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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다시 걷는 기억

by 귀리


하얀 여백의 땅이 나를 부른다.

아직 도착하지 않은 계절.

저 멀리, 지구 반대편에서

겨울이 여기 있다고 손짓한다.


먼저 겨울을 맞이한 남반구의 어느 도시. 6월, 10년 만에 많은 눈이 내렸다. 기후 이상 징후들이 세계 곳곳에서 계속되고 있지만, 그 순간 이성은 본능을 뛰어넘지 못했다. 그들에게 눈은 비일상적이고,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사람들은 거리로 쏟아져 나와 축제처럼 눈을 즐겼다. 그들보다는 조금 더 익숙하지만, 북반구에 사는 우리에게도 눈은 여전히 특별하다.

눈의 무엇이 그토록 우리를 두근거리게 할까? 세상의 풍경이 눈 아래 묻혀 잠시라도 슬픔을 덮을 수 있기 때문일까. 모든 실수를 지워버릴 수 있다는 마법 같은 가능성 때문일까. 순백의 아름다움 때문일까. 아니면 적막의 정취 때문일까.

모두 그럴 수 있다. 우리가 눈을 기다리는 이유는 너무나도 많다.

아직 겨우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경계를 통과 중이지만, 비가 한번 내릴 때마다 기온이 뚝뚝 떨어지는 걸 체험하다 보니 생각보다 빨리 눈을 만날 수 있을 것만 같다. 남반구의 도시들은 지금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가는 중이다. 잿빛 세상이 초록으로 변해갈 차례다. 우리는 정반대편에서 엇갈리게 계절을 보내고 있지만, 차례차례 계절의 단계를 밟아가고 있다.

눈은 이제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다.

오늘의 탐험은 사진과 기록, 기억과 상상을 오가며 책상 앞에 앉아 떠나볼까 한다. 아직 겨울이 오지 않았지만, 눈의 세계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점점 다가오고 있다. 어딘가로부터


상상을 위해 겨울의 분위기를 만들 필요가 있다. 방 안 공기를 시원하게 조절하고, 아이스커피 한 잔을 들고 책상 앞에 앉았다. 그리고 작년 겨울, 슬로우모션으로 찍었던 눈 오는 풍경을 반복 재생했다. 고개를 들어 눈을 바라보던 그때가 떠오르며 조금씩 겨울에 다가서는 듯하다.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얼음 하나를 입안에 문다. 머릿속이 차가운 빙수를 먹을 때 같다. 찌릿하면서도 짜릿하다. 다시 눈 오는 영상을 보며 창밖으로 손을 내밀던 감각을 떠올린다. 차가운 눈의 입자가 손끝에 닿자마자 스르륵 녹아 사라진다.

아, 뭔가 아쉽다. 창을 열고 빗방울이 안으로 들이치도록 내버려두었다. 공기에 습기가 가득하고, 차가운 바람에 조금 더 몰입할 수 있을 것 같다. 코끝이 차갑고 감각이 조금 둔해지는 느낌이다. 이제 배경이 될 만한 북유럽 음악이 필요하다. 아이슬란드 뮤지션 시규어 로스의 음악을 방 안 가득 채웠다. 서늘하고 신비로운 공기가 살갗에 와닿는 것 같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노르웨이 건축가 스노헤타(Snohetta)가 설계한 오슬로 오페라 하우스 위에 눈이 내린 사진을 모니터에 띄웠다. 어딘가 비현실적인, 눈으로 가득한 스노우스케이프.

이제 머릿속이 온통 차갑고 하얗다. 앞으로 다가올, 또는 지나간 눈을 찾아 떠날 준비가 됐다.



눈 위에 기록되는 순간들

서둘러 나갈 채비를 하고 밖으로 나갔는데도 눈 위에 발자국이 찍혀 있다. 눈 위의 깨끗한 질서를 깨고 싶지 않아 먼저 다녀간 부지런한 누군가의 발자국 위를 겹쳐 걸으며 생각에 잠겼다.

눈이라는 어마어마하게 커다란 종이 위를 나는 걷고 있다. 밟을 때마다 ‘뽀드득’ 소리를 내며 신발 바닥의 문양이 고스란히 눈 위에 찍혔다. 입체적인 판화를 보고 있는 것 같다. 판화가 조각된 원판에서 느껴지는 요철의 강렬한 대비와 거친 느낌이 종이에 찍히는 순간, 전혀 다른 예술로 태어나는 것처럼. 눈 위에 새겨지는 발자국, 스쳐 지나간 흔적들이 사물의 또 다른 모습으로 눈 위에서 태어났다.

판화의 에디션 넘버처럼 발을 디딜 때마다 그 하나하나의 발자국은 매번 다른 모습을 기록했다. 우연하고 즉흥적인 작업 과정이 만들어낸 판화의 유니크함이 그림에 생기를 불어넣는 것처럼, 눈 위에서도 발을 디딜 때마다 그런 감각을 경험했다. 아무리 해도 똑같이 만들어낼 수 없는, 영락없이 이건 뭔가를 창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즐거운 것은 당연한 일이다. 종이 위에 찍어내는 판화를 실제 눈 위에서 ‘판화라는 행위’로 옮기고 있었다. 그런 방식으로 생각해 보니, 눈 위에서 ‘판화 놀이’를 하면서 동시에 ‘예술 행위’를 하고 있었다.

눈이라는 새로운 필드는 선물처럼 겨울 한정으로 우리를 찾아왔다.



사라진 도시, 남겨진 침묵

눈 아래 묻혀 그 자취가 모두 사라진 도시의 풍경을, 거실 창 앞에 서서 바라보았다.

매일 아침 물을 마시며 바라보는 집 앞 풍경은 아주 조금씩 달라져, 그 차이를 크게 감지하기 어렵다. 계절의 변화는 대부분 매일 보다 보면 눈치채기 어려운 것이 보통이지만, 눈은 너무나 갑작스럽게 세상을 바꿔버린다.

세상의 어떤 풍경은 소리 없이 사라진다. 있던 풍경을 사라지게 하고, 없던 풍경을 나타나게 한다. 날씨의 마법이 도시에 펼쳐졌다.

눈 사이에 알알이 박혀 있는 공기 방울들이 흡음재가 되어 소리도 잠재웠다. 무음의 세계가 되었다. 빛이 반사의 반사를 반복하며 멈출 줄을 모른다. 이보다 더 흰색일 수 없을 만큼의 눈부신 흰색. 세상이 몇 시간 만에 완벽히 달라졌다. 태양의 열기에 녹아 사라지기 전까지 지속될 또 다른 세계.

눈이 만든 또 다른 도시.


Shape of Snow

세상 모든 평평한 면에 눈이 쌓였다. 눈이 내린 풍경을 위에서 내려다보는 시점으로 바라보았다. 장독 위에 쌓인 눈, 난간 위를 따라 아슬아슬하게 내려앉은 눈, 머리 위에 쌓인 눈, 정체불명의 무언가에 쌓인 눈, 지붕 위를 덮은 눈…

공기 중의 물 입자가 어느 순간 눈의 결정체로 맺혀 땅으로 천천히 떨어진다. 세상을 한눈에 스캔하듯, 그 위에 사뿐히 내려앉는다. 원래 있던 사물의 모습 그대로 그 위에 눈의 스킨이 한 겹 덧입혀졌을 뿐.

눈은 물과 닮았다. 물의 또 다른 형태이기도 하니까. 그릇에 따라 물의 형태(Shape of Water)가 달라지듯, 눈의 형태(Shape of Snow)도 도시와 사물의 윤곽에 따라 달라진다. 모든 디테일을 덮고,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부드러운 실루엣으로 존재를 드러냈다. 그것도 더할 나위 없이 하얗게.

눈은, 도시의 풍경을 몇 시간 만에 수묵화로 만들어버렸다.



흰 경계 위, 아직 남아 있는 땅

눈은 도시에서 멀리 떨어질수록 더 오래 땅 위에 남아 있다. 며칠이 지나도 그 풍경이 지속되었다. 서울에서 벗어난 이곳 지축은 콘크리트와 아스팔트로 채워지지 않은, 순수한 땅이 아직 남아있기 때문이다. 도시의 중심으로부터 서서히 정복되어 가는 땅의 마지노선에 도착해 있는 셈이다.

도시와 자연이 만나는 경계선은 어딘가 존재하고, 나는 그 경계선에서 눈이 내린 풍경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강렬한 흑백의 세계가 되어서야, 비로소 땅에 대해 더 극명하게 생각하게 된다. 모든 땅을 인공적인 콘크리트 바닥으로 만들 셈이 아니라면, 어딘가에서 멈춰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멈춤을 잊고 말았다. 마치 우화를 보고 있는 듯하다.

그러고 보니, 큰 규모의 건물을 설계할 때면 땅이 마치 2차원 평면이라도 되는 것처럼 착각에 빠지곤 했던 기억이 난다. 그러다가 잠시 눈을 떼고 뒤로 물러나 바라보면, 땅 위에서 패턴 나누기를 하고 있었던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아, 지금 내가 뭘 하고 있었지?’ 퍼뜩 정신을 차려보면, 시간은 훌쩍 지나 있다. 시작부터 땅을 하나의 거대한 인공 판이라도 되는 것처럼 생각했던 것. 디자인이란, 어쩌면 눈앞의 것과 뒤로 물러나 바라보는 것 사이를 조율하는 작업일지도 모르겠다.

뒤로 물러난 채 종이 위에 대지를 바라보면, 눈앞에 ‘땅’이 떠오르곤 했다.

아직 이곳엔, 땅이 남아있다.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두려움과 사라진 후의 상실감은 아직 오지 않았으니까. 지금은, 땅 위의 눈을 만끽해야겠다.

흰 경계 위에서 창 밖을 바라본다. 생각에 잠긴 사이, 눈사람이 하나둘 마당 위에 늘어났다. 아이들이 눈 위를 뛰노는 모습을 보다가 동영상으로 기록을 남겼다. 다시 재생을 눌러보니, 마치 짧은 영화 같다.

마지막 장면, 누군가 눈 위에 누워 스노우엔젤을 만들기 시작했고, 모두가 그곳으로 몰려들었다. 영화는 그렇게 끝이 났다.


기억과 감각의 길을 걷다

눈을 따라 걷는 짧은 영화는

이곳에서 끝이 난다.

창을 닫고,

다시 원래의 계절과

나의 시간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겨울은 언제나 우리 곁에 있다.

지구 반대편에도,

기억의 한가운데에도.


낯선 풍경과 오래된 기억을 지나
숲 속을 걷고
빛 안에 머물고
눈 위를 조용히 지나왔다.

우리는 같이 걸었다

이야기의 길을.


이제 같이 걷는다.

물의 길을,

흐름의 감각을 따라
젖은 땅의 숨결 위를
조용히,

그러나 분명히

함께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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