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귀리 Oct 19. 2023

돌 위에 나의 시간을 얹는다


산과 바다와 땅에 묻혀 있던

재료 이전의 재료들.

조금씩 파헤쳐져

도시와 건축, 일상을 위한 재료들로 태어났다.

그에 따라 지구의 몸이 점점 작아져갔고

작아진 만큼 도시와 빌딩들이 늘어났다.

그 모든 것들이 지구의 일부를 떼어내 만들어진 것이다.


때론 연료가 되고 유리가 되었다.

때론 기둥이 되고 문이 되었다.

때론 식탁이 되고 의자가 되었다.

때론 음식이 되고 와인이 되었다.


긴긴 역사와 시간이 저장된

돌과 나무를 바라본다.



재료들에 대해 자주 생각했다. 바닥에 깔려있는 화강석을 보며 어디에서 온 돌일까? 식탁 위에 놓인 커다란 원목이 어떤 숲에서 자라던 나무일까? 그들의 삶이 궁금했다.

집을 한 바퀴 돌아보기만 해도 각자의 산지가 모두 제각각이다. 멀리 돌고 돌고 돌아 이곳에 모여있게 되었다.

문득 생각 하나가 스쳐 지나갔다. 모든 사물에 지나온 역사가 기록되어 있다면 좀 더 특별한 마음이 들지 않을까 하는. 나는 좀 더 그 사물에 애정을 갖고 아낄 것 같다. 예를 들어 거실에 놓인 커다란 원목 아래에 이렇게 적혀있는 것이다.

나이 50세의 블랙 월넛. 북미 아이오와 근방의 숲에서 자란 호두나무. 2012년 4월 벌목. 해상 컨테이너와 트럭 운반. 3년 건조. 00 제재소에서 재단. 00목공방에서 샌딩, 천연오일마감.

만약 이런 역사를 읽게 된다면 매일 손으로 쓰다듬고 오일을 먹이고 흠집이 나면 다듬어 오래도록 함께 할 것 같다.

재료들이 우리에게 오기까지의 시간과 거리, 역사를 가늠해보고 싶어 그들이 왔던 길을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 보려 한다.



01. 재료 이전의 재료. 자원

‘자원’은 쓸모가 있는 천연자원을 뜻하고, ‘재료’는 물체를 구성하는 물질을 뜻한다. 그러니까 가공 이전과 이후로 구분할 수 있다고 보면 된다. 용어를 섞어서 쓰던 버릇이 평소에는 상관없는 일일 테지만 오늘의 주제를 다루기 위해서는 확실히 선을 긋고 시작해야 했다.

모든 재료는 우리가 사용하기 전에는 자원이었다.

우리 조상들은 수렵과 채집을 통해 자원에 대한 인식을 하게 되었다. 그들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자원으로 가득한 지구가 보였고 모든 것들을 분석하기 시작했다. 먹을 수 있는 것과 없는 것, 맛있는 것과 없는 것, 에너지를 주는 것과 아닌 것, 유용한 것과 아닌 것을 구분해 나갔다. 도구를 통해 발굴과 가공의 능력을 갖추게 되었다. 생존과 관련된 도구와 기술의 발전은 날개를 달고 앞으로 나아갔다. 자원들을 선별하고 가공해 재료로 만들었고, 그것들을 기반으로 우리의 도시와 일상은 비약적으로 달라졌다. 오랜 세대를 통과하며 이뤄낸 발전이다.


이제 자원들을 찾으러 멀리 가보자.

가장 먼저 광산이다. 석탄, 다이아몬드, 철광석, 금, 은, 구리, 화강암, 현무암, 대리석을 발견할 수 있다. 암석이

묻혀있는 위치에 따라 광산의 모습이 달라졌다. 채굴해 나가는 모습이 다랭이 논처럼 계단식 같은 광산이 있고 땅에 굴을 파 깊게 들어가서 채굴하는 광산도 있다.

암석은 지나온 역사를 온전히 몸에 품고 있다. 돌은 단단해 주로 건축 재료로 쓰이는데, 마그마가 식어 굳으면 화강암, 현무암이 되고, 퇴적물이 쌓이고 굳으면 석회암, 응회암, 사암이 된다. 화강암, 퇴적암이 열과 압력을 받으면 대리암과 편마암이 된다. 그들의 생성 과정과 역사가 온몸에 무늬와 흔적으로 새겨져 있는 것이다.

석탄은 퇴적된 나뭇잎이 열과 압력을 받아 태어나 한동안 우리의 주요 연료로 사용되었다. 다이아몬드는 부를 상징하는 장식이 되었고, 구리는 열과 전기 전도성이 좋아 산업 전반에 사용되고 있다. 철광석은 고온에서 녹여 순수한 철을 추출해 자동차, 가전제품, 건축 재료에 두루 사용되고 있다. 돌과 다른 재료를 혼합해 만들어지는 재료도 있는데, 유리는 석영으로부터, 알루미늄은 장석으로부터 태어난 건축재료다. 암석의 장점을 뽑아내 다양한 실험 끝에 만들어낸 것이다.

이번엔 산책하는 기분으로 숲에 가보자. 자작나무, 소나무, 참나무, 밤나무가 있다. 나무의 특성에 따라 가구와 건축 구조, 마감재료로 사용된다. 단단함과 밀도, 두께와 길이도 제각각인데 나무가 사는 지역의 날씨에 따라 식생이 달라진다. 식물의 섬유질로는 종이를 만들고, 나무 열매와 식물은 식재료가 된다. 바닷속을 들여다보자. 해초와 어류, 갑각류… 바다는 땅과 다르게 단단함보다는 유연한 자원이 대부분이다. 인간의 관점에서는 물속에 있는 생명들이 모두 잠재적 식재료다. 이제 고개를 들어 허공을 올려다보자. 바람의 힘으로 전기를 만들고 태양의 빛과 열로 전기와 온수를 만들고 있다. 채취하고 채굴하면 그만큼 사라지는 암석과 바다 자원들과는 다르게 허공 속의 바람은 여전히 흘러가고 태양은 지구를 비추고 있다. 그것도 충분하게.


상상하지 못할 만큼 오랜 시간 동안 자원들은 만들어져 왔다. 화산 폭발, 융기, 침하, 퇴적, 풍화, 빙하기와 간빙기의 반복. 아주 긴 시간에 걸쳐 끊임없이 변형되어 마침내 우리와 마주한 것이다. 그리고 여전히 진행 중이기도 하다. 우리가 여전히 진화 중이고 나이 들어가는 것처럼.

지형이나 지역에 따라 자원들이 집중적으로 몰려 있는 이유는 오랜 시간 같은 변화를 겪었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대리석 채석장으로 유명한 이탈리아 카라라는 조각가들이 즐겨 찾는 곳이다. 흰색과 청회색을 띤 대리석의 아름다움이 그들을 이끌어 고대 로마의 기둥에, 미켈란젤로의 다비드 상에, 전 세계의 기념비와 조각들에 사용되었다. 재료를 바라보는 미적 기준은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나서도 여전히 유효하다.

자원들의 나이를 생각해 보았다. 화강암 10억 년, 현무암 1,000년, 다이아몬드 10억 년, 은행나무 600년, 소나무 400년…… 범접할 수 없는 시간과 역사다. 탄생과 변형의 수많은 갈림길 끝에 마침내 우리와 만나게 된 돌과 나무에 머리가 숙여질 것 같다.



02. 식食의 재료

재료는 관심을 기울여야 잘 알게 된다. 채식을 하게 된 이후로 재료에 대한 생각이 부쩍 많아졌다. 모든 재료 가운데 식재료만큼 중요한 것이 또 있을까 싶다.

세상이 돌아가는데 필요한 에너지를 석유와 석탄, 바람, 물, 지열과 같은 재료에서 얻는다면 우리 인간은 식재료로 만든 음식을 먹음으로써 에너지를 낼 수 있다.

식재료의 건강함은 곧 우리의 건강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중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좋은 땅에서 자라야 한다. 향이 좋은 나물과 채소들은 그런 곳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와인이 떼루아에 의해 맛이 좌우되는 것처럼.

돌과 나무처럼 식재료도 자원과 재료인 게 분명하다. 같은 카테고리로 묶어 생각하니 기분이 어쩐지 묘하다. 그런 느낌을 갖고 식재료들이 몸 안으로 들어오는 이미지를 상상하다가 문득 돌과 나무 맛이 궁금해졌다.



03. 지구를 이루고 있을 뿐

주위를 둘러보더라도 여전히 지구에는 자원들이 많이 남아있지만 정말 있는 대로 탈탈 털어 소비하고 있는 건 아닌지 마음이 무겁다. 고갈될 때까지 자원을 써버리고 대체할 다른 자원을 찾으며 지구를 갉아먹고 있는 것은 아닌지 비판의 날이 선다. 만약 누군가 그로 인해 손해를 보고 있다면 충분히 따져 물을 수 있는 상황이지만 지구라는 행성은 말이 없다. 우리가 듣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지구를 이루고 있는 모든 것들을 잠재적 자원이라고 규정하고 그 실효성이 입증된 천연자원들을 마음대로 써도 된다는 발상은 조금 뻔뻔한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사용에 대한 규제가 있는 이유다. 땅 속에 잠들어 있는 재료들을 보유하고 있다는 것만으로 부를 쌓는 일이 지구 전체를 생각했을 때 매우 불공정한 일인 것도 같다. 국경이라는 구분으로 소유하고 있는 땅은 내 마음대로 해도 된다는 식의 생각으로 이어진 것이 아닐까 싶다. 땅을 구획하고 전쟁을 통해 영역을 확장하며 지구 전체에 대한 생각은 미뤄뒀던 것이다.

긴긴 세월, 지구의 변화를 지켜보고 있는 존재가 있다면 한탄을 할까? 아니면 우리 인류의 문명이 아주 찰나에 지나지 않는 인간이라는 종의 좌충우돌 이야기로 생각될까?

이런 생각을 하는 동안, 찜찜함이 마음속에 스멀스멀 올라오고 있다. 나의 직업과 생각들이 어떤 지점에서 충돌하기 때문이다. 건축은 뭔가를 만들어내고 개발하고, 그걸 위해 재료를 사용하고 에너지를 소비한다. 하지만 나는 개발의 반대편으로 생각이 흘러가곤 한다. 기술과 도시로 향하지 않고 자연과 오래된 것을 향한다. [……]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저 마음 가는 대로 왔다 갔다 하다가 제자리로 돌아오는 것을 반복하며 살면 되겠지.



04. 자원, 재료 그리고 기술

태어나고 자라온 장소와 역사가 다른 만큼 자원 나름의 고유한 특성이 있다. 그 특성을 파악해 재료로 만든다. 건축재료 중에는 특별한 용도를 위해 조합해 만든 재료들이 많은데 단열, 방수, 방습 등의 기능을 위한 재료들은 집을 따뜻하고 안락하게 만드는데 중요하다. 공기층을 만들어 단열을 좋게 하기 위해 만들어진 스티로폼과 같은 단열재와 열전도를 막는 단열재도 있다. 습도 조절에 효과적인 재료에는 나무와 흙이 있다. 한지에도 미세한 공기구멍이 있어 습도에 따라 팽팽해졌다가 느슨해지기를 반복하며 한옥에 쾌적함을 유지하게 해 준다.


건축을 기술적인 관점에서 봤을 때 철근 콘크리트 구조와 철골 구조의 탄생은 패러다임의 전환이었다. 그에 따라 철과 모래와 자갈과 시멘트를 더 많이 채취하게 되었고 구조적 단점을 보완하기 위한 기술들이 나왔다. 이 시기에 아파트와 근생, 오피스, 고층 빌딩들이 쏟아져 나왔다.

엘리베이터 브레이크가 업그레이드되어 고층을 오갈 수 있게 되었을 때 한 단계 더 나아가 초고층 빌딩의 시작을 예감했다. ‘더 높게’라는 목표를 세우고 서로 경쟁을 시작했고, 그에 따라 재료와 기술은 초고층에 맞게 업그레이드되어 갔다. 재료는 점점 가벼워졌고, 바람에 대비해 최상층으로 올라갈수록 작아지는 해결책을 만들어 구조와 디자인을 해나갔다. 투명 유리 제조 기술은 건축에 채광과 전망의 질을 끌어올렸다.

기술의 발전과 재료의 발전은 함께 인고를 나눈 동지처럼 긴 역사를 함께 해 온 것이다. 조금 뒤로 물러서 바라보면 발전의 방향성이 재료와 기술을 이끌었고 그에 맞는 자원을 찾은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애초에 방향성이 달랐다면 자원의 선택에서부터 건축재료와 도시는 다른 모습이었을 것이다.



05. 재료에 대한 고정관념

언젠가 건축잡지를 보다가 대리석을 얇게 켠 판에 빛을 비추면 그대로 통과한다는 사실을 접하고는 놀란 적이 있다. 빛이 대리석 판재를 통해 은은하게 들어오며 돌의 무늬가 그대로 드러나는 것이다. 빛이 통과하는 재료가 유리밖에 없는 것처럼 ‘창’이라는 상징성에 사로잡혀 다른 재료들을 돌아보지 않게 된 것이다. 돌이라는 재료가 무겁고 단단하다는 생각이 재료에 대한 고정관념을 부추기기도 했다. 필연과 우연 사이 어딘가에서 만들어진 돌의 결들이 생생히 살아 숨 쉬는 듯 보였던 그 경험은 재료에 대한 생각을 바꾼 계기가 되었다. 자원들을 찾아내고 분석해 재료를 만들어가는 것처럼 재료의 가능성을 넓게 볼 필요가 있음을 깨달았다. 세상의 어떤 곳에서도 확장할 여지가 충분하다는 것이 늘 희망적이다.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중에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두 개의 돌이 절벽 위에 서서 대화를 하고 있다. 멀티버스의 다양한 세계를 정신없이 오가다가 두 개의 돌이 된 엄마와 딸의 뒷모습을 비춘다. 모든 소리가 무음이 되고 삭막한 사막. 관객 역시 그들과 함께 풍경을 보며 대화를 듣고 있는 돌이 된 듯하다.


“여기 앉아 있으면 모든 게 아득하게 느껴져. “

“그냥 돌멩이면 돼. “


Just be a rock. 그저 돌멩이……

언젠가 한 번쯤 느껴봤을 감정이 떠올랐다. 모두에게 삶이란 그런 것이라는. 위로가 되었다.

돌과 나무에 대한, 재료 이전의 재료에 대한 글을 쓰며 그 장면이 계속 떠올랐다. 우리가 생각하는 생명이 그들에게 없다고 하더라도 그 안에 얼마나 많은 시간과 역사들이 스치고 갔을지…… 무심할 수 없을 것 같다.

언젠가 진관사를 산책하다가 길가에 굴러다니는 돌멩이를 보다가 문득 생각나 몇 개 골라 집으로 가져왔다. 물로 깨끗이 닦고 햇빛에 바짝 말려 돌 위에 그림을 그려 넣었다. 맨들맨들한 종이 위를 스치던 손의 감각과 전혀 다른 거칠고 차가운 느낌이 손 날을 타고 올라왔다.



나무의 나이테처럼
돌에서 결이 느껴졌다.

그 안에 얼마나 많은 역사가 들어있을까?
돌을 바라보았다.

그림을 그려 넣으며
나의 시간을 그곳에 얹었다.

아주 작지만 온기를 담아.


어느날 산책을 하다가 바닥에서 날고 있는 잠자리를 마주쳤다                    _ BGM # Reflection | Víkingur Ólafsso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