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과 바다, 땅속 깊이 묻혀 있던
재료 이전의 재료들.
조금씩 파헤쳐져
도시와 건축, 일상을 위한 재료들로 태어났다.
그에 따라 지구의 몸은 점점 줄어들었고,
그만큼 도시와 빌딩은 커져 갔다.
그 모든 것은 지구의 일부를 떼어내어
만들어진 결과다.
때로는 연료가 되고, 유리가 되었다.
때로는 기둥이 되고, 문이 되었다.
때로는 식탁이 되고, 의자가 되었다.
때로는 음식이 되고, 와인이 되었다.
긴긴 세월과 이야기를 품은
돌과 나무를 바라본다.
그 깊은 흐름을 생각하며 아주 먼 세월로 거슬러, 수렵과 채집 시대로 돌아가 보자. 자원에 대한 인식이 생기고, 우리는 그것들을 분석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먹을 수 있는 것과 없는 것, 맛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 에너지를 주는 것과 아닌 것, 유용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하나하나 구분해 나갔을 것이다. 그 뒤로 오랜 세월이 지나며, 우리는 도구를 통해 발굴과 가공의 능력을 갖추었고, 기술의 발전을 통해 도시와 일상은 비약적으로 변해 왔다.
재료가 되기까지의 시간, 그들의 삶이 궁금했다. 바닥에 깔린 화강석을 보며 문득, “어디에서 온 돌일까?” 식탁 위 커다란 원목을 보며 “어떤 숲에서 자라던 나무일까?” 집을 한 바퀴만 돌아보아도 각자의 산지는 모두 다르다. 멀리서 돌고 돌고 돌아, 여러 손을 거쳐 이곳으로 모여든 존재들. 문득 이런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만약 모든 사물에 그것이 지나온 역사가 기록되어 있다면, 우리는 좀 더 특별한 마음으로 사물을 대하지 않을까? 나는 그 사물에 더 많은 애정을 갖고, 아끼게 될 것 같다. 예를 들어, 거실에 놓인 커다란 원목 테이블에 이렇게 적혀 있다면,
나이 50세의 블랙 월넛.
북미 아이오와 근방 숲에서 자람.
2012년 4월 벌목.
해상 컨테이너와 트럭 운반.
3년 건조.
00 제재소에서 재단.
00목공방에서 샌딩, 천연오일마감.
이런 기록을 읽는다면, 매일 손으로 쓰다듬고 오일을 먹이며, 흠집이 나면 다듬어 오래도록 함께할 것 같다.
재료들이 우리에게 오기까지의 세월과 거리, 그들이 지나온 역사를 가늠해 보고 싶어 그 길을 거슬러 올라가 본다.
오래된 물건을 만질 때면, 그 안에 숨어 있는 결이 손끝으로 전해질 때가 있다. 바위에 스며든 결, 나뭇결 사이에 고인 세월, 바다에서 길어올린 짠내 속 이야기들. 문득 궁금해졌다. 우리가 매일 쓰는 재료들. 돌과 나무와 바람 속에는 어떤 시간이 숨어 있을까?
먼저 광산으로 가보자. 암석이 묻힌 위치에 따라 광산의 모습은 제각각이다. 계단식으로 파낸 광산, 지하로 깊이 내려가는 갱도. 돌이 태어난 장소와 환경에서부터 이미 '다름'은 시작된다. 떠오르는 돌의 이름을 하나씩 불러본다. 석탄, 다이아몬드, 철광석, 금, 은, 구리, 화강암, 현무암, 대리석. 이들은 각각 어떤 역사를 품고 있을까?
마그마가 식어 굳으면 화강암과 현무암이 된다. 퇴적물이 쌓이고 굳으면 석회암과 사암이 되고, 이들이 다시 열과 압력을 받으면 대리암과 편마암으로 변한다. 흐름과 힘, 흔적은 돌의 무늬와 결 속에 남는다. 돌은 그 특성에 따라 쓰임이 달라진다. 석탄은 퇴적된 나뭇잎이 열과 압력을 받아 생긴 것으로, 한때는 인류의 주된 연료였다. 다이아몬드는 단단한 아름다움으로 부의 상징이 되었고, 구리는 열과 전기를 잘 전달해 산업 전반에 쓰인다. 철광석은 정제되어 자동차와 가전, 건축의 뼈대가 된다. 또 다른 실험도 이어졌다. 유리는 석영에서, 알루미늄은 장석에서 추출된다. 암석의 장점을 뽑아낸 끝없는 시도들. 그렇게 만들어진 재료들로 이루어진 '재료의 패치워크'는 말 그대로 다채롭고, 그 자체로 하나의 풍경이다.
석회암 동굴에 갔던 어느 여름이 떠오른다. 동굴 안으로 들어서자 서늘한 공기가 피부를 타고 스며들었다. 물방울이 천장에서 떨어져 작은 고드름처럼 석순을 만들고, 오랜 시간 그 위에 다시 물이 쌓여 석주가 되었다. 손으로 닿을 수 없는 시간의 건축. 그 적막한 동굴에서 나는 ‘지구가 자라는 장면’을 목격한 듯했다. 한 줌의 석순이 수백 년 동안 자라나는 속도. 너무 느려서 보이지 않지만, 분명 자라고 있다는 사실. 그렇게 생각하니, 바닥의 돌 하나, 벽의 무늬 하나도 다시 보였다. 마치 시간이 결을 따라 눕고, 굳어지고, 다시 태어난 것처럼.
이제 시선을 숲으로 옮겨본다. 자작나무, 소나무, 참나무, 밤나무. 뿌리를 함께 내린 숲 안에서도 각 나무는 저마다의 결을 지닌다. 밀도와 단단함, 자란 기후와 시간에 따라 결이 달라지고, 쓰임새도 달라진다. 나무는 기둥이 되고, 종이와 가구가 된다. 잎과 열매는 식재료가 되고, 껍질은 약재가 되기도 한다.
바다에는 해초와 어류, 갑각류들이 있다. 바다는 유연한 자원의 집합체다. 인간의 눈엔 '잠재적 식재료'로 비치기도 한다. 허공을 올려다보면 바람과 태양이 있다. 바람은 전기를 만들고, 태양은 열과 빛을 준다. 암석이나 바다 자원과 달리, 이들은 고갈되지 않는다. 지속가능하고, 무엇보다 충분하다.
우리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깊은 세월 동안 자원은 그렇게 만들어져 왔다. 화산의 폭발, 대륙의 융기와 침하, 퇴적과 풍화, 빙하기와 간빙기의 반복. 지구는 자신만의 시간으로 천천히, 그리고 집요하게 무언가를 만들고 있었다. 지금 우리가 보고, 쓰고, 만지는 것들은 그 오랜 시간 끝에 우리 앞에 도달한 결과물이다.
그런 시간의 축적이 가장 잘 드러나는 장소 중 하나가 이탈리아의 카라라다. 하얀 대리석이 땅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그곳은, 고대 로마의 기둥부터 미켈란젤로의 다비드 상, 현대의 기념비까지 수많은 조각들이 태어난 장소다. 단단함 속에 숨겨진 빛과 결, 오랜 시간 품어낸 미의 기준은 여전히 유효하다.
어릴 적, 아버지가 직접 깎은 수석 받침을 아직도 간직하고 있다. 돌의 모양에 맞춰 조심스럽게 만든 그 받침은, 손으로 매만지면 나뭇결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시간이 지나며 조금씩 어두워지고 윤이 배었다. 그 안엔 나무의 세월과 아버지의 시간이 함께 스며 있다. 사람의 생애를 초월한 시간이다.
돌과 나무가 담은 오랜 역사와 나이를 가늠해 본다. 화강암 10억 년, 현무암 1,000년, 다이아몬드 10억 년, 은행나무 600년, 소나무 400년. 범접할 수 없는 시간과 역사. 탄생과 변형, 수많은 갈림길 끝에 마침내 우리 앞에 놓인 돌과 나무 앞에서, 어느새 마음이 조용히 숙여진다. 그것은 경외심이기도 하고, 조금은 부끄러운 감정이기도 하다. 우리가 쓰는 모든 재료에는 ‘시간’이 깃들어 있다는 것을, 자원을 마주할 때마다 조용히 떠올리게 된다.
돌과 나무, 그리고 광물들이 긴 흐름을 따라 우리 삶에 스며들듯, 우리가 매일 먹는 식재료도 땅과 자연의 품에서 자라난 ‘시간의 재료’다. 먹는다는 것은 단순히 생명을 유지하는 행위를 넘어, 재료가 품은 세월과 삶을 마주하는 일이다. 우리는 음식 재료 하나하나에 깃든 자연과 시간, 그리고 그 속에서 살아온 생명들의 이야기를 함께 먹는다. 좋은 땅에서 자라고, 계절을 거치고, 손길을 거쳐 우리 식탁 위에 오른 재료들은 그 자체로 삶의 흔적이자 기억이다. 와인이 떼루아(terroir)에 따라 맛과 향을 달리하듯, 재료마다 지닌 이야기는 각각의 풍미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그렇게 음식은 단순한 영양 공급원이 아니라, 시간을 담은 또 다른 ‘재료의 삶’이다. 그 삶을 존중하며 먹는다는 것은 곧 자연과 시간을 함께 음미하는 행위다.
어릴 적, 학교가 끝나면 친구들과 시멘트 공장 옆을 맴돌며 놀았다. 공장에서 흘러나온 분필 조각들을 주워 콘크리트 바닥에 그림을 그렸다. 집을 그리고, 나무를 그리고, 서로의 이름을 쓰며 해질 녘까지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그때는 알지 못했다. 그 분필이 어디에서 왔는지, 무엇으로 만들어졌는지. 그저 하얀가루로 노는 게 즐거울 뿐이었다. 하지만 해마다 공장 뒤 산이 조금씩 깎여 나갔다. 풍경은 해가 바뀔수록 조금씩 달라졌으며, 우리는 그저 말없이 바라보았다. 조금씩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해, 어린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아니, 아무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눈에 보이는 풍경만 보면, 지구엔 자원이 넘쳐나는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우리는 있는 자원을 탈탈 털어 쓰고, 고갈될 때까지 소비한 뒤, 또 다른 대체 자원을 찾아 지구의 다른 조각을 갉아먹고 있는 건 아닐까. 만약 그로 인해 누군가가 손해를 보고 있다면, 우리는 책임을 묻고 따져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구’라는 행성은 말없이 침묵한다. 누군가 간절히 외쳐도, 그 소리는 바람결에 흩어지고, 마치 우리 귀를 지나치지 않으려는 듯 고요하다.
지구를 이루는 모든 것을 '잠재적 자원'이라 규정하고, 쓸모가 입증된 천연자원을 마음대로 사용하는 발상은, 어딘가 너무 당연한 듯 뻔뻔하게 느껴진다. 그래서 사용에 대한 규제는 필연적이다. 땅속에 잠든 재료들을 보유하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부를 축적하는 일 역시, 지구 전체의 시선으로 보면 매우 불공평하다. ‘이 땅은 내 것이니 내 마음대로 해도 된다’는 생각. 그 생각은 국경이라는 경계 속에서 자라났고, 전쟁을 통해 땅을 넓히며 지구 전체에 대한 고민을 미뤄온 인간의 오래된 습관에서 비롯된 건 아닐까. 긴긴 세월 동안, 지구의 변화를 묵묵히 지켜본 존재가 있다면, 우리를 향해 한숨을 내쉴까? 아니면 인간이라는 종의 문명을 찰나처럼 스쳐가는 좌충우돌의 이야기쯤으로 바라볼까. 이런 생각을 하다 보면, 어딘가 마음 한 켠이 서늘해진다. 나의 직업과 생각이 어딘가에서 부딪치고 있기 때문이다. 건축은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일이다. 땅을 개발하고, 그를 위해 재료를 쓰고, 에너지를 소비한다. 하지만 내 마음은 자주 개발의 반대편으로 기울어진다. 기술이나 도시보다, 오래된 것, 되풀이되는 것, 낡았지만 근원적인 것에 더 끌린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저, 마음이 이쪽저쪽 흔들리다가도 결국엔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리라 믿는다.
자원이 태어난 장소와 역사만큼, 그 특성 또한 고유하다. 우리는 이 고유한 특성을 이해하고 활용해 다양한 재료를 만들어낸다. 건축 재료들 가운데는 특정한 기능을 위해 조합된 것들이 있다. 단열, 방수, 방습 같은 기능성 재료들은 집을 따뜻하고 안락하게 유지하는 데 꼭 필요하다. 예를 들어, 공기층을 형성해 단열 효과를 높이는 스티로폼 같은 단열재나 열전도를 줄이기 위한 특수 재료들이 있다. 나무와 흙은 자연스럽게 습도를 조절해 준다. 한지는 미세한 공기 구멍을 품고 있어, 습도에 따라 팽팽해졌다가 느슨해지기를 반복하며 한옥 안의 쾌적한 환경을 유지해 준다.
어릴 적 시골에서 묵었던 흙집은 여름에도 덥지 않았고, 겨울에도 이상하리만큼 훈훈했다. 창밖에는 눈이 쌓이고 바람이 매서웠지만, 방 안 공기는 따뜻하고 촉촉했다. 지금 생각하면, 흙이 가진 단열성과 습도 조절 능력이 자연스럽게 작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땐 몰랐지만, 몸이 먼저 느끼고 기억한 재료의 성질이었다.
기술의 관점에서 건축을 들여다보면, 철근 콘크리트 구조와 철골 구조의 등장은 하나의 전환점이었다. 이 구조들이 등장하면서 철, 모래, 자갈, 시멘트 같은 자원의 채굴이 눈에 띄게 활발해졌다. 동시에, 구조적 한계를 보완하기 위한 새로운 기술들도 함께 개발되었다. 이 시기를 지나며 아파트, 근린생활시설, 오피스, 고층 빌딩들이 도시 위로 쏟아지듯 솟아올랐다. 엘리베이터 브레이크 기술의 발전은 우리가 고층을 자유롭게 오갈 수 있게 했고, 그로 인해 초고층 건축의 시대가 열렸다.
처음 초고층 빌딩을 올려다봤을 때의 감각이 지금도 선명하다. 파리 라데팡스의 빌딩 숲을 바라보며, ‘무언가를 올린다’는 개념이, 이토록 압도적일 수 있다는 걸 그날 처음 깨달았다. 그 빌딩 안에는 무수한 재료, 기술, 자원이 응축되어 있었다. 그것들을 가능하게 만든 ‘방향성’에 대해 생각하게 된 것도 그 무렵이다.
‘더 높이’라는 목표 아래, 재료와 기술은 서로를 끌어당기며 경쟁하듯 진화했다. 재료는 점점 더 가벼워졌고, 최상층으로 갈수록 면적을 줄이는 방식으로 바람에 대한 구조적 대응도 이루어졌다. 투명 유리의 제조 기술 또한 발전하면서, 건축물은 채광과 전망의 질을 한층 끌어올릴 수 있게 되었다.
기술의 발전과 재료의 진화는 긴 시간을 함께 걸어온 동지처럼 서로에게 기대며 발전해 왔다. 그러나 조금 멀리 떨어져 바라보면, 사실 그 둘을 이끌어온 것은 ‘발전의 방향성’이었다. 우리는 그 방향에 맞는 자원을 찾아내고, 필요한 재료를 만들어낸 셈이다. 애초에 방향이 달랐다면, 자원의 선택부터 건축 재료, 도시의 모습까지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졌을지도 모른다. 서로 맞물리며 변화해 온 재료와 기술. 앞으로 그것들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가게 될지, 기대와 걱정이 동시에 밀려온다.
언젠가 건축잡지를 보다가, 얇게 켠 대리석 판에 빛을 비추면 그 빛이 그대로 통과한다는 사실에 깊이 놀란 적이 있다. 빛이 대리석을 은은하게 통과하며 돌의 무늬를 고스란히 드러냈다. 그동안 나는 빛이 통과하는 재료는 ‘유리’뿐이라고 생각해왔다. ‘창’이라는 상징에 사로잡혀, 다른 재료의 가능성을 미처 바라보지 못했던 것이다. 돌은 무겁고 단단하다는 고정관념이 내 안의 재료 인식을 틀 짓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필연과 우연 사이 어딘가에서 생성된 돌의 결들이 생생히 살아 숨 쉬는 것처럼 보였던 그 순간. 그 경험은 재료에 대한 내 생각을 뒤흔드는 계기가 되었다.
노트르담 성당 앞, 도시의 출발점이라 불리는 작은 원형 표식 위에 서 있는 것처럼, 나는 사물을 새롭게 볼 수 있는 제로 위에 서 있었다.
자원들을 찾아내고, 분석하고, 재료를 만들어내는 것처럼, 재료의 가능성 또한 더 넓게, 다르게 바라볼 수 있다. 세상의 어느 곳이든 확장할 여지는 충분히 있다. 그 가능성은 언제나 희망적이다.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속 한 장면이 떠오른다. 두 개의 돌이 절벽 위에 서서 조용히 대화를 나눈다. 멀티버스의 세계를 정신없이 넘나들던 엄마와 딸이 말없이 돌이 되어 서 있는 뒷모습이 비춰진다. 모든 소리가 사라지고, 황량한 사막의 풍경만이 펼쳐진다. 관객인 나 역시 그들과 함께 풍경을 바라보며 대화를 듣고 있는 ‘돌’이 된 듯한 기분이 든다.
“여기 앉아 있으면 모든 게 아득하게 느껴져."
“그냥 돌멩이면 돼."
Just be a rock. 그저, 돌멩이……
언젠가 한 번쯤은 누구나 느껴봤을 그 감정.
삶이라는 것이 결국은 그런 것이라는 말처럼, 그 장면은 나에게도 조용한 위로가 되었다.
돌과 나무, 우리가 흔히 ‘생명이 없다’고 여기는 존재들.
하지만 그 안에는 얼마나 많은 시간과 역사들이 스쳐 지나갔을까.
무심할 수 없다.
언젠가 진관사를 산책하다가, 길가에 굴러다니던 돌멩이 몇 개를 집으로 데려온 적이 있다. 물을 끼얹어 깨끗이 닦고, 햇볕에 바짝 말린 뒤, 돌 위에 그림을 그렸다. 맨들맨들한 종이를 스치던 손의 감각과는 전혀 다른, 거칠고 차가운 느낌이 손날을 타고 올라왔다. 나무의 나이테처럼, 돌에서도 결이 느껴졌다. 그 안에 얼마나 많은 역사가 겹겹이 들어 있었을까. 나는 돌을 바라보며, 그 위에 그림을 그려 넣으며, 나의 시간을 얹었다. 아주 작지만, 온기를 담아.
돌과 나무, 그리고 흙과 바람, 햇살과 물. 그 모든 것 위에 우리는 삶을 쌓아 올리고, 흔적을 남긴다. 결국 우리가 살아가는 이 모든 순간들도, 먼 훗날 누군가에게는 ‘시간이 담긴 재료’가 될지도 모른다.
지금의 나는, 과연 어떤 재료로 남게 될까. 그 위에 또 다른 누군가의 세월이, 온기가 얹히게 될까. 그 생각만으로도, 오늘의 이 시간 역시 조금 더 아끼고 들여다보고 싶다. 조금 더 천천히, 깊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