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 오신 날 고창 선운사 아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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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우리 가족이 사전 계획 없이 출발한 첫 여행이었다. 그저 짐을 싸서 차에 싣고 출발. 목적지는 많이들 찾는 곳인 만큼 숙박업소도 넉넉할 거라 생각했다. "설마 방 하나 없겠어?" 우리의 목적지는 고창 선운사. 사실 산에 관심이 없는 나는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하지만 아빠는 말했다. 꽤나 유명한 절이라고.
선운사로 향하는 길은 내내 참 평화로웠다. 가까워질수록 창밖의 녹음은 더 짙어졌다. 회사 스트레스로 집나갔던 감성마저 다시 돌아오게 하는 풍경. 산이 주는 힐링을 온몸으로 느꼈다. 참 이상한 노릇이었다. 나무로 둘러싸인 산 한가운데서도 느끼지 못한 상쾌함이 차 안에서 이렇게 강하게 느껴지다니. 차창을 사이에 두고 바라보는 초록의 광경에서 나는 이전에 알지 못했던 산의 마력을 경험하고 있었다.
한결 밝아진 표정으로, 한결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선운사에 도착했다. 주차장에 차를 대고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산사까지 가는 길 모든 곳이 아름다웠다. 도시에서 맡을 수 없었던 산내음이 좋았다. 그것은 자연의 향기였다. 마음이 뻥 뚫리는 시원함. 산을 멀리했던 탓에 꼭대기까지 오르진 못했지만 그대로도 충분했다.
주위를 둘러보니 이 자연을 즐기러 온 사람은 우리뿐만이 아니었다. 많은 이들이 선운사를 향하고 있었다. 그렇게 도착한 그곳에는 색색의 등이 예쁘게 달려있었다. 그리고 알았다. '아, 부처님 오신 날이지.' 우리 가족은 모두 크리스천. 부처님 오신 날은 그저 쉬는 날 중의 하루라 생각하는 이들이었다. 부처님 오신 날에 절을 찾은 것도 처음이었다. 처음 보는 풍경들을 그저 관광하듯 둘러보았다. 그때까지도 몰랐다. 오늘이 '부처님 오신 날'이라는 사실이 우리에게 어떤 선물을 선사할지.
자연이 주는 힐링을 맘껏 느끼고 맛집을 찾아 식사도 했다. 날이 어둑해질 무렵, 오늘 묵을 곳을 찾아보기로 했다. 선운사 아랫마을에 숙소가 여럿 있는 것도 이미 확인했었다. 숙소가 모여있던 그곳으로 차를 몰았다. 그리고 첫 번째 숙소에서 우리는 '부처님 오신 날'의 위력을 알고야 말았다. "남은 방이 하나도 없어요."
그렇다. 오늘은 부처님 오신 날이고, 이 곳은 한국에서 손꼽히는 사찰 중 하나였던 것이다. 대웅전이 보물 제290호로 지정되어 있는 곳. 보물 제279호인 금동보살좌상, 보물 제280호인 지장보살좌상을 품고 있는 곳.
부처님 오신 날에 당연히 절엔 사람이 많을 거라는 생각은 했지만, 그것을 숙소에까지 연결하지 못한 우리의 불찰. 여기서 또 한 번 우리는 "아!!" 해야 했다. "오늘 부처님 오신 날이지!!" 큰일이다. 우린 모두 흩어져 방을 찾기 시작했다. 그래도 하나쯤은 있겠지. 하지만, 이 희망은 곧 사라졌다. 정말로 빈 방이 하나도 없었다.
어쩌지? 우리는 그 거리를 떠나지 못하고 이리저리 기웃거렸다. 그때 한 모텔의 직원이 희소식을 전했다. "방금 체크아웃한 방이 하나 있어요." 오. 체크아웃? 이 밤중에? 왜인지는 모르지만 참 고마운 사람이군. "그럼 그 방 주세요." 묻지도 따지지도 않았다. 어떤 방이든 넷이 누울 수만 있으면 되지.
직원이 안내해 준 방은 생각보다 넓었고 딸려있는 화장실도 깨끗했다. 기분 좋게 짐을 풀고 있는데 아빠가 난감한 목소리로 말했다. "문이 제대로 닫히질 않아." 아. 그랬던 것이다. 허름한 모텔. 문을 꽉 닫을 수 없는 방. 이 밤 중에 체크아웃한 그들에게도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뭐. 그렇다 해도 어쩔 수 없다. 평소에 하지 않던 등산을 한 탓에 너무너무 피곤했다. 그저 지금 당장 내 몸 뉘일 수 있는 이곳을 문이 안 닫힌다는 이유로 포기할 수는 없다.
아빠가 문 앞에 자리를 잡았다. 그렇게 그날 나는 꿀잠을 잤다. 아마도 걱정 많고 예민한 부모님은 편히 주무실 수 없었을 테지만.
계획하지 않았던 여행은 또 하나의 추억을 남겼다. 생각해보면 문이 없는 것도 아니고 문이 꽉 닫히지만 않았을 뿐. 대수냐 싶기도 하지만. "설마 어디 방 하나 없겠어."라는 생각을 처음으로 실행했던 그 날. 숙소 예약 없이 출발한 첫 여행에서 만난 "숙소 없음"의 기억은 두고두고 생각나는 에피소드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