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걸은 힘으로 일을 하고 있는 건데요.
"소령, 걷지 좀 마. 그래서 자꾸 아픈 거 아냐?"
월요일 아침 부서 회의 시간이었다. 부장님이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주말에 뭐 했냐는 질문에 답한 참이었다. 도대체 왜 자꾸 걷느냐고. 그런 거리는 차를 타고 가는 거라고. 몸도 약하면서 왜 자꾸 무리를 하냐고.
그즈음의 나는 '걷기'라는 새로운 취미생활을 즐기는 중이었다.
2007년, 입사 2년 차. 회사는 나를 잘 드는 연장으로 여겼고, 출근 시간은 정해져 있었지만 퇴근 시간은 알 수 없는 삶이 계속됐다. "과장급 사원" 같은 호칭이 인정이라 착각하고, 내 이름 앞에 주어지는 모든 일에 최선을 다했다. 단기간에 엑셀의 달인이 됐고, 다양한 회의에 불려 다녔으며, TV 다섯 대 쯤은 거뜬히 대차에 실어 혼자서도 능숙히 끌고 다녔다.
매일을 바쁘게 살다가 주말이 되면 마음이 허했다. 어릴 때부터 가만히 집에 있는 건 적성에 안 맞았다. 대학 때는 아파서 일어나지도 못하고 누워 있다가, 밤 9시에 침대를 박차고 일어나 명동까지 간 적도 있다. 하루를 통으로 집에서만 보낼 수 없다는 게 이유였다. 회사원이 되고 일상이 단순해졌다. 회사, 집, 회사, 집. 그 와중에 쉬는 날도 무언가로 채워야겠는데 딱히 할 게 없었다. 그게 내가 걷기 시작한 이유다.
처음에는 집 앞 양재천을 걸었다. 시간이 날 때마다 편한 옷에 운동화 차림으로 나섰다. 나무와 물이 조화를 이룬 도시의 천은 일상 밖 공간이 필요한 이에게 딱 맞았다.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길을 걸으며 물도 보고 건물도 봤다.
지방에서 올라와 어릴 적 로망인 서울에 살면서도, 어린 날 철없이 꿈꾸던 많은 것들이 현실이 되지는 못했다. 한강뷰 아파트라든지, 아침저녁으로 한강에서 산책하는 일이라든지 하는. 양재천을 걷다 보면 닿지 못할 현실이 하나 더 보였다. 그건 타워팰리스였다. 작은 빌라 원룸에 전세로 사는 입사 2년 차 지방 출신 사회초년생에게 타워팰리스는, 멀고 먼 세계였다. 예쁘게 반짝이는 성에 입성한 이들이 내뿜는 불빛에 위화감도 느끼지 못할 만큼 먼 세계. 그저 좋았다. 걷다가 만나는 화려하고 반짝이는 그 건물이.
그러다 양재천을 떠나 도심을 걷기로 마음먹었다. 이유는 내가 사는 세상을 알고 싶어서. 대학 시절 명절에 고향 가는 기차를 놓칠 뻔한 적이 있다. 신촌과 서울역은 거리가 멀지도 않은데, 명절을 앞둔 도시에는 차가 너무 많았다. 버스는 주차장이 된 듯한 길 위에 서 있은 지 오래였다. 가만히 앉아있다가는 절대 서울역에 닿을 수 없다. 그걸 인지하자마자 외쳤다. "아저씨, 문 좀 열어주세요." 내리자마자 뛰었다.
내린 곳이 강북 삼성병원 앞이었으니 서울역까지 뛰는 건 불가능한 일. 하지만 앉아서 감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릴 수는 없었다. 그저 방향만 보고 뛰다 보니 시청역이 나타났다. 기차 출발 시간 10분을 남긴 시간이었다. 미친 듯이 뛰어 내려가 바로 지하철을 타서 서울역에 내렸고, 기차 출발 직전에 타는 데 성공했다. 숨을 고르고 보니 뛰어 온 길이 새삼스럽게 보였다. 강북삼성병원 앞에서 골목을 따라 뛰면 시청역이 나오는지 그날 처음 안거다. 내게 익숙한 지점을 잇는 길을 그간 모르고 살았다는 자각.
그날이 문득 떠올랐다. 대학을 졸업하고 회사에 들어가면서 근거지를 강북에서 강남으로 옮겼다. 강남의 스폿 몇 군데만 점으로 알 뿐 지리에는 여전히 무지했다. 그래. 걸어보자. 걸으면서 지리를 파악해 보자. 마음먹었다. 집은 양재, 그날의 목적지는 삼성동 코엑스. 코엑스에 영화 약속이 있는 날이었다. 편한 옷에 운동화면 OK. 약속 시간 한 시간 30분 전에 나와 걷기 시작했다. 영화를 다 보고서 다시 걸었다. 이번에는 집을 향해서.
한 시간이 넘게 걸어도 생각처럼 피곤하진 않았다. 오히려 자꾸 에너지가 생겼다. 걷다가 목마르면 편의점에 들어가 물을 한 병 샀다. 가벼이 물 마시며 걷다 보면 여행지에서 새로운 동네를 돌아보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그만큼 낯설었던 거지. 아무 약속이 없는 날에는 양재를 출발해 강남까지, 신사까지.. 목적지를 정해 걸었다. 도착하면 마음에 드는 카페에 앉았다가 돌아오곤 했다.
적다 보니 이상하긴 하네. 사람들이 도대체 왜 걷느냐고 자꾸 물었던 이유를 알겠다. 부장님은 걸어 다닐 힘으로 일을 하라고 했었지. 자꾸 걷고 또 아프지 말고. 하지만 그때의 나는 걸어서 아팠던 적은 없다. 그렇게 걷고 와서 출근을 못 한 날도 없었고.
오히려 자꾸 걸어서 몸과 마음 건강히 출근할 수 있었다. 요즘처럼 지도 앱이 잘 되어있지 않던 시절, 그저 방향만 잡고 하염없이 걷다 보면 복잡한 일도 단순해졌다. 24시간 돌아가는 머리도 식힐 수 있었다. '오늘도 이만큼' 목표를 달성한 뿌듯함도 얻을 수 있었다. 무엇보다 눈에 들어오는 풍경이 좋았다. 서울에 살면서도 아직 서울 사람이 아니었던 내가, 조금씩 더 서울 사람이 되는 기분이었다.
하루 24시간 중 16시간을 회사에서 보내면서 나는 어떻게 하면 일을 더 잘할 수 있을까만 고민하는 기계였다.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그곳에서 내놓지 못하는 마음을 주말에 걸으면서 길에 뿌렸다. 서울 한복판 교통체증 옆을 걸으면서도 이상하게 상쾌했다. 사람 사는 동네에 발 딛고 서 있다는 감각 때문이었을까.
여하튼, 그때의 나에게 걷기는 취미였고 위로였다.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는. 그로부터 20년가량이 흐른 요즘은 도심을 걷고 뛰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은 이해할까? 도시를 걷는 마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