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감고 귀를 기울여 보면, 세상은 소리로 가득하다. 감각을 극대화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역설적이게도 다른 감각을 잠시 닫아두는 것이다. 시각을 차단하고 귀를 쫑긋 세우면, 비로소 세상의 결이 들리기 시작한다. 무엇이 들리는가?
[……]
소리들은 차례차례 귀를 통과한다. 아주 짧은 찰나, 복잡한 여정을 거쳐 뇌에 도착한 파동은 비로소 의미가 된다. 우리는 '끼익' 하는 마찰음에서 문이 열리는 서사를 예견하고, 다음에 일어날 일을 기다린다. 그 여정의 물리적 값은 과학의 영역이지만, 소리를 해석하는 기준은 철저히 사적이다. 내가 만난 세상의 소리들이 당신의 것과 같을 수는 없다. 소리에 대한 탐험은 늘 개인의 기억이라는 필터를 거치기 때문이다. 이제, 기억의 습작들을 따라 소리의 세계로 들어가 보자.
똑똑, 짹짹, 쨍그랑, 우르르 쾅쾅, 덜커덩, 끼익, 지글지글, 와장창. 쉼 없이 귀를 통과하는 이 파동들은 사실 소리 그 자체가 아니라, 소리를 흉내 낸 '단어'들일 뿐이다.`
의성어는 소리의 궤적을 짐작하게 할 뿐, 그 실체를 온전히 대체하지 못한다. 길 위에서 우연히 마주친 찰나의 소리, 그 기분 좋은 뉘앙스와 미묘한 공기의 결을 고작 몇 글자로 가두기엔 늘 한계가 있다. 우리가 감각하는 소리의 농도와 깊이를 측정하는 것 역시 불가능에 가깝다. 그것은 안개 낀 필터 너머로 희미하게 일렁이는 풍경을 바라보는 것과 같다.
하지만 모든 미스터리를 명명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그 미지의 영역을 더듬어가는 것이야말로 과학과 예술의 숙명일 테니까. 포기하지 않고 끝내 표현하고자 하는 그 끈질긴 시도들 덕분에, 우리는 감각의 세계를 조금 더 넓힐 수 있다. 우리에게 감각할 자유가 주어졌다는 사실, 그것만으로도 세상은 충분히 경이롭다.
나는 이제 소리로 건축물을 짓듯, 글로 감각의 풍경들을 켜켜이 쌓아 올리고 싶다. 언어라는 불완전한 거푸집에 소리의 파편들을 부어 넣고, 그 단단한 굳음 속에서 미처 들리지 않았던 여백의 소리들을 길어 올리는 일. 비록 완벽한 재현은 불가능할지라도, 나는 그 틈새에 머무는 소리의 잔향까지 기록하고 싶다. 어쩌면 내가 써 내려가는 이 문장들은, 소리가 사라진 자리에 남은 가장 고요하고도 묵직한 지층인지도 모르겠다.
작은 공원, 루프 스테이션에 둘러싸인 뮤지션이 있다. 그는 손바닥으로 비트를 만들어 반복적인 리듬을 깔고, 그 위에 기타와 키보드 선율을 한 층씩 덧댄다. 모든 레이어가 갖춰졌을 때 비로소 음악이 시작된다.
홍대 앞 공원에서 만난 그는 원맨 밴드였지만, 혼자라기엔 너무도 풍성했다. 기계를 이용해 소리를 쌓아가는 그의 연주를 보며 나는 겹겹이 층을 이룬 페이스트리를 떠올렸다. 밀가루 반죽 사이에 버터와 공기가 들어가 켜를 만드는 빵처럼, 그의 음악에서도 악기들의 경계는 분명하다. 소리들은 서로 섞여 사라지지 않고, 각자의 결을 유지한 채 하나의 하모니를 향해 층층이 쌓여간다.
그는 혼자서 소리의 합을 조율하는 코디네이터이자 연주자이며, 싱어다. 이 연주는 여럿이 소리를 더해 완성하는 앙상블이나 오케스트라의 축소판과도 같다.
그 열렬한 음악적 몸짓에 마음이 움직인다. 어쩌면 인간이 합주와 합창에 열광하는 이유는, 소리를 통해서라도 타인과 연결되고 싶은 고독한 본능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소리의 '합'이 맞는 찰나의 희열, 우리는 그 겹겹의 울림 속에서 비로소 안온함을 찾는다.
변주가 필요한 순간, 그는 배경의 일부를 지우고 새로운 결을 얹는다. 허밍으로 목소리를 덧대며, 공기 중에 또 다른 층을 굽고 있다.
언제 여름이었나 싶게 계절이 가을로 시간 이동을 했다. 산바람이 시원한 오후, 자석에 이끌리듯 햇빛을 찾아 발걸음을 옮긴다. 파란 하늘 아래 눈을 감고 청각을 제외한 다른 감각들을 애써 누르며 귀에 집중한다. 이제 세상 속에 켜켜이 스며있는 소리들을 하나씩 낚아 올릴 시간이다.
띠링, 띠링. 등 뒤에서 다가오는 자전거 벨 소리. 존재를 알리는 동시에 주의를 요하는 이 경쾌한 신호는 잠시 곁에 머물다 흩어진다.
녹색불이 켜졌습니다. 초등학교 앞 건널목. 신호음이 허락한 20초의 시간 동안, 나는 초록빛 투명한 길을 완주한다.
드르륵, 드르륵. 도로 위 요철을 지나는 타이어의 마찰음. 운전자에게는 조심하라는 경각심을, 바로 옆 보행자에게는 무언가 긁히는 듯한 소음으로 치환되는 찰나의 경계를 목격한다.
삐이이이익— 닫히려는 지하철 문을 필사적으로 막아 세운 누군가의 의지. 그 날카로운 비명 뒤로, 지각을 면한 이의 안도와 환승을 놓친 타인들의 한숨이 교차한다. 문이 닫히고 차내에 낮게 내려앉은 어색한 침묵까지, 이 소리는 복잡한 서사의 집약이다.
똑똑똑. 수도꼭지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세면대 도기를 두드리며 공간의 재질을 암시하고 미처 잠기지 않은 틈을 알린다. 그 소리와 함께 계량기의 숫자 ‘1’이 올라간다.
쾅쾅쾅. 망치가 콘크리트 벽을 뚫고 들어가는 소리. 못과 벽이 마찰하며 가족사진을 걸 자리를 만든다. 늘 한 세트로 움직이는 이 소리는 곧 ‘집’이라는 풍경의 마침표다.
아아아아아… 네에에에. 오후 4시와 6시 사이, 노는 시간을 연장하고 싶은 아이들의 아쉬움과 “밥 먹어!”라는 엄마의 부름이 허공에서 엉킨다. 오늘의 안녕을 고하는 대답이 허공으로 튀어 오른다.
씽씽씽, 통통통, 드르르륵. 줄넘기와 배드민턴 공, 롤러블레이드 바퀴 소리. 눈을 감고도 이곳이 체육공원임을 아는 건, 소리가 이미 그 공간의 지형을 완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오— 오오오! 리듬과 톤이 제각각인 목소리들이 모여 하나의 거대한 패치워크가 된 승리의 함성. 소리로 이루어진 돔(Dome)이 머리 위로 펼쳐진다. 뜨거운 눈물을 부르는, 야구 정규시즌 우승의 소리다.
소리들은 세상 곳곳에 스며 있다. 소리 없는 풍경이 불완전하듯, 일상은 이토록 밀착된 파동들로 완성된다. 문득 소리가 없는 세계를 상상해 본다. 비행기가 이륙할 때의 먹먹함일까. 무음 버튼을 누른 채 재생되는 영상처럼, 소리가 거세된 공간은 지독하게 어색하다. 경험해 온 공간과 사물의 소리는 내면에 저장되어 있다가, 응당 들려야 할 것이 들리지 않을 때 비로소 낯선 당혹감으로 밀려온다. 당연한 것은 없다는 진리를 마주하며, 오늘을 감싼 이 소리들에 감사하며 수다스러운 풍경화를 수집한다.
매일 일상의 소리를 낚아 올리는 일은 단순히 기록하는 행위를 넘어선다.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이 뒤섞인 이 도시의 지형도를 정밀하게 그려 나가는 작업이다. 소리가 없는 풍경은 껍데기에 불과하다. 나는 오늘도 소리라는 감각의 재료를 엮어, 세상이라는 찬란한 건축물을 다시 짓는다. 그렇게 채집된 파동들은 이제 나만의 시간의 서가로 향한다.
감각을 온전히 저장할 수 있을까. 가능하다면 지금의 공기, 꽃향기, 햇빛, 그리고 다정한 웃음소리를 고스란히 담아두었다가 언제든 다시 꺼내 느낄 수 있을 텐데. 이런 간절함 때문인지, 감각을 붙잡아두기 위한 장치들은 쉼 없이 진화하고 갱신된다.
향기는 기억의 파편을 모아 향수로, 풍경은 카메라 렌즈를 통해 박제되어 언제든 재생된다. 인간의 감각 중 가장 예민한 시각을 위해 카메라의 해상도는 정점을 향해 치닫는다. 소리 역시 마찬가지다. 녹음기와 마이크, 앰프와 스피커는 찰나의 파동을 데이터로 변환해, 듣고 싶을 때마다 우리를 그 시간의 한복판으로 다시 불러낸다.
때로 소리는 시각보다 기민하게 우리를 과거의 장소로 송환한다. 우리의 기억은 평평하게 펼쳐져 있지 않다. 삶의 어떤 마디나 기억의 모서리, 혹은 마음의 주름진 골짜기마다 낡은 파동들이 겹겹이 접혀 있다. 잊고 지냈던 그 모퉁이들을 어느 날 문득 스친 소리가 예리하게 건드리면, 굳게 닫혀 있던 시간의 층이 '툭' 소리를 내며 펼쳐진다. 파도 소리는 순식간에 바다 한가운데로, 파이프 오르간 소리는 어느 여름 보르도 성당의 서늘한 공기 속으로, 지붕을 두드리는 빗소리는 삼청동 집의 고요로 나를 이끈다. 힘이 빠진 매미 소리가 어느 해 늦여름을, 누군가의 목소리가 아득한 추억 속 엄마를, 멀리서 들려오는 기차 소리가 유년의 밤을 복원한다. 소리는 그렇게, 접혀 있던 기억의 모서리를 펼쳐 나를 그곳으로 단숨에 데려다 놓는다.
하지만 소리는 우리를 '그곳, 그때'로 데려가면서도, 그것이 이미 지나간 과거임을 매번 일깨운다. 한 번 출력된 파동은 결코 되돌릴 수 없으며, 공기 중에 잠시 머물다 사라질 뿐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재생된 소리에 기대어 잃어버린 시간의 층위를 더듬고 싶어 한다.
아, 그립구나. 사라진 소리의 껍질 안에서 다시 피어나는 그 온기가.
작업 중 우연히 알프스 산등성이에서 열린 재즈 연주 영상을 발견했다. 호수 가장자리에 설치된 무대 위, 연주자는 홀로 베이스를 켠다. 완만한 풀밭에 흩어져 앉은 관객들, 그 위로 흐르는 파란 하늘과 바람, 그리고 호수의 수면. 소리를 담아내는 이 거대한 천연의 그릇보다 더 아름다운 공연장이 있을까. 낮고 굵은 베이스 현의 울림은 바람을 타고 유영하며 호수 수면을 미세하게 흔든다. 마치 물속 깊은 곳에 잠들어 있던 신화적 생명체를 깨우는 진동처럼. 야외 페스티벌의 진정한 매력은 소리가 머무는 '장소'와 그 장소가 품은 공기의 결에서 나온다.
인류가 음악을 연주했던 최초의 장소는 아마 광장이나 정원, 혹은 깊은 숲 같은 야생의 공간이었을 것이다. 밖에서 듣는 음악은 질감부터 다르다. 주변의 잡음이 섞여 들기에 세밀한 감상은 어렵지만, 공간이 주는 극적인 해방감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 고대 로마인들은 이런 야외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정교한 음향 설계를 가미한 반원형 공연장을 지었다. 소리가 흩어지는 것을 막으려 했던, 장소에 소리를 가두기 위한 최초의 건축적 시도였다.
시간이 흐르며 소리와 음악은 점차 실내로 들어왔다. 소리를 더 정확하게, 완벽하게 통제하고 싶은 인간의 욕망과 상업적 목적이 맞물린 결과다. 그렇게 '공연장'이라는 절제된 그릇이 태어났다.
야외의 흩어지는 파동을 가두기 위해 건축가들은 공간의 뼈대와 피부를 집요하게 매만졌다. 천장에는 소리가 객석으로 고르게 쏟아지도록 거대한 조형물을 매달았고, 벽면에는 소리가 길을 잃지 않고 관객의 귓가에 닿을 수 있게 미세한 굴곡을 새겨 넣었다. 심지어 객석에 앉은 관객의 숨소리조차 소리에 간섭하지 않도록, 공간의 모든 재료와 각도는 연주자의 작은 떨림 하나까지 온전히 안아주기 위해 고안되었다. 그렇게 완성된 정교한 그릇 안에서, 우리는 이제 녹음실의 서늘한 정적부터 콘서트홀의 입체적인 잔향까지, 취향에 맞게 소리의 지도를 그릴 수 있게 되었다.
형체 없는 파동을 이토록 집요하게 붙잡아 그릇에 담아내려는 지구인의 바람이 실로 열렬하다. 우리는 그렇게 찰나의 진동을 기록하고, 보관하고, 다시 끄집어내며 사라져가는 시간의 층을 켜켜이 쌓아 올린다.
창밖으로 바퀴 굴러가는 소리가 이른 아침 아파트 중정의 적막을 깨운다. 덜그럭거리는 그 울림이 희미한 풍경 속으로 나를 데려간다. 어디였더라. 바르셀로나 아니면 리스본의 막다른 골목, 새벽이었다.
옅은 안개 아래, 바퀴가 돌바닥 위를 덜그럭거리며 구른다. 나는 캐리어를 들 수도, 밀 수도 없는 난감한 상황 속에서 그 소리에 온 동네가 깨지 않을까 염려한다. 하지만 곧 '어쩔 수 없다'는 듯 마음을 다잡고 씩씩하게 숙소를 향해 나아간다. 마모된 돌 위로 반짝이는 새벽의 푸른 빛. 그 위를 거쳐 간 수많은 발자국과 바퀴의 흔적들을 상상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겹겹의 층으로 남아있겠지. 비록 지금 들리는 이 소리조차 공기 중으로 곧 흩어질지라도, 과거의 진동들은 결코 사라진 것이 아니다. 단지 눈에 보이는 풍경보다 일찍 자취를 감추었을 뿐, 그 울림은 분명 돌의 틈새와 내 기억의 골짜기 속에 켜켜이 스며 있다. 덜그럭거리는 소리가 골목 끝 숙소 앞에 닿으며 마침내 멈춘다.
다시 현재의 아파트 중정. 문득 나타났다가 소리의 잔재만 남기고 떠난 누군가의 발자국처럼, 소리의 진정한 매력은 이 '현재성'에 있다. 지금, 이곳에 소리가 있다는 그 생동감. 도시는 결코 눈으로만 읽히지 않는다. 귀로 듣고, 몸으로 느끼고, 기억으로 되새기는 것이다. 그렇게 소리는 우리 안에서 페이스트리의 결처럼 층층이 쌓여, 비로소 오늘이라는 풍경을 완성한다.
지금, 이곳에 소리가 흐른다. 타닥타닥, 키보드 위를 구르는 스타카토 같은 리듬이 방 안에 활기를 불어 넣는다. 이 소리 안에는 내가 낚아 올린 세상의 모든 파동과, 층층이 쌓아 올린 시간의 건축이 담겨 있다. 페이스트리처럼 겹겹이 쌓인 소리들의 풍경화에 마지막 붓질을 더한다. 마침내 이 작은 진동들이 모여, 오늘이라는 이름의 박물관에 또 하나의 방을 들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