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이 흐르면서 두 사람은 서로 다른 길을 통해 똑같이 현명한 결론에 도달했다. 즉 다른 방식으로는 함께 살 수도 서로 사랑할 수도 없으며, 이 세상에 사랑보다 어려운 일은 없다는 것이다. - 본문 중에서-
에세이가 명료한 한 주제를 직선적으로 풀어쓴 것이라면, 소설은 간단히 요약할 수 없는 어떤 것들을 여러 지점을 거쳐 에둘러 표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내 기준에서 훌륭한 소설은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함과 동시에 작가가 표현하고자 한 각각의 메시지가 독자로 하여금 한 지점을 지날 때마다 어렴풋이 이해되게 하고, 최종적으로 모든 소설의 지점을 다 거쳐 지나갔을 때는 그 종합적 의미가 독자의 (머리가 아닌) 가슴에 맴돌게 하는 것이다. 도스토옙스키와 알베르 카뮈, 그리고 많은 훌륭한 작가들의 소설이 그렇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사랑에 대해서만 주야장천 이야기하고 있는 이 소설 역시 그런 훌륭한 소설의 범주 안에 들 수 있을 것 같다.
대 코로나 시대를 맞아 나 역시 ‘코로나’ 시대의 사랑을 꿈꾸며 이 책을 집어 들었다. 하지만 이 책에는 콜레라에 관한 이야기는 그다지 많이 등장하지 않았으며, 단지 사랑에 관한 이야기만 가득했다.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에서 본 것과 비슷한 것을 기대했다면 다른 책을 읽는 것이 시간 절약에 더 좋을 것이다. 그래서 사실 줄거리로만 따지자면 별 내용이 없다. 첫눈에 반한 소녀를 한 남자가 인내심 있게 기다리며 결국 그 사랑을 이뤄낸다는 간단한 한 문장으로 줄거리를 요약할 수 있다. 하지만 작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그만의 유려한 필력으로 소설을 흡인력 있게 끌고 가고 있다. 카리브해 항구도시의 아름다운 거리, 안데스 고원의 텁텁한 기후와 그에 반하는 자유로움, 엄격한 관례가 지배하는 19세기와 급격히 변화하는 20세기 초의 남미 사회 분위기 같은 것들을 풀어내고 있어도 전혀 지루하지 않다. 소설의 주된 배경이 되는 항구도시의 풍광을 묘사하는 대목을 읽고 있노라면 그곳의 기후와, 바쁘게 지나다니는 사람들과 마차들, 대성당과 홍등가들이 저절로 떠오르기 때문에 당장 콜롬비아의 그 도시를 찾아 떠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실제로 이 소설을 읽으면서 콜롬비아의 지도를 자주 들여다보곤 했다. 언젠간 나 역시 플로렌티노 아리사가 걷던 필경사의 거리를 걸으며 페르미나 다사의 젊었을 적 사진을 좌판대에서 구할 수 있기를 바라면서.
다만 너무 많은 여러 가지 이야기가 나오기에, 때로는 그것이 너무 과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대표적으로 소설의 도입부에 등장하는 제레미아 드 생타무르의 죽음과 주인공 플로렌티노의 보물선 탐험 이야기를 들 수 있다. 물론 그것을 읽을 때는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일화들이 무슨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하는지, 소설 속에서 어떤 맥락 상에 위치하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이 소설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점은 등장하는 인물들과 그들의 지고지순한 사랑이 완벽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소설의 캐치프레이즈가 ‘사랑하는 여인과 함께하기 위해 51년 9개월 4일을 기다린 남자의 이야기’라고는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플로렌티노 아리사와 페르미나 다사의 젊은 시절을 다룬 전반부는 마치 『로미오와 줄리엣』을 읽는 듯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첫눈에 반한 두 남녀가 집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몰래 사랑을 키워 나가지만, 젊음의 열정이 흔히 그러하듯이, 이내 그것은 쉽게 좌절되어 버리고, 남자는 여자를 향한 평생의 사랑을 혼자서 계속해 나간다. 플로렌티노 아리사가 겪는 실연의 아픔과 사랑에 대한 집착은 읽는 이로 하여금 가슴을 아프게 한다.
하지만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그는 거리의 여자들과 과부들을 만나 사랑을 나눈다. 그것은 페르미나 다사를 일시적으로 대체하고자 하는 시도에 불과할지도 모르겠으나, 그의 일생에 걸쳐 행해졌던 정신적인 사랑이 결여된 육체적 사랑의 행위가 건강한 관계를 형성할 수 있었을 리는 없다. 실제로 그는 많은 여자들과의 관계 속에서 전혀 책임지지 않는 모습을 계속해서 보였다. 어떤 여자는 그와의 잠자리에서 행해진 악의적인 장난 때문에 그녀의 남편에게 목숨을 잃기도 했고, 소설의 후반부에 등장하는 그의 정부였던 어린 소녀는 그의 변심 때문에 자살까지 했지만 그는 그 사실을 애써 무시하고 페르미나 다사와의 관계에만 집중하려는 이기적인 모습을 보인다. 51년 9개월 4일 동안 사랑을 간직한 남자치고는 너무 많은 여자들과 관계를 맺었고, 그 사랑에 책임지지도 않았다.
페르미나 다사 역시 마찬가지다. 젊은 날의 열정에 이끌려 플로렌티노 아리사와 편지를 나누면서 그를 사랑하게 되었지만, 그것은 그녀의 환상 속에서 이뤄진 것에 불과했다. 그녀가 그를 직접 대면한 순간 그 사랑은 허깨비였음이 드러났으며, 그녀는 매정할 정도로 그를 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열정이 사그라짐에 따라 현실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성격 좋고, 가문 좋고, 재력 좋은 집안의 청년과 결혼을 하여 누구나 선망할만한 상류층의 무탈한 결혼 생활을 50여 년에 걸쳐 이어간다.
하지만 이런 것들이야말로 실제로 있을 법한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로미오와 줄리엣』과 이 소설의 가장 큰 차이점은 사랑의 현실성이다. 이 소설을 읽고 있으면 두 인간의 인생을 다큐멘터리 카메라를 들이댄 것처럼 느린 호흡으로 들여다보는 것 같다. 그래서 비록 1백 년 전을 배경으로 하는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이 사랑에 빠지고, 그 사랑이 식고, 50년을 보내고, 다시 사랑에 빠지는 그 모든 과정들을 오늘날의 현실에 비추어 보아도 납득이 간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인물들의 감정 상태와 생각이 어땠을지도 쉬이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래서 이 소설은 조금 특이하다. 줄곧 사랑에 대해 다루고 있지만, 그 속에 두 세기에 걸친 시대상이 녹아 있고, 가부장제에 대한 비판과 저항정신이 있으며, 나이를 먹는다는 것에 관한 작가의 숙고가 잘 들어있는 소설이기 때문이다. 소설을 읽으며 이 책을 집필했을 당시 작가의 나이가 궁금했다. 왜냐하면 노인들의 사랑, 생활방식과 생각 등을 너무나 잘 이해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알고 보니 이 소설은 작가가 노벨상을 수상하고 나서 60대에 접어들기 직전에 출간된 소설이었다. 노인이라고 부르기에는 부족한 나이일 수는 있겠으나 과히 이상한 일은 아니다. 위대한 작가라면 인생을 관통하는 비밀 몇 가지쯤은 날 때부터 알고 있는 법이니까.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소설을 읽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지만, 내가 소설을 읽을 때 누구의 것을 골라야 할지 고민할 때 앞으로 빠지지 않을 이름이 도스토옙스키와 알베르 카뮈, 헤르만 헤세가 있는 나만의 리스트에 추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