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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귀리 Oct 21. 2023

끝 그리고 다시 피어나는 이야기


폐허에서 생명이 시작되는 것처럼

이 글은 끝이 예정되어 있지만

다시 시작하는 이야기다.


사람이 한동안 거주하지 않아 생활감이 느껴지지 않는 집에 가 본 적이 있다. 오래된 시골집에 하루 묵었다 갈 참이었다. 도시를 이동하던 중 잠시 머물다 갈 숙소를 찾다가 소개를 받은 것이다.

집 앞에 도착해 열쇠를 구멍에 넣고 돌리는데 잘 맞춰지지 않는다. 헐거워진 구멍이 오랜 시간의 증인이나 다름없다. 실랑이 끝에 달칵 소리를 내며 문이 열렸고, 먼지가 뽀얗게 앉은 손잡이를 잡아 문을 열어젖혔다. 삐걱 소리에 돌아보니 문과 벽 사이 경첩이 검게 변한 기름의 흔적을 남긴 채 말라있다. 윤기와 수분이 사라진 지 오래다.

첫 발을 내딛는데 먼지가 바닥에서 튀어 올랐고, 내디딜 때마다 발자국이 선명하게 남았다. 창문을 열어 케케묵은 공기를 내보냈다. 갇혀있던 공기가 일시에 쏟아져 나온 터라 왠지 모를 압력이 느껴졌다.

창과 문을 꽉꽉 닫아놓았음에도 가구와 바닥에 먼지가 두껍게 가라앉아 있다. 소파 위를 가려 놓았던 덧씌우개를 걷어내고 그 위에 앉아 숨을 돌렸다. 적막함이 공간에 배어있어 왠지 큰소리를 내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이다. 햇빛에 먼지들이 떠돌이별처럼 허공을 떠다니고 있었다.

잡다한 생활 용품들이 없는 정리된 공간은 텅 비어 보였고 왠지 을씨년스러웠다. 사람의 부재는 여러 곳에서 드러나는 법이다.

주방으로 향했다. 텅 빈 냉장고. 말라비틀어진 싱크대. 찬장을 열어보니 오래된 가공식품들이 남아있었다. 냉장고에 전원을 연결하고 장 봐온 식재료들을 넣었다. 적막한 공간 속에 드디어 냉장고 모터 돌아가는 소리가 생활감을 되돌리고 있었다. 싱크대 앞에 서서 수도꼭지를 돌렸다. 물이 수도관을 타고 오는 잠깐의 공백…… 물이 갑자기 쏴아아 하고 압력을 동반하며 쏟아져 내렸다. 마치 시간을 밀어내는 듯한 제스처로. 컵과 접시를 닦고 주방을 정리했다.

집안 곳곳에 쌓인 먼지를 털어내고 커피 한 잔과 함께 정원으로 나왔다. 잘 가꾼 정원이 아닌 야생의 정원이었다. 바람에 날려온 씨앗들이 곳곳에 이름 모를 풀과 꽃을 피우고 있다. 정원 끝에 오래된 등나무가 연 보라색 꽃을 주렁주렁 매달고 있다. 사람이 부재한 가운데 정원을 마지막까지 지키고 있는 이곳의 터줏대감일 게 분명하다. 달달한 향이 정원 전체를 장악하고도 남았다.

먼지가 빠져나가기를 기다렸다가 집 안으로 들어가 요리를 시작했다. 인덕션 위에 물을 끓여 파스타면을 삶고 채소들을 프라이팬에서 볶다가 토마토소스를 넣었다. 접시 위에 음식을 플레이팅 하는데 이제야 집이 집 다워졌다는 안심이 들었다. 긴 부재를 잠시 종료하고 집에 소리와 냄새가 한 겹 입혀진 것이다. 무색무취의 공간에 소리와 색과 냄새와 사람이 채워졌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이 벌써부터 이 시간을 기억할 때 생각날 것 같다. 즐거운 저녁 시간이 막 시작되고 있었다.


빛바랜 듯 붉은 듯 _ BGM # Bach: Goldberg Variations, BWV 988 - Aria | Víkingur Ólafsson



# 오래된 동시에 새로운

유적들을 탐험하다 보면 폐허의 장소와 자주 마주치게 된다. 전체적으로 복원한 유적도 있지만 폐허 상태를 그대로 둔 채 유적을 복원한 경우도 있다. 건물의 잔해 사이를 비집고 올라온 이름 모를 풀을 바라보며 ‘오래된 동시에 새로운’이라는 문장이 입 안을 맴돌았다. 끝과 시작은 늘 동시에 이루어지고 있었고, 한꺼번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아주 천천히 이루어졌다. 나는 시간의 겹, 속도, 중첩, 이 모든 것에서 빛을 본다. 아주 오래전 과거에서부터 지금 이 순간을 거쳐 미래의 어느 날까지 이어질 반짝이는 빛을.

오래된 동시에 새로운… 문득 희망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_ BGM # Jean-Philippe Rameau: Les tendres plaintes | Víkingur Ólafsson

아직도 발굴되지 않은 유적들이 조용히 숨죽인 채 로마제국을, 마야 문명을, 고구려를, 선사시대를 증명하기를 기다리고 있다. 아니 어쩌면, 아무것도 기대하지도 않는 그 유적들을 사람들이 증명하고 싶을 뿐인지도 모르겠다. 우리의 아주 먼 과거의 삶에 감동하고자 하는 마음일지도 모르겠다. 또 아주 먼 미래의 삶을 희망하고자 하는 마음일지도. 미지의 것에 대한 동경이 시간이 깃든 것들에 집중하게 한다.



# 폐허지만 폐허가 아닌 풍경

언젠가 철거되기 전의 집에 들어가 본 적이 있다. 사람이 살지 않는 집이라도 동물이나 식물이 침범할 여지가 없다면 집은 쉽게 폐허가 되지 않는다. 유리가 깨졌거나 문이 부서졌다거나 비가 샌다거나 이 중 어느 하나라도 구멍이 나게 되면 폐허는 시간문제다.

창과 문이 부서지고 지붕의 일부가 내려앉아 훤히 드러난 하늘에서 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몇 발자국 더 들어가니 의외의 장면이 펼쳐졌다.

사실상 폐허였지만 폐허의 풍경이 아니었다. 가장 마지막에 생명이 태어나고 있었다. 마치 백발노인의 머리에 검은 머리카락이 나는 것처럼.

폐허의 징후가 시작되었을 무렵부터 생명은 틈을 뚫고 나오기 시작했던 것이다. 식물은 최소한의 가능성만 있다면 어떤 자리도 마다하지 않고 정착을 시작하고 성장에 힘을 다한다. 그들이 한번 자리를 차지하게 되면 장소는 그들 세상으로 변한다. 폐허의 장소라기보다는 오히려 야생의 거친 생명력이 가득했다. 오래 묵은 먼지 냄새를 뒤덮을 정도의 쌉쌀하고 매콤한 풀 냄새가 진동했다.



텅 빈 폐허의 공간을 떠올렸다.

그곳에 벽을 세웠다.

올리브 그린 색 페인트로 벽을 칠하고  

다음날 그곳에 기대어 서서 건너편 벽을 바라보았다.

바다를 향하고 있었다.

그곳에 문을 만들었다.

손잡이를 돌려 문을 열고 맨발로 걸어 나갔다.

포치 위에 서서 넓게 펼쳐진 바다를 파노라마를 보듯 훑었다.

계단을 내려와 모래사장에 발을 디뎠다.

모래 입자들이 발가락 사이로 파고들었고

방금 도착한 밀물과 마주쳤다.


눈을 감았다.

텅 빈 집을 떠올렸다.

언젠가 활활 타올랐을 벽난로.

머릿속에서 장작을 쌓아 불을 지폈다.

추운 겨울 그곳에 앉아 따뜻한 코코아로 온기를 채웠을 누군가.

따뜻한 커피를 손에 들고 소파에 기대어 앉았다.

선물을 하나씩 풀어보는 설렘이 그을림 속에 남아있지 않을까?

벽난로 옆에 크리스마스 리스를 장식하고 양말을 걸어두었다.



# 오프닝은 폐허, 엔딩은 시작

가로등이 백열등에서 나트륨 등을 거쳐 LED등으로 바뀌는 동안, 도시의 밤은 점점 밝아졌고 노란빛에서 하얀빛으로 바뀌었다. 시간이 흐르는 동안 창문 뒤로 불 빛이 하나둘씩 꺼져갔다.

살아있는 것은 언젠가 소멸과 죽음에 이른다.

하지만 모든 게 멸망해도 아주 작은 세포라도 살아남아 생명을 이어간다. 완성이란, 끝이란 존재하지 않는지도 모른다.


영원한 끝은 없다.

모든 게 부서지고 무너져 내리고

바스러지고 흩어지고 난 뒤 피어난 꽃.

그래서 더 아름답다.

지나간 시간은 앞서간 자들의 시간인 동시에

우리의 시간이기도 하다.

앞으로 남은 시간은 우리의 시간인 동시에

우리 다음 세대의 시간이기도 하다.

오프닝 곡은 폐허에 관한 음악이었지만

엔딩 곡은 시작을 의미하는 음악으로 마무리한다.


낡음. 하지만 시간의 흔적이 아름다웠다 _ BGM # Philip Glass: Glassworks - Opening | Víkingur Ólafsson



문득 궁금했다. 내 몫으로 남아있던 수수께끼들이 나를 향해 오고 있었던 걸까, 하는. 어딘가에 있다가 갑자기 나타난 것은 분명하다. 잠재되어 있던 수수께끼들이 세상 밖으로 나온 순간, 나의 탐구 본능이 작동했다. 생각을 언어화하고 시각화, 감각화하는 순간, 모든 가치는 그 사람에게 속하게 된다.

잠시 멈춰 서서 주위를 한 바퀴 둘러보며 나를 향해 다가오는 이야기의 조각들을 건져 올렸다. 산책하듯 도시를 거닐며 장소 위에 표표히 떠다니는 이야기들을 건져 올렸다. 그리고 그것들이 얼마나 빛나는지, 아름다운지 찾아 오늘의 탐험을 기록했다.

생각해 보면 아주 오래전에 내 안에 심어놓았던 씨앗들이 땅 속에 잠들어 있다가 긴 시간 끝에 싹을 틔운 것일지도 모르겠다. 보이는 곳에 있던 조각 하나를 새롭게 자각했을 뿐인데, 그것들이 통째로 나의 세계로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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