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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 그리고 다시 피어나는 이야기

by 귀리


폐허에서 생명이 시작되는 것처럼

이 글은 끝이 예정되어 있지만,

다시 시작하는 이야기다.


사람이 한동안 거주하지 않아 생활감이 사라진 집에 가 본 적이 있다. 오래된 시골집에 하룻밤 묵어갈 예정이었다. 도시를 이동하던 중 잠시 머물 숙소를 찾다가 소개받은 곳이었다.

집 앞에 도착해 열쇠를 구멍에 넣고 돌리는데, 쉽게 맞물리지 않는다. 헐거워진 열쇠 구멍은 오랜 시간의 흔적이자 침묵의 증인이었다. 한참의 실랑이 끝에 '달칵' 소리가 나며 문이 열렸다. 먼지가 뽀얗게 쌓인 손잡이를 잡고 문을 열어젖혔다. 삐걱거리는 소리에 돌아보니, 문과 벽 사이의 경첩은 검게 굳은 기름 자국을 남긴 채 말라 있었다. 윤기와 수분이 사라진 지 오래된 것이다.

문 앞에 서서 집 안을 둘러보는데, 이 집에 쌓인 시간과 기억의 잔향이 조용히 전해져오는 듯했다.

문득 마쓰이에 마사시의 문장이 떠올랐다.

“건물의 기억은 그 안에 살았던 사람들의 삶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들이 떠나고 나면 건물은 침묵 속에서 자신만의 시간을 살아간다.”_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

사람들의 웃음 소리, 창문으로 들이쳤던 바람과 계절의 냄새, 그리고 비어있던 집의 말 없는 시간들.

그 모든 기억과 시간 위로 나는 첫 발을 내디뎠다.

바닥의 먼지가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선명한 발자국이 남았다. 창과 문을 단단히 닫아두었음에도 가구와 바닥에는 먼지가 두껍게 내려앉아 있었다. 소파 위를 덮고 있던 천을 걷고 그 위에 앉았다. 잠시 숨을 돌리며 가만히 공간을 느꼈다. 적막함이 공간 깊숙이 스며 있었다. 왠지 큰소리를 내면 안 될 것 같았다. 그 적막을 깨는 몸짓조차 유보하고 싶은 마음. 햇살 속 먼지들은 허공을 떠도는 별처럼 부유하고 있었다.

창문을 열자 케케묵은 공기가 쏟아져 나갔다. 밀폐 용기 속 공기가 '퐁'하고 터져 나오듯, 갇혀 있던 공기의 압력이 낯설게 느껴졌다. 더운 공기와 시원한 공기가 뒤섞이자, 이제 집 안은 적막이 깨어진 변화의 공간이 되었다.


정신을 차리고 집 전체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생활 용품들이 정리된 공간은 텅 빈 듯 보였고, 왠지 을씨년스러웠다. 사람의 부재는 그런 식으로 공간 곳곳에 스며든다.

주방으로 향했다. 텅 빈 냉장고. 말라비틀어진 싱크대. 찬장을 열어보니 오래된 가공식품들이 남아 있었다. 냉장고 전원을 연결하고 사 온 식재료들을 넣었다. 냉장고 모터 소리가 적막한 공간에 생활감을 되돌리고 있었다. 수도꼭지를 틀자, 잠시의 공백 끝에 쏴아아... 물줄기가 압력을 동반하며 터져 나왔다. 마치 시간을 밀어내는 제스처처럼. 컵과 접시를 닦고, 주방을 정리했다.


집 안 곳곳의 먼지를 털어낸 뒤, 커피 한 잔을 들고 정원으로 나갔다. 잘 가꾼 정원이 아닌, 야생의 정원이었다. 바람에 날려온 씨앗들이 이곳저곳에 이름 모를 풀과 꽃을 피우고 있었다. 정원 끝, 오래된 등나무는 연보라색 꽃을 주렁주렁 매단 채 이곳의 터줏대감처럼 자리하고 있었다. 달달한 향이 정원 전체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먼지가 빠져나가기를 기다렸다가 다시 집 안으로 들어와 요리를 시작했다. 인덕션 위에서 물을 끓이고, 파스타 면을 삶았다. 채소를 볶고, 토마토소스를 넣었다. 파스타 위에 소스를 부은 뒤, 접시에 담아내자 비로소 집이 ‘집다워졌다’는 안도감이 들었다. 긴 부재는 잠시 멈추고, 집 안에는 소리와 냄새가 한 겹 입혀졌다. 무색무취의 공간에 색, 온기, 사람이 채워졌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은 이 순간을 기억하게 만들고 있었다. 즐거운 저녁이 막 시작되고 있었다.


빛바랜 듯 붉은 듯 _ BGM # Bach: Goldberg Variations, BWV 988 - Aria | Víkingur Ólafsson


오래된 동시에 새로운

유적을 탐험하다 보면 폐허와 자주 마주친다. 건물 잔해 사이로 비집고 올라온 이름 모를 풀을 바라보다가, ‘오래된 동시에 새로운’이라는 문장이 입안에서 맴돌았다. 끝과 시작은 언제나 동시에 일어난다. 그것은 한순간에 벌어지는 것이 아니라, 아주 천천히 이루어진다.

폐허의 장소를 거닐며 시간의 겹, 속도, 중첩 속에서 빛을 본다. 아주 오래전 과거로부터 지금 이 순간을 거쳐 미래의 어느 날까지 이어질 반짝이는 빛을.

오래된 동시에 새로운… 문득 희망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_ BGM # Jean-Philippe Rameau: Les tendres plaintes | Víkingur Ólafsson

로마제국과 마야 문명, 고구려, 선사시대의 아직 발굴되지 않은 유적들이

조용히 숨죽인 채 역사의 증언자가 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아니 어쩌면, 유적들은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데,

우리가 그것을 증명하고 싶어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주 먼 과거에 감동하고 싶은 마음.

아주 먼 미래를 희망하고 싶은 마음.

미지의 것에 대한 동경.

시간이 깃든 것들에 자꾸만 집중하게 된다.



폐허지만 폐허가 아닌 풍경

한때 철거 직전의 집에 들어가 본 적이 있다. 사람이 살지 않더라도 동물이나 식물이 침범할 여지를 막으면 집은 쉽게 폐허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하나라도 구멍이 생기면, 폐허는 시간문제다. 유리가 깨지고, 문이 부서지고, 지붕의 틈으로 빛이 쏟아진다.

몇 발자국 더 들어서자, 뜻밖의 장면이 펼쳐졌다. 사실상 폐허였지만, 그것은 폐허의 풍경이 아니었다. 그곳에서 가장 마지막에 생명이 태어나고 있었다. 마치 백발 노인의 머리에 검은 머리카락 한 줄이 자라나는 것처럼.

폐허의 징후가 시작되자마자 생명은 틈을 비집고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식물은 최소한의 가능성만 있으면 어떤 자리든 마다하지 않고 정착하고, 성장에 힘을 다한다. 그들이 자리를 차지하게 되면 장소는 온전히 그들의 세상으로 바뀐다. 그곳은 폐허가 아니라, 야생의 거친 생명력으로 가득한 곳이었다. 오래된 먼지 냄새를 덮을 만큼, 쌉싸름하고 매콤한 풀 냄새가 공간을 채우고 있었다.


텅 빈 폐허의 공간을 떠올렸다.

그곳에 벽을 세웠다.

올리브 그린 색 페인트로 벽을 칠했다.

다음날, 그 벽에 기대어 건너편을 바라보았다.

바다가 있었다.

그곳에 문을 만들었다.

손잡이를 돌리고 문을 열어 맨발로 걸어 나갔다.

포치 위에 서서 넓게 펼쳐진 바다를 파노라마처럼 휘이익 바라보았다.

계단을 내려가 모래사장에 발을 디뎠다.

모래 입자들이 발가락 사이로 스며들었고,

방금 도착한 밀물과 마주쳤다.


눈을 감았다.

텅 빈 집을 떠올렸다.

한때 활활 타올랐을 벽난로.

머릿속에서 장작을 쌓고 불을 지폈다.

추운 겨울, 그곳에 앉아 따뜻한 코코아로 온기를 채웠을 누군가.

커피를 손에 들고 소파에 기대어 앉았다.

선물을 하나씩 풀어보는 설렘이 그을음 속에 남아 있지 않을까.

벽난로 옆에 크리스마스 리스를 장식하고 양말을 걸어두었다.



오프닝은 폐허, 엔딩은 시작

가로등이 백열등에서 LED로 바뀌는 동안,

도시의 밤은 점점 밝아졌고, 노란빛에서 하얀빛으로 바뀌었다.

밝음의 찬란함에 취한다.

하지만 그 뒷면에 자리한 어둠 또한 깨닫는다.

시간이 흐르는 동안 어떤 장소들은 빛과 온기의 흔적들이 지워져갔다.

세상의 모든 곳에서 삶과 죽음이 오고간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은 언젠가 소멸과 죽음에 이른다.

하지만 모든 것이 무너져도, 아주 작은 세포 하나가 남아 생명을 이어간다.

어쩌면 ‘완성’도, ‘끝’도 존재하지 않는지도 모른다.


영원한 끝은 없다.

모든 게 부서지고 무너져 내리고

바스러지고 흩어지고 난 뒤,

그 위에 피어난 한 송이 꽃.

그래서 더 아름답다.

지나간 시간은

앞서간 자들의 것이자 우리의 시간이며,

앞으로 남은 시간은

우리의 시간이자 우리 다음 세대의 것이기도 하다.

오프닝 곡은 폐허에 관한 음악이었지만,

엔딩 곡은 시작을 의미하는 음악으로 마무리한다.


낡음. 하지만 시간의 흔적이 아름다웠다 _ BGM # Philip Glass: Glassworks - Opening | Víkingur Ólafsson



책장을 덮기 전, 문득 나의 탐험의 과정을 되새겨보았다.

내 몫으로 남겨진 수수께끼들이, 실은 나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던 건 아닐까. 오래전 내 안에 심어두었던 씨앗들이 땅속에 잠들어 있다가, 긴 시간이 흐른 뒤 마침내 싹을 틔운 것일지도 모른다.

그저 보이는 조각 하나, 둘...

그것들이 세상 밖으로 나온 순간, 탐구 본능이 작동하기 시작했다.

잠시 멈춰, 장소 위에 떠도는 이야기의 조각들을 바라보다가 밖으로 나가 길 위를 산책했다.

그리고 그 조각들이 얼마나 빛나는지,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느끼며, 오늘의 탐험을 기록했다.

시간이 지난 뒤 다시 그 장소들을 찾아갔을 때, 탐험했던 장소들 위로 또 다른 조각들이 떠올랐다.

나의 탐험이 계속 겹쳐지고 있었다.

또 다른 감각이, 또 다른 기억이, 그 위에 덧입혀지고 있었다.

장소는 지워지는 것이 아니라, 덧입혀진다. 지나간 마음과 다가올 상상이 겹쳐진 채로.

장소는 여백으로 돌아가고, 이야기는 새로 쓰여진다.

나는 지금, 바로 이곳. 종이 위를 걷고 있다.

글로 채워진 뒤를 돌아보다가, 여백으로 비워진 앞을 바라본다.

그리고 다시, 낯선 곳을 향해 걸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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