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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 아닌 탕진이라면 그만, 뜨개.

뜨개라는 세계

by 쏘냐 정

뜨개의 시작은 중학교 때. 학교 앞 문방구에서 산 털실과 대바늘에서 시작됐다. 엄마에게 기본 뜨기만 배웠고, 쭉 앞 뜨기로만 목도리를 만들었다. 아무 생각 없이 뜨다 보면 목도리가 완성되는 게 좋아서 겨울이면 뜨개가 생각났다. 공부로 바쁜 고3을 건너뛰고 대학에 가서도 겨울엔 목도리를 떴다. 풋풋하게 연애하던 시절엔 남자친구에게 선물도 하고.


그땐 인터넷 커뮤니티나 강의가 많지 않았다. 앞 뜨기로 만든 목도리에 만족하던 나는 굳이 오프라인 선생님도 찾지 않았다. 대학 근처 시장에 뜨개방이 있었는데, 연세 있는 분들의 사랑방 같아 보여 관심을 두지 않았다. 솔직히 목도리 외의 뜨개 소품은 내 취향도 아니었다.


그러다 뜨개의 새로운 세계에 발을 들였다. 설명하자면 복잡한 인연의 고리 몇 개를 건너 알게 된 취향이 확고한 친구 A. 그 친구 취미 중 하나가 뜨개였고, 나와는 다르게 하나를 파도 깊고 풍부하게 들어가는 스타일이었다. 어느 날 보여준 꽈배기 무늬 목도리에 반해 가르쳐 줄 수 있나 물어보면서 뜨개라는 내 취미는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게 된다.


"안국동에서 만나요." A가 알려준 카페에서 실과 바늘을 들고 만났다. 뜨개가 딱 어울리는 빈티지하고도 아담한 카페였다. 거기에서 뜨개 패턴과 도안을 처음 접했다. 가장 만들고 싶은 꽈배기 패턴, 조금 더 간단한 바둑판과 사선 패턴. 알고 보니 조금 귀찮아서 그렇지 어렵지는 않았다. 그날부터 내 목도리엔 패턴이 생겼다.


첫째 어릴 때 만든 올리브 컬러 어린이용 목도리, 꽈배기 세 개가 들어간 패턴. 배경의 브라운 컬러 목도리는 고급 양모 실로 패턴 없이 앞 뜨기로 만 뜬 내 목도리.
나를 위해 뜬 사선무늬 목도리. 길고 길어서 세 번씩 두를 수 있는 스타일.
결혼 전 남편에게 선물한 검은 컬러 꽈배기 무늬 목도리.

패턴을 넣으려면 코 수를 잘 계산해야 한다. 뜨개질은 왔다 갔다 하며 앞 뒤를 번갈아 뜨는 작업이라서 홀수와 짝수 줄의 작업이 반대가 된다. 앞뜨개만 할 때와는 다르게 주의를 기울이면서 해야 실수가 생기지 않는다. 귀찮은 일이 분명한데, 완성한 결과물을 보면 다음 작품도 결국 패턴을 넣게 된다. 대신 조금씩 요령을 부렸다. 코 수는 무조건 짝수 개로, 짝수 줄이든 홀수 줄이든 같은 규칙을 가지도록. (앞 뜨기 세 개, 뒤뜨기 세 개만 무한 반복한다든지.) 꽈배기를 하고 싶다면 여러 줄 말고 중간에 딱 한 줄 정도로.


드라마 <미지의 서울>에서 미지가 뜨개는 명상과 같다며 우울에 빠진 호수에게 권한다. 나의 뜨개도 그랬다. 생각 없이 손만 놀리면 되는 작업이 나에게는 명상이었다. 그러다 패턴이 들어가면서 머리도 써야 하는 작업이 되었다. 덕분에 다른 생각할 틈은 없었지만 내가 즐기던 멍 때리기 명상은 할 수 없게 되었다. 언젠가부터 부담 없는 취미라기보다 맘먹고 하는 일이 되었다. 예쁜 목도리가 좋아 계절도 가리지 않고 계속 목도리를 만들어 내긴 했지만 말이다.


'부담 없는' 취미가 어려워진 건 패턴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A가 내게 알려준 건 패턴만이 아니었던 것. 그녀는 나를 뜨개 실의 세계로 인도했다. "지금 이 실 할인해요." "이 실 구하기 어려운데 지금 입고됐네요." 하면서 가끔 (자주?) 보내주는 구매 링크는 언제나 매력적이었고, 나는 매번 구매 버튼을 눌렀다. 몇 번 하고 나니 직접 실을 고르는 단계에 올랐고, 실을 고르는 눈도 저기 머리꼭대기까지 높아졌다. 이제 문방구에서 사서 쓰던 아크릴 실은 실로도 보이지 않았다.


티베트 산 양모, 알파카, 캐시미어, 실크.... 등등 소재가 좋아지면 감촉이나 보온성이 좋아졌다. 직접 만져보고 나면 어차피 애써서 뜨는 거 좋은 실로만 뜨고 싶어졌다. 실을 고르고 목도리 한 개 분량을 장바구니에 넣고 나면 어느새 십만 원은 훌쩍. 이것저것 고르다 보면 몇십만 원이 되는 날도 있었다.

대바늘 뜨기와 코바늘 뜨기를 결합해서 만든 실크 목도리


너무 가는 실이 사고 싶어졌을 땐, 대바늘보다 코바늘 뜨기가 낫겠다 싶어 코바늘 뜨기를 독학으로 익혔다. 책을 한 권 사서 한 땀 한 땀, 컵받침도 만들고 목도리에 접목하기도 했다.


떠도 떠도 자꾸 뜨고 싶었다. 내 목은 하나인데, 목도리는 스무 개가 넘었다. 아무리 추위를 많이 탄다지만 더 이상은 필요하지 않아. 뜨개라는 취미를 포기한 건 통제할 수 없는 나 때문이었다. 목도리가 더 필요하진 않아도 만들고는 싶어서, 주변에 목도리가 필요한 사람을 찾아 선물하기도 여러 번. 이러다 취미 때문에 탕진할 판이었다. 그래서 뜨개의 세계에서 나오기로 했다.


그러다 다시 만난 게 루피망고. 어느 연예인이 루피망고 실로 뜬 모자를 쓰고 나오면서 통통하고 귀여운 실이 대유행을 했다. 보자마자 불쑥 튀어나온 뜨개 욕망을 누를 수 없어 실을 샀다. 실을 받자마자 뜬 세 개의 모자와 한 개의 워머. 거기서 멈추지 못하고 추가 구매한 핑크 실로 뜬 모자들... (지금은 모두 정리하고 없어서 사진은 당시 블로그에서 가져왔다.)

다시 시작하니 얼마나 재밌던지. 게다가 이 실은 두껍기까지 해서 육아하면서도 하루에 모자 세 개는 뚝딱 만들어낼 수 있었다. 다시 한번 쏘냐의 뜨개 공장이 가동됐고, 집에는 필요 이상의 모자가 쌓였다. 남는 모자는 여기저기 선물하기 시작했고, 실 구매로 꽤 많은 돈을 탕진하고 나서야 그만둘 수 있었다.


얼마 전에 옷장 정리하면서 차마 보내지 못했던 목도리들을 몇 개 더 기부했다. 이제 위의 사진만큼만 딱 남았다. 언젠가 또다시 뜨개에 홀릭하는 날이 올까? 다시 뜨개를 시작한다면 패턴 뜨기 말고 아무 생각 없이 멍하게 앞 뜨기만 반복하는 작업을 하고 싶다. 역시 뜨개가 명상이었던 날이 더 좋은 것 같아서. 패턴을 넣어 예쁜 목도리를 만드는 날은 명상보다 욕심이 컸다. 더 예쁜 걸, 하나 더 만들고 싶은 욕심. 이번 글을 쓰면서도 마음이 동하지 않는 것 보니 뜨개는 이미 넘치도록 했나 보다. 내 열정은 딱 거기까지였고.


덧. 혹시 뜨개의 세계가 궁금하다면 추천하고 싶은 가게. 바늘이야기.

https://www.ban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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