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가 훈훈해졌다. 날이 너무 춥다고, 오미크론이 극성이라고 집에만 꽁꽁 붙잡아 둔 두 아이의 에너지를 이제는 마음껏 발산할 때가 되었다. 근 넉 달 만에 캠핑의자까지 챙겨 들고 월드컵 공원 '아기새 놀이터'에 갔다. 아파트 단지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모래놀이터다. 오르락 내리락 체력을 소진할 수 있는 기구들도 가득하다. 둥그런 놀이터 바깥쪽에는 대여섯개의 커다란 평상이 있다. 확진자 380명 시절에는 앉지 못하게 둘둘 감겨있던 테이프가 38만명 시대를 맞아 자취를 감추었다. 처음부터 아무 의미 없던 테이프였다. 평상에 앉지 못한 사람들이 그 옆에, 앞에 다닥다닥 자리를 펴고 앉아있었으니. 더 가까이, 더 친밀하게. 아, 테이프가 톡톡히 해 낸 역할이 하나 있다면 나무, 모래와 아이들이 어우러진 그 예쁜 놀이터를 못생기게 만든 것이다. 평상에 앉지 못해서가 아니라, 곳곳에 빨간 테이프가 무성한 그 흉측한 곳에 반드시 가야하나 망설이게 한 덕분에 놀이터의 인구밀도는 조금 줄었을지도 모르겠다.
운 좋게 평상 하나를 차지해 자리를 잡았다. 평상에 앉으면 놀이터가 한 눈에 보인다. 부산한 아이들의 움직임을 잠깐 멍하니 바라본다. 몸집이 큰 고학년 아이들부터, 아장아장 걷는 아기까지 수십명이 저마다의 방식으로 놀이터를 즐기고 있다. 우리집 꼬맹이들도 한 녀석은 모래파기부터 시작하고, 한 녀석은 멀찍이 뛰어가 나무 판자를 오르고 있다. 조금 지나자 모래를 파던 아이는 미끄럼틀로 뛰어가고, 웬만한 기구를 전부 한번씩 오르내린 큰 애는 모래를 파기 시작한다. 그렇게 한 시간, 두 시간, 세 시간.. 오후 느즈막히 갔더니 순식간에 어둑어둑하다. 어느새 조금 휑해진 놀이터에는 아직 지치지 않은 아이들과 지친 어른들만 남았다. 슬슬 평상을 정리하는데 갑자기 옆에서 큰 소리가 들렸다.
"이제 가야된다고!"
"안 갈 거야. 더 놀거란 말이야."
"이제 집에 갈 시간이라니까!"
"집에 안 갈거야아아!!"
아이고 저 집도 전쟁이구나. 남 일 같지가 않다. 곧 우리 평상에서도 벌어질 일일테니. 아이는 여섯 살 쯤 된 것 같았다. 큰 소리가 나기 전 이미 오래도록 실갱이를 했는지 아이 얼굴은 눈물 범벅이다.
"OO가 가자고 할 때 가는 게 아니고, 엄마아빠가 가자고 할 때 가는거야! 알았어?"
아빠의 말을 끝으로 더 이상 아이는 말을 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 없었으리라. 아이한테는 선택권이 없다는 것, 그게 아빠가 정한 세상의 원칙이고 그 원칙을 반박할 논리가 아직 아이에겐 없으니까.
남의 아이 얼굴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놀이터 가는 시간도, 집에 가는 시간도 엄마 아빠가 정하는 건 당연하다. 아이들은 한계를 모르니까. 언제든 집에 가자고 하면 아이는 아쉬워한다. 아쉬움이 지나쳐 생떼를 부리기도 하고, 목이 터져라 부르는 소리를 못 들은 척하고 놀기도 한다. 5시간, 10시간이 지나도 계속 놀고 싶어하는 마음, 힘든 것도, 배고픔도 잊고 노는 게 아이들이다. 한 번 나오면 집에 안 가고 싶어할 아이의 욕구를 뻔히 알면서도 우리는 놀이터에 나왔다. 마음껏 뛰어놀으라고, 신나는 추억을 쌓으라고, 에너지를 탈탈 털어 쓰고 밤에 푹 자라고. 그런 마음으로 데리고 나왔다면 아쉬운 마음조차 잘 데리고 집에 가는 것까지도 엄마 아빠 몫이려나.
화는 날 수 있다. 그 집 아빠도 이미 몇 번을 좋은 소리로 집에 가자고 했을지 모른다. 아침부터 놀아서 체력적 한계에 부딪혔을 수도 있다. 아이에게 우리가 모르는 지병이 있어 더 이상 놀면 안 된다거나, 저녁에 다른 일정이 있을지도 모른다. 아이가 평소 때도 아빠 말을 잘 듣지 않아 누적된 화가 폭발한 걸 수도 있다.
더 놀겠다는 아이와 씨름하는 건 어느 집이나 있는 일이다. 가능하면 끝까지 즐겁게 집에 가면 좋겠지만 마음대로 잘 안 되는 것도 이해한다. 어쨌거나 아이를 위해 주말 하루를 놀이터에서 보냈으니 그 집 아빠도 최선을 다했다. 그래도. 적어도 이 곳에서만큼은 조금 다르게 말하는 게 좋지 않았을까. 다음에 또 오자라든가. 이미 약속한 시간이 지났다든가. '네가 정하는 게 아니라, 내가 정하는 거야.'라고 꾹꾹 눌러 뱉은 아빠의 한 마디에 마치 내가 아이마냥 가슴이 철렁했다. 세상에서 가장 자유로운 곳, 무엇에도 방해받지 않고 마음대로 놀 수 있는 그 곳, 아이들이 주인이자 주인공인 놀이터라는 공간에서 그 아빠의 목소리는 유독 크게 메아리쳤다. 너에겐 선택권이 없어. 네겐 그럴 자유가 없어. 너에게는. 아이에게는.
'마음껏 뛰어놀아. 하지만 엄마아빠가 허락할 때까지만이야.'
이제껏 아무 생각 없이 아이에게 했던 말,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두 단어의 조합이 거슬린다. 내가 아이라면 한 마디 하겠다. '그건 마음껏이 아니잖아요?' 물론 해 줄 말은 있다. 세상이란 그런 거라고. 앞 뒤 안 맞고, 말도 안 되는 일이 세상에는 참 많다고. 마치 앉으라고 만들었지만 앉지 말라고 둘러쳐있는 빨간 테이프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