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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와 수레국화의 계절

어린이와 나란히 눈병에 걸렸지만

by 원효서

화요일, 시장에 가면


화요 장터에서는 어김없이 과소비를 한다. 떡볶이와 닭강정까지 사서 어른 끼니를 때울 때보다는 덜 사는 편이지만, 오늘도 많이 샀다. 여름이 좋아하는 염통꼬치(6천 원어치를 사서 거의 혼자 다 먹는다)와 종이컵에 든 동글동글 도넛 3천 원. 기지떡과 쑥떡을 샀더니 6천 원이다. 채소가게에서 오이와 당근, 쪽파와 양배추를 담으니 9천 원, 가지 두 개를 집어 만 원을 맞췄다. 이제 너무 무거워진 짐을 대충 에코백에 쑤셔 넣으면서 큰 가방을 가져오지 않은 자신을 잠시 탓했지만, 별 수 없는 일이지. 손두부 한 모와 콩나물은 넣을 곳이 없어 손가락이 아프도록 잡는 수밖에. 도넛을 콕콕 찍어먹는 아이 손목에 꼬치가 든 주황색 비닐봉지를 걸어주었다. 장터 뒤쪽 경치 좋은 산책길을 걸어 올라가다 도넛이 든 종이컵에 곤충 한 마리가 착지, 아이는 돌고래같은 비명을 지르며 눈물을 뚝뚝 흘렸다. 날벌레를 털어내고 남은 도넛 두 알을 버리지 않고 야무지게 먹는 걸 보면, 그렇게 소리 지를 건 또 무어냐 싶지만, 빨간 볼에 눈물을 달고 오물오물하는 얼굴이 귀엽고 우스웠다.


집으로 오는 길에 나무그늘이 근사한 아파트 벤치에서 꼬치를 먹기로 했는데, 곤충 소동으로 바로 집에 왔다. 나는 거기서 한숨 돌리면서 쉬고 싶었는데... 채소를 고르는 일 외에는 내 선택이 하나도 없는 게 당연하지, 뭘. 채소를 정리하고 파스타 면을 삶는 동안 꼬치를 먹던 여름은 비눗방울을 불러 엄마와 함께 나가야겠다고 했다. 아휴, 한숨을 쉬면서 끌려 나와 벤치에 앉아 이러고 있다. 애 씻기고 저녁밥 해 먹고 나도 씻고 수업도 해야 하는데 말이다.

지난 주말 이모와 카페에서 노는 너


열중열중

결석


초3이나 초4쯤 할머니와 둘이 살던 시절, 생떼를 쓰다 결석한 적이 있다. 딱 요즘 같은 계절 아침, 어젯밤 숙제를 마친 산수책이 없어졌다. 책상과 티브이로 꽉 찬 단칸방에서 책이 어디로 간단 말인가? 가방을 뒤집어 털고 이불을 뒤지고 티브이 서랍장을 열어도 산수책이 없었다. 할머니는 빨리 학교에 가라고 성화였고 나는 신경질을 내다 소리를 질렀다.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옆방에 주인집 아들이 있어서 벽간 소음(?) 문제가 있었는데,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소리를 빽빽 질렀다.(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정말이지 나는 엉망진창인 어린이였다.) 할머니와 나는 "망할 년." "학교 안 간다고!" 하며 언성을 높이다가 등교시간을 놓쳤다. 머쓱하게 결석을 하고 집에서 빈둥거리다가 책상과 벽 사이에 펼쳐진 채 끼인 산수책을 찾았다. 하교시간쯤 동네를 어슬렁대다 같은 반 남자애를 마주쳤다. "아파서 안 왔나?" 하는 말에 "어... 아니... 그냥..." 우물쭈물할 때는 괜히 결석했다 싶었다. 저녁에 불같이 화를 내는 아빠에게 전화로 혼쭐이 나서 눈물콧물을 줄줄 흘리고는 사무치는 후회... 그 후로는 이런 식으로 결석한 적이 없었지 싶다.

밤중에 영화 <여행자의 필요>를 보았다. 이자벨 위페르가 계속 막걸리를 마셔서 참고참고 참다가, 그냥 눕지 못하고 와인을 한잔 마셨다. 노브랜드에서 장 보는 김에 산 저렴한 레드와인은 매력 없는 맛이었지만, 알코올이 그것뿐인 것을 어쩌랴. 한 잔을 채 다 마시지 못하고 어설픈 알딸딸함으로 잠자리에 들었다.


공을 들이다가 말았네

눈병에 걸린 아이와 그림일기 모임에 나갔다. 이모들의 열화와 같은 성원에 힘입어 여름은 그림을 6장이나 완성했다. 쿠폰으로 잔기지떡을 한 통 얻어 부지런히 먹었다. 어린이 성교육 책과 조찬클럽 소설, 김지승의 에세이를 번갈아 읽고 있다. 성교육책은 읽기 쉽지만 가르침에 따르기가 어렵고, 김지승의 에세이는 어렵지만 그만큼 아름다워서 따라 하고 싶다. 다와다 요코의 소설을 읽으며 "외국어를 제대로 배우고 싶다!"라고 속으로 소리 지르지만, 진지한 결심은 아니다.

여름이 그린 그림

인터넷 게시판에서 본 후기 덕분에 보고 싶어 하다가 잊은 영화 중 하나인 <샤인>을 보았다. 천재 피아니스트 이야기는 언제나 취향저격!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은 1번이 제일 좋았는데, 영화 덕분에 3번도 자주 듣게 될 것 같다.

누구냐면 엘르 패닝 ㅋㅋㅋ

너무나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엘르패닝을 힘 빼고 마음대로 그려보았다. 실은 한 장 힘주고 그리다가 완전히 말아먹어서, 다음 장은 될 대로 되라지! 하는 마음으로 대충 그렸다. 그래도 힘주고 망친 그림보다 훨씬 마음에 들었다.


동네에 있는 중학교 높은 담장 옆 바닥은 매년 이렇다. 촌스럽고 선명한 연두색 철망 너머로 흘러넘치며 피어나는 장미꽃잎이 바닥에 흩어져있다. 거의 시멘트와 벽돌이 차지한 틈에서 부지런히 얇은 잡초들이 자라고 말라간다. 잡초도감을 찾아봐도 바랭이인지 방동사니인지 아무래도 그것들은 아닌지 잘 모르겠다. 사진을 찍고 그리기 시작할 때는 의욕이 가득하지만, 매번 금세 지쳐 색이 희덕시그리해지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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