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와 나의 취향 차이
우리 엄마와 아빠는 사내 산악회에서 사랑을 키웠다. 나를 낳고 나서도 산을 오르는 걸 좋아하셨다. 그리고 보니 지금도 산 밑에 살고 계시고 자주 산을 오른다. 그 누구보다 튼실한 종아리를 가지고 있는 내게 아빠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우리 소령이 다리가 튼실한 건 어릴 때 산을 많이 다녀서 그래." 아빠는 뿌듯한 목소리로 이야기했지만 나는 그저 원망스럽기만 했다. 여자아이에게 튼실한 종아리란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것. 그 튼실한 종아리 덕에 나는 학창 시절 내내 긴 바지만 입었다. 학교 갈 때 입는 교복을 제외하고는... 아마 우리 학교에 바지 교복이 있었다면 나는 바지를 선택했을 것이다.
'이야, 이래서 아빠가 산을 좋아하는구나.' 창 밖을 보며 나는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달리는 차 안이었다. 고창 선운사를 찾아가는 길. 입사 2년 차. 당시 나는 완벽한 번아웃 상태였다. 대학을 졸업하고 대기업 마케팅팀에 입사를 했다. 바쁘고 힘들기로 소문난 회사였다. 한 번도 내일이 오늘보다 편할 거라는 생각은 해본 적 없는 나였다. 각오하고 시작했지만 이건 상상 이상이었다.
1년 차, 나는 신입사원이었지만 신입일 수 없었다. 나의 첫 부서는 그 해 막 신설된 부서였다. 회사 내 마케팅팀 개편을 하며 새로 생긴 곳. 이 부서는 '처음'이라는 포지션에 걸맞게 반 이상이 신입으로 채워졌다. 나 같은 진짜 신입. 완전히 다른 일을 하다가 마케팅팀으로 전배 온 마케팅 신입. 다른 회사에서 이직한 경력 신입 등등. 이들이 모여 마케팅팀에 새로이 만들어진 부서 업무를 지금 당장 눈에 보이는 것으로 만들어야 하는 상황. 모두가 전력질주를 해야만 했다. 신입이라는 변명 따위, 이제 1년 차라는 변명 따위. 그 어디에도 내놓을 수가 없었다.
다음 해, 인력 보강은 이루어졌지만. 그들 역시 신입이었다. 1년 먼저 온 선배로서 신입인 차장님, 신입인 과장님, 신입인 대리님의 적응을 도와야 했다. 다른 조직에 있다가 우리 부서로 전배 왔던 한 대리님. 내 자리 옆 파티션에 기대어 이런 말을 건넸었다. "소령 씨는 여기에서 어떻게 2년을 버텼어?" 인사팀으로 입사해 쭉 그곳에 있다가 우리 부서로 전배 왔던 또 다른 대리님은 이런 말을 했다. "나 이 회사에서 5년이 넘게 일했는데, 이 회사 안에 이렇게 힘든 곳이 있는 줄 몰랐어요." 결국 그분은 우리 부서를 떠났다.
그 안에서 꿋꿋이 버티던 이들은 어벤저스가 되었다. 나 역시 그중의 하나였다. 업무 능력이 문제가 아니었다. 효율적인 방법이든, 비효율적인 방법이든, 일단 일은 되도록 해야 했다. 부서장님은 늘 외쳤다. "안 되면 되게 하란 말이야." 그때는 그가 원망스럽기만 했지만 지나고 보니 이해도 된다. 당시 부서의 포지션을 생각하면 되는 것만 되게 해서는 도저히 부서의 존재가치를 증명할 수 없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이 조직 개편의 최대 실험이 우리 부서의 신설임을 지나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해내는 일에 익숙해져 갔다. 영어를 무서워하는 나지만 피할 수 없어 영어 PT를 하고 영어 통화를 하고 영어로 회의를 했다. 사원이기 때문에 주관하지 못할 일은 없었다. TF의 장으로 사장님께 보고되는 프로젝트를 이끌어 본 경험도 사원 때 제일 많이 했다. 관계 부서와의 회의에서 타 부서 부장님을 상대하는 일도 익숙해졌다. 점점 능구렁이가 되어갔다.
"이 업무는 그쪽 부서 일이잖아. 만약에 그쪽 때문에 이 일이 미뤄지면 어떻게 책임질 거예요?"라고 물으면 "에이, 부장님 부서에서 맡은 일도 마찬가지잖아요. 일정에 지장을 줄 수 있는 일은 모든 부서에 다 있는 거 이제 저도 알아요. 뭐, 만약에 저희 부서 업무 때문에 미뤄진다면 제 월급을 까시든지, 아님 제가 공장에서 뛸게요." "OK. 그럼 일정 늘어지면 정 소령이 월급을 까는 걸로 하고 진행." 이렇게 아주 화기애애(?)하게 회의를 끌어갈 줄도 알게 되었다. 믿기지 않겠지만 실제로 상당히 화기애애했다. 저 대화는 모두가 허허 웃으면서 진행되었으니까. 나중엔 우리 부서 다른 과장님 담당 회의에도 지원을 위해 들어가게 되었다. 바로 저런 대화를 위해서. 관계부서의 공격을 웃으면서 대응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 중의 하나가 나였기에. (물론 나 외에도 여럿 있었다. 앞에서 얘기한 그 어벤저스들.^^)
하지만 익숙해진다고 해서 쉬워지는 것은 아니었다. 사람들 앞에서는 더 여유롭게 웃을 수 있게 되었지만 돌아서면 더 무표정해졌다. 내가 어디에 서있는지조차 알 수 없는 날들이 계속 이어졌다.
다시 차 안으로 돌아오자면 이런 전쟁통 속에서 겨우 틈이 생긴 연휴였다. 부처님 오신 날이 겹쳐 주말까지 3일을 쉬던 날. 완전히 번아웃되어 감정마저 사라진 채로 나는 무조건 고향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나를 본 아빠가 말했다. "우리 어디라도 가자." 영혼이 사라진 내 모습이 부모님의 눈에 너무 잘 보였던 것이다.
그렇게 떠난 고창 여행. 우리의 목적지는 선운사였다. 5월의 산사. 선운사를 향하는 길. 창밖엔 한국산 특유의 고즈넉함이 살아있는 초록의 산들이 이어졌다. 뒷자리에 앉아 아무 생각 없이 멍하게 창밖을 바라보던 나의 눈에 초록이 훅 들어왔다. 아, 싱그럽다는 게 이런 거구나. 그리고 그다음 순간, 빛이 들어왔다. 내 마음속으로. 감정마저 사라졌던 가슴에 꼬물꼬물 새싹이 피어나는 느낌이었다. 답답하던 마음에 시원한 탄산수를 흘려 넣은 그런 느낌이었다. 잔잔히 빛이 퍼져나갔다. 어느샌가 나는 나도 모르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때 알게 되었다. 초록이 주는 힐링이 무엇인지를. 왜 사람들이 산을 찾는지를.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치유의 힘이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어릴 때부터 고민이 있을 땐 바다를 찾던 나였다. 무엇을 숨겼는지 알 수 없는 그 바다의 깊이가 좋았다. 무엇을 꺼내놔도 안전할 것 같다는 생각을 했었다. 답답할 땐 새벽에 해운대를 찾아 일출을 보곤 했다. 그 해가 나에게 무언가를 주는 건 아니지만 내 마음은 다시 열정으로 채워지곤 했었다. 마음을 만져주는 자연은 바다가 최고라고 믿었다. 근데 이제 안다. 바다에게는 바다의 위로가, 산에게는 산의 위로가 있다.
사실 여행에 대한 글을 시리즈로 쓰다가 이 고창 여행을 떠올린 데는 다른 이유가 있었다. 그날 밤의 숙소와 관련된 에피소드. 그런데 쓰다 보니 다른 이야기로 이미 너무나 길어져버린 글. 계획대로 되지 않은 고창의 밤에 대해서는 내일 다시 이어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