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를 지키기 위한 마인드 세팅
코로나 덕분에 단체회식은 거의 사라지고 셋넷씩 모여 가볍게 저녁 반주를 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 부서 역시 퇴근 후에 자연스럽게 회사 앞에 둘 셋씩 뭉쳐 가서 저녁을 먹는다. 그 때마다 나는 아주 자연스럽게 열외다. 아주 간혹 물어보는 사람도 있지만, 질문은 한결같다.
"팀장님은 안되시죠?"
갈 수 있다고 하면 되려 깜짝 놀란다. 당연히 안 되실 줄 알았다며. 애들은 누가 보냐고, 정말 괜찮냐고, 무리하지 말라고... 오라는 거야 말라는 거야!
물론 그들은 아이들을 데리고 집에 가야하는 워킹맘의 입장을 미리 배려한거다. 아직 안 친하니까, 내 사정을 잘 모르니까, 애들 데리고 가야하는데 부담스러울까봐. 어쩌면 고마운 일이다. 딱히 대책도 없는데 맨날 회식하자고 저녁먹자고 부르면 그것도 난감하다. 거절하는 것도 고역일테니까. 그런데도 뭔가 찜찜한 기분을 떨칠 수가 없다. 거절하고 안 가면 안가는대로 찜찜하고, 어떻게든 꾸역꾸역 아이들 맡기고 가면 이렇게까지 해야하나 싶다.
회사 일 열심히 하고, 사람들과 잘 지내고, 나름대로 인정받으려 노력하며, 약간은 옛날사람 직장인으로서 나는 지금 최선을 다하고 있다. 주어진 시간 안에 열심히 일하고, 팀의 성과를 고민하고, 팀원들을 코칭하고, 윗사람에게 어필하고, 옆자리 팀장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아직까지는 괜찮다. 할만 하다. 아니, 할 만 하지 않더라도 어떻게든 해낼 것이다. 노력하면 될 일이니까 말이다. 근데 한가지, 워킹맘의 신분으로는 도무지 해결이 안 되는 게 하나 있다면, 퇴근시간 이후 이어지는 일의 연장이다.
나는 두 아이를 회사 어린이집에 맡긴다. 내가 근무하는 건물에 어린이집에 있다보니 등하원은 오롯이 내 몫이다. 회사 어린이집은 분명히 끝내주는 복지이지만 한편으로는 숨가쁜 출퇴근 시간에 등하원을 얹어야 하는 일상이 버겁기도 하다. 어떤 날은 남편이 함께 출근하며 등원을 도와주거나, 퇴근 길에 우리 회사에 와서 아이들을 데려가기도 하지만 그래봐야 한 달에 한 두번이다. 다행히 아이들이 아침 저녁 잘 따라 주고, 어린이집에서 9시간, 때로는 12시간씩도 잘 견뎌주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 쉽지 않다. 가장 어려운 건 근무시간 안에 모든 걸 다 해내는 것이다. 오죽하면 야근할 수 있어서 좋겠다고 남편에게 말할 정도니까. 불필요한 일 때문에 하는 야근을 말하는 게 아니다. 아이러니하지만, 정말로 성과를 제대로 내고 싶은데 근무시간 안에 꽉 채워서 다 하려면 그야말로 숨이 턱턱 찬다. 하루종일 자리에 앉아 오롯이 집중해서 내 일만 할 수 있는 직업이 아니고서야.
일반적인 직장인이 근무시간 8-9시간 안에 일도, 회의도, 네트워크도, 팀원들 케어와 피드백도, 때때로 치고 들어오는 급한 일도, 보고자료도, 이 모든 걸 다 해내는 건 어쩌면 이상에 가깝다. 오죽하면 이걸 어떻게든 아등바등 해내려고 애쓰는 여자들에게 '슈퍼우먼' 딱지가 붙을까. 일이라는 게 퇴근시간에 무 자르듯이 잘라지는 것도 아니고, 더 좋은 결과물을 위해 욕심껏 투입하고 싶은 시간도 있다. 게다가 위로 올라갈수록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기에, 사람과 부대끼며 갈고닦는 네트워크도 무척 중요하다. 메일이나 전화로만 일을 요청하는 것보다 얼굴 한 번 보고 얘기하고 나면 더 쉬워지고, 밥 한끼 먹으면 바로 해결된다. 하루종일 회의를 해도 결론이 안 나는 일들이 저녁에 술 한잔 하면서 허심탄회하게 풀어놓으면 언제 그랬냐는 듯 해결되기도 한다. 술이 없어도 좋다. 맛있는 음식과 라떼와 농담이 섞이면 딱딱한 업무 얘기도 무장해제된다. 거기서 오가는 정보와 생각 만으로도 충분히 소중한 자산이다. 서로 맞장구 치고 공감하며 스트레스를 푸는 시간 역시 소중하다. 서로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도 네트워크의 중요한 역할이기 때문이다.
이 모든 건 물리적인 시간이 요구된다. 근무시간에도 티 타임은 가질 수 있지 않냐고, 점심에 밥 먹으면서 얘기할 수도 있지 않냐고 하실지 모르겠다만, 밀려드는 업무를 처리하기에도 모자른 시간에 느긋하게 밥 먹고 차 마시며 네트워크를 쌓는 건 사치다. 그냥 적당히 포기하는 것이다. 포기라는 말보다는 우선순위라고 해두자. 정해진 시간 안에 최선을 다해 일을 하고, 그 외에 나머지 ㅡ 일을 편하게 해줄 네트워크, 관계의 질을 높이는 것, 하나하나 일의 완성도와 같이 시간을 필요로 하는 일에는 욕심을 버려야 그나마 살 수 있다. 그래서 남들보다는 조금 더 힘들게, 조금 더 천천히 가더라도 그저, 감수하고 살아가는 것이다. 어쩌면 워킹맘이니까, 일과 육아를 병행하고 있으니까, 그게 내가 택한 삶이니까, 그러려니 해야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속상해 할 일도, 피해의식에 사로잡힐 일도 아니다.
아쉬운 건, 회식을 못해서가 아니다. 직장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뭔가 배제되는 느낌, 그것도 얼마든지 참을 수 있다. 워킹맘인데, 내 정체성이 그것인데 어쩌겠는가. 문제는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잘 붙들고 살아가고 있던 내 삶의 경계가 흔들린다는 점이다. 일의 연장이든 네트워크의 구축이든, 갑자기 훅 들어오는 '중요한' 이벤트는 늘 경계를 파괴한다. 퇴근 후 육아에 전념해야 하는 시간에 일을 하고, 혼자서 감당이 안 되니 가족의 양해를 구해야 하며, 가끔은 무리해서 다음날, 또는 주말까지 여파가 미치기도 한다. 만약 가족의 도움을 받지 못해 거절을 하더라도 기분은 찜찜하다. 왠지 중요한 기회를 놓친 것 같은 기분, 나만 정보가 차단되는 기분, 왠지 오늘 이 자리가 내일의 업무에도 영향을 주지 않을까 고민하며 왠지 안절부절 못하며 저녁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그렇게 보내는 저녁시간은 아이들에게도 집중할 수 없다. 경계가 깨지는 것이다.
회사에서는 '맘' 딱지를 완전히 뗀 '워킹 우먼'으로 일하고, 집에서는 '워킹'을 완전히 뗀 '맘'으로 살아가는 것. 그게 내가 생각하는 '경계'이자, 워킹맘으로 살아가는 제1 원칙이다. 시간관리도, 건강관리도 다 거기서부터 시작이다. 내가 할 일과 남편의 할 일을 구분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하루이틀이 아닌, 매일의 일상을 균형을 지키며 살아가기 위해서는 '경계'를 명확히 구분해야 한다. 그게 무너지면 일과 육아와 내 삶이 다 뒤엉켜 엉망이 된다. 하나하나가 모두 소중하기 때문에 다 잘 하려다가 전부 망치는 것이다. 이미 뼈저리게 경험했고, 다시는 그렇게 지내고 싶지 않다.
이걸 해결하는 방법은 나만의 기준을 정하는 것이다. 내 경계를 다시 그리는 것이다. 너무 타이트한 경계를 만들어 놓았더니, 자꾸 남이 쿡쿡 찔러 뒤흔든다. 그러지말고 처음부터 날을 정해 내가 먼저 제안하는 건 어떨까.
이제부터는 좀 다르게 해봐야겠다. 한 달에 두 번. 네트워크를 위한 날을 미리 만들어두고, 미리 가족에게 양해를 구하고, 나 역시 그 날을 위해 계획한다면 지금과는 조금 달라질 것 같다. 안 부르면 아쉽고, 막상 부르면 부담스러운 그 경계선에서 줄타기를 하지 말고, 내가 먼저 손을 내밀어야 되겠다. 내가 여력이 되는 상황에서, 내가 필요한 사람으로 만드는 네트워크야말로 실제로도 쓸모가 있다. 집에 들어가기 싫어서 어떻게든 건수 만드는 옛날 사람들이라면 모를까. 나처럼 몸이 열개라도 모자란 워킹맘이 퇴근 후의 삶 까지도 만전을 기하려면 효율을 극대화해야 한다. 내 하루하루의 시간을 가장 효율적으로 세팅하는 것. 물론 유드리는 있어야겠지만, 그것조차도 내 경계 안에서 마음 편안하게 움직여야 한다.
오늘은 나만의 경계를 다시 그러봐야겠다. 가족과 함께 편안하게 합의하고, 균형이 무너지지 않을 나만의 경계. 그렇게 세팅을 바꾸면, '안되시죠?'를 들어도 기분이 괜찮을 것 같다. 당당하게 말하면 되니까.
"네, 오늘은 어렵겠네요. 다음에 제가 모실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