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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귀리 Aug 24. 2023

겨울마다 찾아오는 새로운 필드, 눈을 기다리며

점점 다가오고 있다. 어딘가로부터 _ BGM # Bach: Aria variata in A Minor, BWV 989  | Víkingur Ólafsson



하얀 여백의 땅이 나를 부른다.

저 멀리 지구 반대편에서 손짓을 하며

겨울이 이곳에 있다고.


먼저 겨울을 맞이한 남반구 어느 도시 6월에 10년 만에 많은 눈이 내렸다. 기후 이상 징후들이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지만, 그런 생각을 할 겨를이 없을 만큼 이성은 본능을 뛰어넘지 못했다. 그들에게 눈은 비일상적인 매우 이례적인 일이라 축제처럼 모두 거리로 나와 눈을 즐겼다. 그들에 비해 조금 더 익숙하지만 북반구에 사는 우리에게도 눈은 특별하다.


눈의 무엇이 그토록 우리를 두근거리게 할까?

세상의 풍경이 눈 아래 묻혀 잠시라도 슬픔을 묻어둘 수 있기 때문일까? 아니면 모든 실수를 지워버릴 수 있다는 마법 때문일까? 아니면 순백의 아름다움 때문일까? 그도 아니면 적막의 정취 때문일까?

모두 그럴 수 있다.

우리가 눈을 기다리는 이유는 너무나도 많다.

아직 겨우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경계를 통과 중이지만, 비가 한번 내릴 때마다 기온이 뚝뚝 떨어지는 날씨를 체험하다 보니 생각보다 빨리 눈을 만날 수 있을 것만 같다. 남반구의 도시들은 지금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가는 중이다. 잿빛 세상이 초록으로 변해갈 차례다. 우리는 정 반대편에서 엇갈리게 계절을 보내고 있지만, 차례차례 계절의 단계를 밟아가고 있다.

눈은 이제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다.

겨울이 오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의 탐험은 기억과 상상을 오가며 머릿속에서 이루어질 것이다.


머릿속이 벌써부터 차가운 빙수를 먹을 때 같다.

찌릿하면서도 짜릿하다.

차가운 눈의 입자가 손끝에 닿자마자 스르륵 녹아 사라지는 감각을 떠올렸다.

아, 뭔가 아쉽다.

창문에 들이치는 빗방울과 북동쪽에서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에 조금 더 몰입할 수 있을 것 같다.

코 끝이 차갑고 감각이 조금 둔해지는 느낌이다.

아이슬란드 뮤지션 시규어 로스(Sigur Ros)의 음악(Svefn-g-englar)을 방 안 가득 채웠다.

서늘하고 신비로운 공기가 살갗에 와닿는 것 같다.

노르웨이 건축가 스노헤타(Snohetta)가 설계한 오슬로 오페라 하우스 위에 눈이 내린 사진을 떠올렸다.

하얀 폼보드로 만든 모형처럼 어딘가 현실 같지 않다.


이제 머릿속이 온통 차갑고 하얗다.

앞으로 다가올 또는 지나간 눈을 찾아 떠날 준비가 됐다.



01.

서둘러 나갈 채비를 하고 밖으로 나갔는데도 눈 위에 발자국이 찍혀있다. 눈 위의 깨끗한 질서를 깨고 싶지 않아 먼저 다녀간 부지런한 누군가의 발자국 위를 겹쳐 걸으며 생각에 잠겼다.

눈이라는 어마어마하게 커다란 종이 위를 나는 걷고 있었다. 밟을 때마다 뽀드득 소리를 내며 신발 바닥의 문양이 고스란히 눈 위에 찍혔다.

입체적인 판화를 보고 있는 것 같았다. 판화가 조각된 원판에서 느껴지는 요철의 강렬한 대비와 거친 느낌이 종이에 찍히는 순간 전혀 다른 예술로 태어나는 것처럼 눈 위에 새겨지는 발자국, 스쳐 지나간 흔적들이 사물의 또 다른 모습으로 눈 위에서 태어났다.

판화의 에디션 넘버처럼 발을 디딜 때마다 그 하나하나의 발자국은 매번 다른 모습을 기록했다. 우연하고 즉흥적인 작업 과정이 만들어낸 판화의 유니크함이 그림에 생기를 불어넣는 것처럼 눈 위에서도 발을 디딜 때마다 그런 감각을 경험했다. 아무리 해도 똑같이 만들어낼 수 없는, 영락없이 이건 뭔가를 창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즐거운 것은 당연한 일이다. 종이 위에 찍어내는 판화를 실제 눈 위에서 ‘판화라는 행위’를 하고 있었다. 그런 방식으로 생각해 보니 눈 위에서 ‘판화 놀이’를 하면서 동시에 ‘예술 행위’를 하고 있었다.


눈이라는 새로운 필드는
선물처럼
겨울 한정으로
우리를 찾아왔다.



02.

눈 아래 묻혀 그 자취가 모두 사라진 도시의 풍경을 거실 창 앞에 서서 한동안 바라보았다. 매일 아침 물을 마시며 바라보는 집 앞 풍경은 아주 조금씩 달라져 그 차이를 크게 감지하기 어렵다. 계절의 변화는 대부분 매일 보다 보면 눈치채기 어려운 것이 보통이지만, 눈은 너무나 갑작스럽게 세상을 바꿔버린다.


있던 풍경을 사라지게 하고,

없던 풍경을 나타나게 한다.

날씨의 마법이 도시에 펼쳐졌다.


눈 사이에 알알이 박혀있는 공기 방울들이

흡음재가 되어 소리도 잠재웠다.

무음의 세계가 되었다.

빛이 반사의 반사를 반복하며 멈출 줄을 모른다.

이보다 더 흰색일 수 없을 만큼의 눈부신 흰색.


세상이 몇 시간 만에 완벽히 달라졌다.

태양의 열기에 녹아 사라지기 전까지 지속될

또 다른 세계.



03.

눈은 도시에서 멀리 떨어질수록 더 오랜 시간 땅 위에 남아있었다. 며칠이 지나도 그 풍경이 지속됐다. 서울에서 벗어난 이곳은 콘크리트와 아스팔트로 채워지지 않은 순수한 땅이 아직 남아있기 때문이다. 도시의 중심으로부터 서서히 정복되어 가는 땅의 마지노선에 도착해 있는 셈이다. 도시와 자연이 만나는 경계선은 어딘가 존재하고 그 경계선에서 눈이 내린 풍경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강렬한 흑백의 세계가 되어서야 더 극명히 땅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된다. 모든 땅을 인공적인 콘크리트 바닥으로 만들 셈이 아니라면 어딘가에서 멈춰야 하는데 멈춤을 잊고 말았다. 마치 우화를 보고 있는 듯하다.

그러고 보니 규모가 큰 건물의 배치 계획을 할 때면 땅이 마치 2차원이라도 되는 것처럼 착각에 빠지곤 한다. 그러다가 잠시 눈을 떼 뒤로 물러나 바라보면 멍하니 패턴 나누기를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아, 지금 뭘 하고 있었지?’ 퍼뜩 정신을 차려보면 시간은 훌쩍 지나있고 어깨는 뻐근하고 책상 위엔 식어빠진 커피 한 잔이 그대로 남아있다. 시작부터 땅을 하나의 거대한 인공 판이라도 되는 것처럼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고 보면 디자인은 눈앞의 것과 뒤로 물러나 바라보는 것 사이를 조절하는 작업일지도 모르겠다. 뒤로 물러난 채 종이 위에 대지를 바라보면 눈앞에 ‘땅’이 떠오르곤 했다.


아직 이곳엔 남아있다. 땅 위의 눈을 만끽해야겠다.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두려움과 사라진 후의 상실감은 아직 오지 않았으니까.

그 사이 눈사람이 하나 둘 마당 위에 늘어났다. 아이들이 눈 위에서 뛰어노는 모습을 보다가 동영상으로 기록을 남겼다. 다시 재생을 눌러보니 마치 짧은 영화 같다. 마지막은 누군가 눈 위에 누워 스노우 엔젤을 만들기 시작했고 모두가 그곳으로 몰려들며 영화가 끝이 났다.



04.

세상 모든 평평한 면에 눈이 쌓였다. 하늘 위에서 내려다보면 세상이 온통 하얗지 않을까 싶다. 눈이 내린 풍경을 위에서 내려다보는 시점으로 바라보았다.

장독 위에 쌓인 눈, 난간 위를 따라 아슬아슬하게 내려앉은 눈, 머리 위에 쌓인 눈, 정체불명의 뭔가에 쌓인 눈, 지붕이란 모든 지붕에 내려앉은 눈……

눈이 내려앉는 자리에 따라 눈의 형태는 다른 모습으로 존재했다. 눈은 물의 또 다른 형태이기도 하니까. 어느 순간 공기 중의 물 입자가 눈의 결정체로 맺혀 다른 모습으로 태어나는 것일 테니까. 그릇에 따라 물의 형태(Shape of Water)가 달라지듯이 눈의 형태(Shape of Snow)도 도시와 사물의 윤곽에 따라 달라졌다. 모든 디테일을 지우고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부드러운 실루엣으로 존재를 드러냈다. 그것도 더할 나위 없이 하얗게.


눈은
도시의 풍경을
몇 시간 만에
수묵화로 만들어버렸다.



05.

눈 오는 날이면 어릴 때는 순수하게 그 아름다움에 매료되었었고, 20대에는 무슨 일이라도 생길 것 같아 두근거렸다. 한참 정신없던 30대에는 두근거림과 귀찮음이 공존했었다. 목련이 질 때처럼 눈이 오고 난 뒤의 후 폭풍이 그냥 싫었다. 지금은 잠시라도 모든 걸 사라지게 하는 그 반전이 좋다. 마음이 좀 답답한가 보다. 하지만 좀 더 마음이 긍정적인 날은 그 순수한 아름다움에 빠져든다.

마음이 천 개의 갈래로 나뉘어있다면 풍경도 딱 그만큼일 것이다. 눈에 대한 한 사람의 마음도 이렇게 다양한데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는 눈에 대한 풍경을 다 합치면 얼마나 많을까?


내 안에 있는 눈의 풍경을 다 꺼내 들여다보니 가장 아름다운 건 역시 어린 시절에 있었다. 우산 없이 눈을 맞고, 손으로 눈 사람을 만들고, 눈을 뭉쳐 눈싸움을 하고, 눈 위에 발자국을 남기고 눕고 넘어지며 감각적인 방식으로 눈을 즐겼다. 어느새 밖으로 나가지 않고 커다란 유리창을 통해 바라보는 것만을 하게 되었다. 눈의 겉만 즐기고 속은 외면했다. 다시 어린 시절로 되돌아가고 있는 중이다.

우리는 어쩌면 삶을 살아갈수록 자기 안에 남아있은 아이의 모습으로 되돌아가고자 하는 게 아닐까 싶다. 원점회귀 같은. 돌고 돌아 다시 그곳으로 본능적으로 되돌아가고야 만다.


이제 눈을 마음껏 즐길 준비가 되어있다.

오직 기다림만이 내게 우리에게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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