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 시절, 남편은 백화점에서 산 꽃다발을 선물해 주곤 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내가 보아도 동네 꽃집과 완전히 달랐다. 그때부터 조금씩 꽃을 배워 보고 싶어졌다. 하지만 내가 하는 일과 아무 관련이 없었고, 취미 생활을 하는 직장인이란 찾아보기 어려운 시절이었다.
둘째를 임신했을 때 구청에서 재료비만 내면 되는 꽃 강좌를 몇 달 들었다. 임신 기간 내내 몸이 힘들어 다른 건 엄두도 못 냈지만 꽃 수업만은 어떻게든 출석했다. 더 배우고 싶었지만 둘째가 태어났고 3년 가까이 데리고 있으면서 무언가 시작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어느 날, 아는 언니가 꽃을 배우고 있다고 했다. 어디서 배우면 좋은지 얼마나 돈이 드는지 궁금했던 터라 물어보았다. 최소 400만 원. 한 달에 20만 원을 남편 월급에서 내 용돈으로 떼어 두던 때였다. 400 나누기 20은 20. 내 물건은 안 사도 생일은 챙겨야 하니까 2년이 좀 넘게 걸릴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래도 일단은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하자. 그렇게 모으기 시작한 나의 소망 자금은 의외로 빨리 쓰였고 생각보다 적은 금액으로 큰 보탬이 되었다.
어디에나 있지만 이름을 아는 사람은, 아니, 궁금해하는 사람은 거의 없는 나무가 있다. 그도 그럴 것이, 허리 높이보다 낮고 변화도 없으니 눈에 띄질 않는다. 사람들이 무심히 지나치는 세상의 온갖 사소한 것들을 소중히 길어 올려 문장으로 그려 내는 시인들조차 회양목으로 시를 쓰지 않았다. 아파트 화단과 길, 건물과 인도 사이에 주로 심어서 울타리 나무라고 불린다. 키가 작고 빨리 크지 않고 사철 푸른 잎이 빼곡하면서 튼튼해서 울타리로 제격이다.
비가 한 주 내내 오는 계절이면 많은 나무가 힘들어한다. 축 처지고 나무껍질이 벗겨지거나 이끼가 끼기도 한다. 아파트 화단 관리자처럼 구석구석 나무들의 변화를 살피는 나는 심방하듯 돌아보며 괜찮을까 안쓰럽다.
그런데 회양목은 끄떡없다. 다만 삐죽이 자란다. 그러면 나는 곧 싹둑 잘리겠구나, 싶어 혼자 마음이 불편하다. 네모난 모양을 유지하는 게 회양목의 본분이니까. 꽃말까지도 ‘참고 견뎌냄’이다.
육아만 하던 사람이 배움이나 일을 시작하려 하면 응원보다는 걱정을 먼저 만나게 된다. 내가 정해진 영역에 머물기를 바라는 말에 마음이 가로막히는 날이면 누구도 쑥쑥 크길 바라지 않는 회양목이 눈에 들어온다. 주로 듣는 편인 사람이라 이 사람 저 사람 사이에 끼어 있는 날도 많다. 표면적으로는 너밖에 중재할 사람이 없다면서도 내 의견은 듣는 사람이 없어 답답할 때면 말을 걸고 싶어진다.
너는… 괜찮니? 이렇게 매번 잘리는 게?
양목이는 그저 빙긋이 웃는다. 스스로 알기 전에는 가슴 깊이 이해할 수 없다는 걸 아는 대선배 같다. 다른 나무는 크기로 세월을 짐작하고, 특별히 멋진 구석이 없이 키만으로도 감탄을 받곤 하는데 시간의 길이조차 알 수 없는 양목 선배.
뻗어 나가는 게 가장 강인한 건 아니라고. 변함없는 것도, 응원 없이 자리를 지키는 것도 다른 묵직함이라고 말 없는 격려를 보내는 걸까.
어느 봄, 회양목에도 꽃이 핀다는 것을 알았을 때 기뻤다. 작은 폭죽처럼 귀여웠다. 둘만의 페스티벌처럼 뭉클 찌릿했다. 양목 선배가 옳았다. 아무도 핀 줄 모르는 그런 꽃이면 어때, 세상에는 튼튼한 울타리가 필요하고, 테두리가 있기에 그림이 있는걸.
그냥 사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햇살, 자유, 작은 꽃이 있어야 합니다. – 안데르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