 벽 앞에 서서 미리 생각해 두었던 이미지를 떠올리고 있다. 시작이 중요하다. 달칵. 스프레이를 흔들어 선 하나를 대각선으로 긋는다. 치이이익. 칙. 달칵. 치이이익. 칙. 달칵. 코를 찌르는 자극적인 스프레이 냄새. 원래 그려져 있던 배경위에 그림을 덧씌운다. 벽 위아래를 가로지르는 전선과 설비, 지글지글 불규칙하게 벌어진 금을 보는 순간, 또 다른 아이디어가 떠올라 원래의 계획을 수정한다. 장소에 기반해 즉흥적으로 태어나는 그림이 그라피티니까. 누군가 스릴 넘치는 이 시간을 방해할까 두근거리며 그림을 완성한다. 인증 사진을 남기고  빠르게 정리한 뒤 자리를 뜬다. 첫 그라피티의 경험은 그를 다음과 다음으로 이끈다.


상상해 보았다. 벽 위에 그려진 그라피티를 그리는 마음이 어떤 걸까 궁금해서. 그리고 부러워서. 언젠가 해 보고 싶다.

사람들은 정말이지 이런 방식으로도 하고 싶은 말과 표현하고 싶은 바가 참 많다. 그럼으로써 감정과 생각을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고 싶은가 보다.

이젠 이 길이 무섭지 않아 _ BGM # City Lights | Joon Smith Trio


한강과 도시를 연결하는 토끼굴은 예전이라면 걷기 삭막하고 조금은 무서운 장소였겠지만 그라피티스트들은 기가 막히게 이런 장소들을 찾아 벽을 채워나갔다. 주민들과의 합의 끝에 접점을 찾아 이제 몰래 그리고 도망치듯 떠나는 경우는 없다.

을지로 4가의 상가들이 문을 닫고 셔터를 내리면 그때부터는 셔터 위에 그려진 갖가지 그라피티 그림들을 만날 수 있게 되었다.

공공예술에 가까워진 그라피티는 어느새 벽화와의 경계가 모호해졌다. 그 스릴감과 미스터리함이 어쩐지 아쉽고 그립다. 하지만 도시 속에 위트 있는 그림들이 늘어간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벽 속의 유명 정치인이 눈을 찡긋 윙크를 하고 있다. 자유를 상징하는 캐릭터가 무기를 들고 있다. 잔인한 장면이 오히려 우스꽝스러운 상황으로 아이러니하게 표현되어 있다. 유머 한 스푼에 시니컬함 한 스푼을 넣은 그라피티 속 그림들이 세계 곳곳에서 우리에게 위트를 날리고 있다.

가볍고 재미있는 단어들, 허무함과 비판적인 문장들, 평화와 자유를 추구하는 메시지들…… 문자들이 춤을 춰댄다. 글자의 획들이 직선에서 곡선으로 자유 의지를 가진 것처럼 꿈틀거린다.

답사를 다니던 중에 우연히 만났던 벽 속의 얼굴들이 종종 생각난다. 5명의 농구 선수가 벽 속에서 코믹한 포즈로 웃음을 전하고 있었다. 웃기고 말겠다 작정한 듯이. 나는 어느새 그들의 표정과 말에 빠져들어 입꼬리를 올리고 웃고 있었다.



# 집의 얼굴

상업적인 목적이나 공공을 대상으로 한 건물들이 광고와 상징에 초점을 맞췄다면, 주택은 좀 더 사적이고 다양한 얼굴을 하고 있다. 사람의 표정과 말투에서 다른 사람에 대한 태도를 볼 수 있듯이 집은 건축가와 집주인의 세상에 대한 태도를 볼 수 있다. 건축이란 디자인을 하는 자와 디자인을 의뢰하는 자 사이에서 만들어진다. 집주인의 삶에 대한 철학과 건축가의 집에 대한 철학이 집에 그대로 투영된다. 그렇게 하나하나 선택하고 그려가며 만들어낸 얼굴이 바로 집이다.

프라이버시와 개방감에 대한 기준에 따라 집은 열려있을 수도 닫혀있을 수도 있다. 내향적 또는 외향적인지 성격에 따를 수도 있고 다른 건 몰라도 집만큼은 방해받고 싶지 않다 생각해 결정할 수도 있다. 건축가가 건축주의 생각을 미리 짐작해서 결정하는 것은 안 좋은 결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개방감의 정도에 따라 마당의 위치와 건물의 배치가 결정되고 창문의 크기와 방향을 조절하게 된다. 외장재료의 선택에서 우리는 취향을 파악할 수 있게 되는데, 환경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나무와 흙과 같은 재료들을 선호한다. 하지만 모든 결정 속에는 비용의 문제가 끈끈히 연결되어 있기도 하다.

그렇게 복잡한 선택들을 마주하며 건축가와 건축주 사이의 줄은 이리저리 오고 가며 마지막 도면에 오케이 사인을 하게 된다. 그 타협의 과정과 결과가 집의 얼굴에 배어있는 것이다.



# 나란히 붙어있는 얼굴들

건물과 건물 사이에 이가 빠진 것처럼 비어있는 공간들이 눈에 들어올 때가 있다. 법적으로 규제된 공간이다. 최소한의 이격거리다. 보통 건물 사이의 공간은 실외기가 자리하거나 창이 있어도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 그 쓰임새가 애매모호해 공간의 실효성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지곤 한다. 그래서 건물들을 붙여 합벽 건축을 한다.

유럽의 도시들을 산책하다 보면 건물과 건물 사이가 떨어지지 않고 붙어있는 경우를 발견하게 될 때가 많다. 이것이 ‘합벽 건축’이다. 건물 사이의 비효율적인 공간은 사라지고 마당의 크기가 더 커질 수 있으니 장점이 많다. 건물들이 나란히 붙어있어 화재가 발생할 경우를 대비하기만 하면 합벽 건축은 여러모로 유리한 부분이 많다. 길에 바짝 면해있는 건물의 문을 열고 들어가면 입구 홀과 중정이 나온다. 비움은 건물 안 쪽에 자리 잡고 있다. 길을 걷는 동안에는 도시의 밀도가 높다고 생각하다가도 일단 건물 안으로 들어가면 중정을 중심으로 여유로움을 느끼게 된다.

나란히 붙어있는 건물의 얼굴들은 비슷한 표정을 짓고 있다. 공통의 디자인 어휘가 정해져 있을 때가 많기 때문이다. 나란히 서서 화음을 넣어가며 노래를 부르는 아카펠라 그룹 같다.




작업실에서 창을 통해 바깥 풍경을 바라보다가 창이 마치 ‘눈’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은 이 사각 프레임을 통해 잘라진 하나의 장면으로 우리 눈에 들어온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지 않는 한 건물의 얼굴들을 볼 수 없다. 동시에 서로를 볼 수 없기 때문에 서로에게 신비로운 걸지도 모르겠다.

옹기종기 모여있는 건물들의 얼굴을 보며 문득 ‘오케스트라’를 떠올렸다. 서로의 소리에 귀 기울여 앙상블을 만들어가는 하나의 팀처럼 느껴졌다.

지금 시점으로부터 100년 후, 건물의 얼굴들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100년 전의 건물을 마주하는 지금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변화가  찾아오겠지. 그럼에도 한 가지 확실한 건,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한 건물들의 얼굴도 앙상블을 이루며 또 다른 오케스트라를 만들 것이라는 사실이다.


슬로우 모션으로 재생되는

영화 속 장면처럼

천천히 그 얼굴들을 스쳐 지나갔다.

서로 닮았지만 조금씩 달라

결국은 다른 건물의 얼굴들이여.

그럼 이만 안녕!


이전 11화 소리가 페이스트리처럼 겹겹이 쌓여간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