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라앉고 떠오르다
물속에서 바라보면 평영은 정말 아름답다.
여유롭고, 유연하다.
발을 차고 몸을 쭉 피면, 물의 요정들이 손을 끌어주듯 앞으로 미끄러지며 떠오른다.
글라이딩.
몸이 앞으로 나가면서 떠오르는 동안, 동작 사이에 간극이 생긴다.
그 성급하지 않은 우아함이 마음을 사로잡는다.
독일인들의 수영은 저게 운동이 될까 싶을 정도로 여유롭다. 물에 둥둥 떠서 앞으로 슥슥 미끄러져 가는 모습이 부러워 수영을 배워야지 했었다. 어릴 때부터 물을 유난히 좋아했고, 아빠가 부산 싸나이로 어릴 때부터 바다에서 놀던 가락을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해군이 되셔서, 바다 수영으로 다져진 '수영인'임에도 불구하고, 어찌 된 일인지 나는 제대로 된 수영을 배워본 적이 없다. 물에서 노는 걸 워낙 좋아했기 때문에 물에 뜰 줄이야 알았지만, 제대로 된 영법을 알지 못하니 물속에서 숨 쉬는 법을 몰랐고, 제대로 앞으로 쭉쭉 나가는 방법도 몰랐다. 독일에 온 후, 실제로 수영 강습을 신청하기도 했으나, "Anfänger(초급자)"라는 단어에 꽂혀, "Kraul(자유형)"이라는 단어를 놓쳤고, 그 말인즉슨 그 반은 초급자 반이 아니라는 뜻이었고, 환불도 못 받고 코스에서 쫓겨났는데, 때마침 코로나 기간이 겹쳐, 다행히 환불은 받을 수 있었다는 슬픈 에피소드가 살짝 끼어 있기도 하다. * 이곳은 한국과 다르게 자유형부터 시작하지 않고 평영부터 초급반을 시작한다.
지난여름, 막내의 수영 코스를 따라다니며, 막내 친구의 아빠에게 물에서 숨 쉬는 법을 배웠다. 그 아빠도 독일에 와서 독학으로 수영을 배웠다고 했다. 역시 독학한 사람이라 그런지 우리가 무엇을 무서워하고, 무엇을 못하는지 잘 알고 있었고, 그래서 꽤나 도움이 되는 지도를 받을 수 있었다. 사실, 어릴 때 수영을 배워 이미 몸에 그 동작이 익어버린 사람들은, "어? 이거 그냥 하면 되는데..." 한다. 수영을 못하는 우리는 아니, 나는 "그 그냥"을 어떻게 하는지 모르는 것이다. 그래서 독학으로 해본 분의 지도는 초심자의 고초를 잘 이해한 맞춤형이라 할 수 있었다. 덕분에 물속에서 숨을 쉴 수 있게 되었고, 도대체 제대로 되지는 않았지만 어찌어찌 수영(비슷한 것)을 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암만해도 내 수영은 어쩐지 허우적거리는 모양새였고, 발을 차고, 팔을 젓는, 그 박자를 알 수가 없었다. 그 여름이 지나고 뛰엄뛰엄이라도 수영 연습을 해 보았다. 그러다 어느 날, 허우적거리지 않고 물속에 떠 있는 나를 발견했다. 여전히 그 박자라는 것은 제 멋대로였지만, 독일인들이 보고, '쟤, 수영하는 거 맞아?'라는 의문은 들지 않을 정도는 된 것 같았다. 비밀은 물에서 뜰 수 있는 나 자신을 믿는 것!
물에 뜰 수 있었던 지는 어언 30여 년이 넘었는데, 이제야 물에 뜰 수 있다는 것을 믿을 수 있었다. 그것은 '유레카'의 순간이었다. "아, 참, 나 물에 뜰 수 있었지?" 물에 떠 있으면서도 물에 뜰 수 있다는 걸 믿을 수 없었던 건 마음 한켠에 남아있던 두려움 때문이었다. 그것은 아마도 계곡 물에서 튜브를 타고 놀다 물에 빠져 버린 찰나의 시간이 마음 한구석에 흔적으로 남아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빠지자마자 아빠가 건져주긴 했지만, 어린 내게 그 물은 영원처럼 깊었다. 너무 오래 걸리긴 했지만, 두려움을 넘어섰으니, 이제부터 인생의 반쯤은 진정으로(믿음이 있고, 없고의 차이는 어마어마하다) 물에 뜰 수 있는 인간으로 살 수 있게 되었다. 물에 제대로 뜰 수 있게 되자 조금씩 욕심이 생겼다. 그래서 대체 발차기랑 팔젓기는 언제 어떻게 한다는 거야? 물속에서 독일인들의 수영을 유심히 살펴본다. 사람마다 비슷한 듯 조금씩 다른데 저마다 너무 자연스러워서, 나도 저렇게 하고 있는 거 아닌가 착각하게 했다. 하지만 그녀는 달랐다. '아! 저게 제대로 구나!' 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 물속에서 저렇게 유려하고 아름다운 몸짓이 가능하다니, 감탄에 존경심이 절로 우러나왔다. 그녀처럼 아름다운 몸짓으로 물속을 가로지르고 싶었다. 그녀는 나의 수영뮤즈였다. 그녀를 목격한 후로는 제대로 된 수영에 대한 열망이 더더 강해졌다. 그래서 그 여름에 나에게 수영을 가르쳐 줬던 그 아빠처럼 드디어 나도 유튜브 영상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그전에도 수영 영상을 찾아보지 않았던 건 아닌데, 시기상조였던 것이 분명하다. 물에 허우적거리는 채로는 영상에 서 본 다리와 팔의 움직임을 만들어 낼 수 없다. 일단 물에 제대로 뜨는 것이 우선이었다. 물에 뜰 수 있게 되고, 열망이 강렬해져, 닥치는 대로 영상을 찾아보자 동작이 조금씩 이해되는 것 같았다. 물론, 실전에 가면 조금 달랐지만, 조금씩 희망이 보이기 시작한다.
12월부터 가라앉기 시작했다고 치면, 3개월 만에 서서히 떠오르고 있다. 아무리 평영이 동작 사이에 간극이 있다고 해도 이 정도 긴 시간은 아닐 텐데, 마지막 발차기 후, 아마 꽤나 깊이 가라앉았었나 보다.
2023년부터 쉼 없이 발을 구르고 팔을 저어 앞으로 앞으로 갔다. 정말이지 신나는 시간이었다. 연진이에게 복수하는 동은이보다 훨씬 신났을 것이다. 한 시대가 저물고 새로운 시대가 열리는 격변의 시간이었지만, 새 시대는 생각했던 것보다 더 나에게 잘 맞았고, 미지의 세계는 생각했던 것보다 덜 험악했다. 인생의 맥락이 바뀌었고, 바뀐 맥락 안에서 나와 가족 모두 적응이 필요했지만, 아이들은 이제 엄마 손이 덜 가는 정도가 아니라 집안일에 꽤나 도움이 될 만큼 컸고, 남편은 10년 만에 밖에서도 일하게 된 아내를, 두 팔 벌려 환영...? 두 팔로 밖으로 떠밀...?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겨울이 겨울인지 모르고 두 해를 보냈다. 독일어 B2 과정을 마치자마자 전공분야의 일을 구했으니, 운도 정말 따라주었다. 뒤돌아 볼 것 없이 앞으로만 내달리는 2년이었다.
그러다 정신을 차려보니 점점 가라앉고 있는 게 느껴졌다.
가라앉을 때면 언제나 뜰 줄 모르는 인간처럼 마음이 조급해진다. 부력에 몸을 맡기면 될 일인데, 허우적거려 점점 더 가라앉는다. 언젠간 떠오를 거라는 걸 알았지만, 믿어지지가 않았다. 그렇게 뜰 줄 모르는 인간이 되어 깊이, 더 깊이, 가라앉았다.
그래도 가장 깊은 곳이라 생각한 그곳이 떠오르기 시작한 지점이었나 보다.
표지 이미지 : Unsplash의Cristian Palm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