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을 기다렸어요
내게 10살 연상의 남자 친구가 있었다
결혼할 줄만 알았던 우리는 5년이라는 연애 끝에 각자의 길을 가기로 하고 서로의 행복을 빌며 이별을 하였다
긴 시간 함께 하던 이 가 없어져 외로울 찰나에 친한 친구가
대기업 영업팀 관리직으로 일하는 남자와 한번 만나보라고 소개팅을 시켜주었다
잘생기면 얼굴값 한다고 본인이 잘생긴 걸 알아서인지 만날 때마다 얼굴값을 톡톡히 하였고 그래도 좋다며 몇 번을 더 만났다
짧은 만남 동안 나는 그의 제대로 어항 속에 물고기가 되어있었다
더 이상 상처 받지 않으리 결심하고 그의 번호를 차단하였다
그렇게 한 해가 가고 고독한 가을을 보내는 중
지하철을 타고 어느 때와 같이 지루한 일상생활을 하고 있었다
아침 출근길 허겁지겁 지하철을 탔는데
내 앞에 외국인 남자와 한국 여자가 앉아 있었다
뭐라고 하는지 알아듣지 못했지만 여자의 영어실력에 넋을 놓고 듣고 있었다
(그래! 남자 친구도 없겠다. 나도 이참에 못다 한 영어공부를 해야겠어!!)
예전에 중국어 배운다고 큰돈 들여 중국어를 배우고 얼마 안 있어 그만두었고
일본어 배운다고 히라가나 쓰여있는 일본어 책을 사기도 했지만 한 장이나 풀었을까
열정은 남달랐지만 열정이 식는 것도 남달랐다
돈이 들어가면 더 빨리 그만둔다는 걸 알고 이번엔 돈 안 들이고 공부할 방법을 찾기로 했다
인터넷으로 검색하던 중 외국인과 친구 맺고 외국어 공부를 할 수 있는 어플이 있었다
어플은 돈도 안 들고 외국인에게 직접 배우면 더 빨리 배울 테니까 한국어를 가르쳐주고 영어를 배워야겠다 생각했다 혹시 또 공부하다가 오늘 본 잘생긴 외국 남자와 눈 맞을 수도 있겠다는 살짝의 기대감도 있었다
나도 친구 생기면 같이 지하철을 꼭 타야지. 말 안 하고 있어도 같이 다니면 사람들이 영어 잘하는 줄 알겠지?
혼자 실실거리며 이것저것 정보를 입력하고 있었다
평소에 잘 나와서 여기저기 우려먹고 있던 사진을 프로필에 올렸다
처음엔 포르투갈 남자와 친해졌다 아빠는 포르투 갈분이고 엄마가 브라질 사람이라고 했다
개방적이고 시원시원한 성격이어서 공부보단 먹고 노는데 시간을 많이 보냈지만 이 친구는 한국어를 조금밖에 못했고 나 또한 영어를 못했기에 어느 순간 언어의 장벽으로 점점 멀어져 갔다
그렇게 영어에 관심도 식어 갈 때쯤 띵동 소리와 함께 어플에 쪽지 하나가 도착했다
어? 뭐야 우즈베키스탄 사람이네. 무섭게 생겼어.
뭔가 심히 부담스러웠지만 한국에 온 지 2년 됐는데 친해지고 싶다며 참으로 예의 바른 한국어의 쪽지였다
2년밖에 안됐는데 그래도 한국말은 좀 하네.
사진부터 후줄근해 보이는데 예의는 또 있고
싫은 티 푹푹 내며 안 해도 될 쪽지를
그렇게 몇 차례 주고받았고 한국생활에 궁금하거나 어려운 게 생기면 도와주겠다는 형식적인 답장을 보냈다
처음에 전화번호를 물어봤는데 번호를 알려주니 낯선 번호로 바로 전화가 걸려왔다
무섭고 설레고 그냥 받기 싫었다
전화가 끊기고 나는 문자를 보냈다
문자로 해! 조금 부담스러워!
나중에 알고 보니 한국어 쓰기가 어려워서 전화를 했던 것이다 지금도 메시지 보내면 답장은 안 하고 바로 전화한다
그렇게 우리는 매일 20분 정도 통화하며 지냈던 것 같다
어느 날 샤로프는 주말에 만나자는 말을 했는데 나는 약속 있고 바쁘다는 핑계를 댔다
사진이랑 달라서 실망하면 어쩌나 싶기도 하고 만나기가 무섭기도 했다
그렇게 이주 정도를 더 버티다가 연락한 지 한 달 만에 우리는 저녁을 먹기 위해 만났다
전화할 때 당당함은 어디 가고 순한 양 한 마리가 나왔다
반대로 나는 만나니 생각보다 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쩔 줄 몰라하는 샤로프에게 내가 먼저 말을 건넸다
우리 치맥 먹으러 갈래?
치킨 좋아해? 맥주 괜찮아?
아니, 저 술은 안 먹어요. 혼자 먹으면 나는 콜라 먹을게
(뭐야 이 남자. 재미없어)
우즈베키스탄 사람이 이슬람교를 믿는 무슬림이란 사실을 전혀 모른 채
무슬림 앞에서 맥주 맛이 기가 막히다며 계속 술을 권했던 기억이 난다
치킨을 먹고 영화를 보러 갔는데 밥을 얻어먹어서 영화관 티켓은 내가 끊었다
무조건 남자가 내야 된다는 샤로프에 말에
요즘 그런 시대는 갔어~우리나라는 여자들도 경제력이 있어서 말이야~ 라며
시원하게 팝콘까지 쐈다
(그 뒤로 훗날 커플 신발이며 커플티며 온갖 것 퍼주느라 내 지갑은 너덜너덜해졌다 결혼할 줄 알았으면 아껴 쓸 걸 하는 생각도 가끔 든다)
털털하고 주도적인 나를 보고 재밌고 신기하다며 말하는 샤로프의 얼굴에 내가 봐도 저 반했어요 라고 쓰여있었다
사실 나는 관심 있는 사람 앞에 선 눈도 제대로 못 마주치는 부끄럼쟁이인데 샤로프는 그냥 친구처럼 편했다
마음속에 나는
우즈베키스탄 남자와 결혼? 아니야 라는 확고한 마음이 있어서였나 보다
그렇게 우리는 치킨도 먹고 영화도 보고 잠깐 동안 정말 많이 친해진 것 같다
이렇게 우리는 2주에 한번 1주일에 두 번 세 번 자주 만나 데이트를 하며
내가 한국어도 가르쳐주고 아랍어를 공부 중이라며 나에게 아랍어도 가르쳐주었다
매번 같은 패턴의 데이트인 영화 보고 밥 먹고 차 마시고가 샤로프랑 하니까 모든 게 새롭고 재미있었다
이렇게 달콤한 우리의 시간이 몇 개월 지나고 있을 무렵
우리가 사귀는 게 맞는 건가 확신을 갖고 싶어 졌다
만나면 진지하게 물어봐야겠다 생각하고 있었지만 매번 이번엔 먼저 말하겠지 먼저 말하겠지 하고 지나가버렸다
그러던 어느 날 샤로프는 나에게 전화를 하더니 대뜸 할 말이 있다고 한다
할 말 있는데
응 뭔데?
나 우즈베키스탄에 집에 가야 돼
갑자기? 그럼 언제 와?
한 달 정도 갔다 올 거야 한 달 동안 연락 못할 것 같아
그게 무슨 말이야? 요즘 인터넷 안 되는 데가 있어?
(마음만 있으면 할 수 있는 거 아닌가?)
사정이 있어서... &%^&#@%#
그래 알았어
쿨하게 대답하고 전화를 끊었다
사실 나는 전혀 쿨하지 않았다. 친구와 종일 전화통을 붙잡고 탐정이 되어 수사를 하기 시작했다
친구의 수사결과는 불법체류자인데 일이 꼬여서 잡혀가는 것이라고 했고
나는 이미 내가 질려서 한국에 있으면서 미안하니까 알아서 그만 연락하자는 의미라며
온갖 생각에 잠겨 친구와 나는 소설을 써가며 이 남자를 탐구했다
이 외에 여러 가지 상황을 이야기했지만
그날 이후 정말 연락이 두절되었다
이 남자? 갑자기 어디로 왜 무엇 때문에 한 달 동안 사라진 걸까?
이 남자 정말 외국을 간 건가?
싫다고 말했으면 기다리지 않을 텐데..
나는 목이 빠져라 한 달이라는 시간을 버텨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