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조금, 5분 글쓰기도 조금
바람
스물한 살 때쯤이던가? 바람이 몹시 부는 봄날이었다. 황사바람이 휘몰아치는 저녁 버드나뭇잎이 미친년 머리카락처럼 휘날리고 나는 어쩐지 눈물이 날 것만 같은 토요일이었다. 당장 기차를 타고 남자친구를 만나러 가고 싶었다. 대구에서 김포는 아득하게 멀었고, 답사라는 거짓말을 지어내기에는 터무니없는 시간이었지만, 당장 오라는 문자를 받았다면 기어이 동대구역에 갔을지도 몰랐다. 항상 불안했다. 그가 나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을까 봐, 사랑한 적이 없을까 봐, 어느 날 갑자기 전화를 받지 않을까 봐. 기쁨은 찰나였고 불안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걸 사랑이라 부를 수는 없을 것 같았지만, 다른 단어를 찾지 못했다. 사랑이 아니면 집착이라고 밖에는. 집으로 가는 버스를 몇 개나 보내면서 돌풍 같은 모래바람을 맞으면서 길 건너 약국 간판을 노려보면서 서 있었다. 어째서 이렇게 슬픈 걸까, 고민하면서.
비 오는 날
가을 방학의 노래 가사 중에 "비 오는 날엔 모르는 노랠 듣고 싶진 않아." 하는 부분이 있다. 정바비 때문에 더 이상 듣기 힘든 노래가 되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들을 때마다 따라 부르는 노래. 계피의 목소리는 아름답고 아름답고... 아침에 비가 조금 내려 다행이었다. 아침에 늘 밍기적대는 여름에게 소리를 꽥꽥 지르고 내보냈는데, 1층에서 비가 온다며 전화가 왔다. 우산을 챙겨 들고 내려가 다정한 얼굴로 보낼 수 있었다. 등교 알림을 보니 지각. 요즘 몇 분 지각하는 정도로 학교에서 별로 혼나지 않는다는 걸 잘 알지만, 1학년이니까 다 봐주는 분위기이겠지만, 지각하는 아이를 보면 한숨이 나온다. 코앞에 살면서 무슨 지각이니, 나 때는 말이야... 하는 소리가 나올 뻔한 아침. 종일 습하고 더운 날씨였는데 괜히 흐린 하늘에 속아 더운 옷을 입고 걸어 다닌 낮. 봄 마켓에서 만든 접시를 찾으러 온 맘인더가든에서 넷플릭스 애니메이션 뿅뿅 소리를 들으며 쓰는 오늘의 글.
소설
소설만 읽었다. 국어 교과서와 학급 문고로 시작한 독서 생활은 한국 현대 문학에 치중되어 있었다. 처음에는 이상과 김동리를 좋아했다. 그러다 김승옥을 좋아하게 되었고 그다음에는 이문구의 "관촌수필"에 푹 빠졌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한결같은 소설들을 사랑했고, 음침해빠진 무라카미 류의 19금 소설은 비밀리에 탐독했다. 은희경 소설도 빠짐없이 읽었다. 힘들 때는 아가사 크리스티의 추리 소설에 빠져 있기도 했다. 소설을 읽을 때마다 소설을 쓰고 싶었지만 터무니없는 꿈처럼 느껴졌다. 소설 속의 주인공처럼 살고 싶은 마음이 소설을 쓰고 싶은 마음보다도 훨씬 컸다. 현실에 좀처럼 발을 붙이고 살아가기 힘든 성격이라는 것을 소설을 읽으면서 받아들였다. 꽤 긴 시간 새로운 책을 읽지 않았다. 끊임없이 "관촌수필"만을 읽었다. 읽을 때마다 같은 부분에서 웃고 울었다. 이걸 지금도 "공산토월"을 떠올리면 눈물이 날 것 같은데, 내 안에 있는 시골사람을 끝없이 상기시키는 소설이 분명하다.
아침밥
고등학교 때에는 7시까지 학교에 가야 해서 당연히 아침밥을 챙겨 먹지 못했다. 겨울이면 버스정류장 앞 편의점에서 따뜻한 레쓰비 캔커피를 사서 손을 데웠는데, 다른 계절은 잘 떠오르지 않는다. 슈퍼에 파는 200원짜리 도넛이나 약과를 아침 간식으로 챙겨 먹은 것 같다. 아침자습이 끝나고 20분 남는 시간에 점심도시락(급식은 2학년 때 시작했다)을 까먹는 아이들도 있었지만, 점심이나 저녁을 매점에서 사 먹는 일은 번잡스럽기도 했고 사치스럽다 여기기도 했다. 대학 때는 툭하면 오전 수업을 빠트렸으니 아침밥은 엠티 갔을 때나 시골집에 갔을 때 먹는 거였고, 졸업 후 학원에서 일하면서부터 오전에 일어나는 일 자체가 드물었다. 아침밥은 아이가 태어난 2018년 여름부터 다시 나에게 찾아왔다. 아침 8시에도 배달하는 맥모닝을 사랑하게 되었다. 우유를 먹지 않아 평생 관심 없던 시리얼을 베지밀이나 아몬드브리즈에 말아먹기 시작했다. 일어난 지 1시간이 지나면 배가 고파 견딜 수 없게 되었다. 자기 전에 아침거리를 준비하는 일도 잦아졌다. 한 마디로 부지런해졌다.
그러나 남편이 아침 7시에 돌아와서 끼니를 찾는 야간 근무는 정말이지 싫다. 빵이나 샐러드처럼 간단한 걸로 때우지 않고 죽으나 사나 밥을 퍼먹어야 하는 고집스러운 식욕을 꺾지 않는 남편이 밉살스럽다. 남들은 다 먹는다는 회사밥을 왜 먹지 않는지... 기승전 남편욕인 아침...
한동안 비교적 편한 마음으로 차리던 밥상, 소고기 이슈(?) 이후로 다시 하기 싫어졌다. 그래도 꾸역꾸역 밥이야 차리지만, 어제도 글로 쓰기 초잡시러운 밥 관련 다툼이 있었기에 더더더 열불을 냈다. 그럴 필요가 없다는 걸 아니까 화도 덜 났으면 싶은데, 그거야말로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오늘 유진목 시인님 북토크가 아주 정말 매우 몹시 좋았다. 이 느낌만 안고 자야겠다. 내일의 밥은 내일 걱정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