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욱의 <올드보이>
봉준호는 개인적으로 모르지만, 박찬욱은 내가 대학시절부터 잘 알던 후배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영화 관련 원서를 가장 많이 소장한 대학이 서강대였고, 고전필름도 많이 보관하고 있었기에, 젊은 영화학도들이 그곳에 자주 모여 같이 영화를 보고 토론하곤 했다. 그때 서강대 철학과 다니던 박찬욱을 만났다. 중대 연극영화과를 다니던 나는 막상 영화이론 공부는 서강대에서 더 많이 했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1980년대 후반 내가 <극복의 영상들>이라는 걸작 시나리오집을 편집하고 발간할 때, 내 부탁으로 우디 앨런의 <애니홀>시나리오를 번역하기도 했다. 1990년대 그가 데뷔하고 두번째 영화를 만들때까지만 해도, '쟤는 평론이나 하지 왜 그 안되는 영화감독을 하려할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러다 2000년에 만든 <공동경비구역 JSA>를 보고 깜짝 놀랬다. 아니, 글쓰고 평론만 잘하는 줄 알았던 친구가 어떻게 이렇게 영화를 잘 만들지? 하면서... 다음 작품 <복수는 나의 것>(2002)는 내겐 별로였지만, 그 다음작 <올드보이>(2003)는 말 그대로 충격이었다. 내가 지금까지 본 한국영화중 최고였고, 세계무대에 나가도 손색없는 영화라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그 영화가 2004년 칸 영화제에서 마이클 무어의 다큐 <화씨 911>에 밀려 심사위원대상을 받았지만, 난 지금도 당시 황금종려상은 <올드보이>가 받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올 봄, 오랫만에 만난 그에게 '혹시 <올드보이>, 그거 약 먹고 만든 거 아냐?'라고 농담했을 정도로 그 영화는 다시 만들기 힘든 걸작이었다. 대학시절 같이 영화보며 얘기하던 그가 이렇게 유명한 감독, 아니 그것도 세계적인 거장이 될거라곤 상상도 못했기에, 상대적으로 좌절감을 느끼기도 했다. 정말 위대한 감독이란 노력만 가지곤 안되고, 어쩌면 신이 부여한 능력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 내 열등감을 다스릴 수 밖에 없었다. 지금까지 나는 박찬욱 본인을 비롯 어느 누구도 <올드보이>를 넘어서는 한국 영화를 본 적이 없다. 이전에 얘기했지만, 봉준호의 <기생충>은 <올드보이>다음 순위 영화다. 그렇다면 <올드보이>는 왜? 무엇이 그렇게 뛰어난 영화일까? 그런 의문에서 이 글을 쓰기 시작했다.
<올드보이>는 다들 알다시피 일본 만화 원작이다. 동명의 원작 '올드보이'는 1997년 쯔치야 가론의 스토리에 미네기시 노부야끼 그림의 총 8권으로 이뤄진 만화다. 일본에선 그 만화가 그다지 인기가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원작 판권을 가지고 있던 일본 측은 그 판권을 헐값에 팔아넘겼는데, 나중에 영화가 성공하자 그렇게 대박날 줄 몰랐다며 후회했다고 한다. 나는 원작이 어땠길래 이렇게 영화가 좋았는지가 궁금해 만화 원작을 보았는데, 좀 실망했다. 사실 만화는 주제가 모호하고, 영화에서 중요한 모티프가 된 '복수에 대한 설득력'이 부족했다. 스토리 자체가 신선한 듯 하면서도 공감이 되지 않았다. 영화는 기본적으로 동창생(올드 보이)이란 두 주인공 캐릭터 설정과 사설 감옥에 감금, 최면의 모티프 등 중요한 설정을 가져오긴 했지만, 핵심 주제와 스토리는 기본적으로 많은 차이가 났다. 당연히 올드보이가 훨씬 공감되고 재밌었다. 각색을 어떻게 해야하는지를 보여주는 모범사례나 마찬가지라고 보인다.
일단 만화 원작에서 영화가 가져온 중요한 설정을 비교해 보자. 첫째, 과거 친구를 사설감옥에 감금해 복수한다는 것이다. 이우진(원작에선 카키누마)이 과거 친구였던 오대수(고토)를 각각 사설감옥에 감금한다는 것인데, 감금시기는 차이가 좀 있다. 영화가 15년인데, 만화는 10년이다. 두번째는 감금 이유가 '학창시절 사건'에 있다는 것이다. 대신 <올드보이>는 고등학교 동창이고, 만화는 초등학교 동창이라는 차이가 있다. 세번째는 두 작품 다 '최면'을 통해 상대 여자와 사랑에 빠진다는 점이다. 오대수는 미도를, 코토는 애리와 사랑에 빠진다. 만화의 전체적인 픅롯이 분명 매력은 있다. 복수의 방법으로 왜 '감금'이라는 방법을 택했을까하는 호기심을 들게하고, 동시에 '최면'이라는 방법이 신비롭고 참신하기 때문이다.
만화에서 폭력에 대한 묘사는 거의 없다. 하지만 영화는 폭력장면과 성적인 묘사등 과격하고 자극적이다. 만화의 주제가 다소 모호한 반면, 영화의 주제는 명확하다. 즉 '세 치 혀를 조심하라. 즉 무심코 행한 말이나 행동이 상대방에게 큰 상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얘기하고 있다.
오대수 역할위 최민식은 처음 <올드보이>시나리오를 받아 읽었을 때 느낌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독특했어요. 캐릭터 상황이 모두 자유롭고 대단한 상상력이 들어있으면서 짜임새도 뛰어났죠. 생전 먹어보지 못한 음식인데, 시식해 보니 엄청 맛있는 요리랄까?" 그는 정말 오대수 캐릭터를 상상 이상으로 잘 표현했다. 지금까지 내가 본 최민식의 최고 명연기였다고 생각한다. 물론 우진 역의 유지태와 미도역의 강혜정 역시 그들의 인생 연기를 보여줬다. 그들 연기의 앙상블도 <올드보이>를 돋보이게 만든 것중 하나다. 뭐, 결국엔 박찬욱의 천재적인 연출 덕분이긴 하지만 말이다.
만화의 고토와 영화의 오대수(최민식) 캐릭터는 비슷한 듯 하면서 정반대다. 둘 다 평범한 샐러리맨이지만, 오대수는 술먹고 주정이나 부리는 인물이고, 고토는 자신을 사회의 실패자로 여기고 고독에 젖은 채 힘들게 사는 인물이다. 만화는 고토 캐릭터를 통해 당시 일본 버블경제의 문제를 다루었다고 한다. 고토는 학창시절 싸움도 잘하고 인기도 많았던 학생이면서 의리도 있는 착한 아이로 묘사되지만, 오대수는 입이 가볍고, 평범한 고등학생으로 묘사된다. <올드보이>의 이우진(유지태)은 돈많은 엄친아이지만, 만화에서 카키누마는 어릴때 외모 컴플렉스에 열등감으로 무장한 암울한 아우라를 지니고 있다. 카키누마를 '악'이라고 부를 순 없지만, '어둠, 카오스, 허무'의 상징인 것은 분명해 보인다. 둘의 공통점은 오대수(코토)를 오랫동안 감금할 수 있는 엄청난 재력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만화와 영화 둘 다 여주인공에 해당하는 미도와 에리가 최면에 빠져 주인공(오대수와 고코)를 사랑하게 된다는 것은 같다. 하지만 큰 차이는 만화의 에리는 코토의 딸이 아니라 과거 학교 선생이었다는 것이다. 만화에서는 복수의 이유가 근친과 전혀 상관이 없다. 하지만 영화 <올드보이>는 완전히 새로운 설정인 근친을 가져와 성공적인 반전으로 활용하였다. 애초에 만화에서 고토는 오대수와 달리 미혼이기에 그런 설정을 사용할 수가 없다. 두 여자가 모두 이우진과 카키누마의 복수를 위해 이용된 캐릭터라는 건 유사하다. 반면 미도는 당차고 적극적이지만, 에리는 일본의 전형적인 여리여리한 여성상에다 소극적인 성격이다. 만화에는 없지만 영화에서 창작된 인물이 이우진의 누나 이수아(윤진서)다. 고교시절 남매임에도 사랑하는 사랑하는 연인처럼 은밀한 접촉을 했던 상황을 오대수가 우연히 보게되고, 그 목격담을 과장해서 친구들에게 퍼뜨림으로써 사건이 커진다. 그로인한 충격으로 누나 수아가 자살하자 충격받은 우진이 복수를 결심하게 된 것이다. 만화에서 나온 쿠시마 여선생 역시 영화에는 없고, 만화에만 나오는 인물이다. 그녀는 대놓고 제자인 카키누마가 음침하고 무서웠다고 말한다.
두 작품에서 핵심 사건의 모티프인 복수의 동기는 중요하다. 영화에서는 우진과 누나 수아의 관계를 오대수가 확대재생산에 비극이 벌어지자 성인이 된 후 우진이 감금하게 되고, 만화에서는 복수 동기가 다소 추상적이다. 초등학교 6학년때 카키누마는 자기가 교실에서 노래를 부르는데, 고토가 노래를 들으며 눈물을 흘리는 걸 보게된다. 카키누마는 자기가 감춰온 '고독'을 고토가 알아버렸다는 사실에 수치심을 느껴서 나중에 복수를 하게 된다는 것이다. 카키누마의 그런 복수 동기는 사실 잘 이해가 안되는 부분이다.
<기생충>도 그랬지만, 이 영화도 굉장히 모티프를 많이 활용하고 있다. 몇 가지 빼고는, 대부분 원작 만화에 없는 것들이다. 공간의 모티프로는 '사설 감금방과 상록고등학교(에버그린)', 그리고 행위의 모티프로는 원작에는 없었던 '근친상간'과 '헛소문 ', 그리고 원작에서 그대로 가져온 '최면'이 그것이다. 소도구의 모티프는 대부분 만화 원작에 없던 것들이다. 오대수의 고독을 상징하는 '개미' 그리고 딸에게 선물할 '천사의 하얀 날개', 그리고 반전에 사용되는 '보라색 앨범(판도라의 상자)', 그리고 할리우드 등에서 자주 패러디 되는 오대수의 무기 '장도리', 그리고 '중국집 만두'가 거기에 속한다. 음악의 모티프로는 오대수와 미도의 관계와 우진에게 수아를 생각나게 하는 노래인 가수 민혜경의 '보고싶은 얼굴'을 반복 사용한다. 그리고 오대수와 이우진의 고독한 캐릭터를 상징하는 19세기 미국의 여류시인 윌콕스의 시(詩) '웃어라, 온 세상이 너와 함께 웃을 것이다. 울어라. 너 혼자만 울게 될 것이다.' 와 '모래알이든 바위덩어리든 물에 가라앉기는 마찬가지다'라는 대사 모티프도 주제와 관련해 중요한 문장이다. 도입부에서 자살하려는 남자(오달수)가 한 말인 '아무리 짐승만도 못한 놈이라도 살 권리는 있는 거 아닌가요?'와 오대수가 우진에게 반복해서 묻는 '넌 누구냐?'라는 대사도 캐릭터와 관련된 중요한 모티프다.
사실 '넌 누구냐?' 라는 정체성을 묻는 대사는 일본의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 영화 <큐어>(1997)의 영향이 엿보인다. 봉준호도 극찬했다는 그 영화는 최면을 이용해 연쇄살인을 하는 남자의 이야기인데, 주인공은 상대에게 최면을 걸어 '넌 누구냐'고 묻고 그 사람의 내면의 악한 본성을 끌어내 간접적으로 살인이나 자살을 하도록 유도한다. 창작 시나리오인 봉준호의 <기생충>도 그렇지만, 각색 작품인 <올드보이>역시 참조한 영화들이 또 몇 편 있다. <올드보이>에서 오대수와 미도의 관계 설정은 '나 때문에 죽은 줄 알았던 여자가 나중에 알고 보니 살아있고, 결국 그 여자와 사랑에 빠진다'라는 플롯을 가진 영화인 히치콕의 <현기증>(Vertigo, 1958)에서 왔다. 사실 <올드보이>에 더 가까운 근친 플롯은 브라이언 드 팔마의 <강박관념>(Obsession, 1976)에서 왔다고 볼 수 있다. 물론 히치 콕 영화 패러디를 잘하기로 유명한 드 팔아의 <강박관념>은 노골적으로 <현기증>을 패러디한 작품이다. 나중에 히치콕이 그 영화를 보고 '이건 리메이크나 마찬가지다'라고 화냈을 정도다. <강박관념>은 예전에 자기 때문에 아내와 딸이 죽었다고 생각하고 죄책감을 갖고 있었는데, 세월이 지나 우연히 아내와 닮은 여자를 만나 사랑에 빠지는 데, 알고보니 그녀가 자기 딸이라는 충격적인 반전이 있는 내용이다. 근친 관련한 그런 반전은 <현기증>과는 좀 다르지만, <올드보이>와는 매우 유사하다.
물론 그와 유사한 근친와 관한 반전 플롯은 알란 파커의 <엘젠 하트>(1987)에서도 이미 묘사된 바 있다. 기본적으로 그 플롯외에도 박찬욱은 히치 콕의 <현기증>의 영향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특히 <올드보이>중후반(80분 쯤)에 오대수가 예전 다니던 상록고등학교에 방문해 당시 우진이 누나와 있던 그 교실로 올라가는 장면의 교차편집은 히치 콕의 <현기증>의 중반과 후반에, 주인공 스카티라는 전직형사가 주디라는 여자를 쫒아 교회 종탑으로 가기 위해 계단을 오르는 장면과 매우 유사하다. 그 장면은 히치 콕에 대한 일종의 오마쥬처럼 보인다. 실제로 박찬욱은 한 인터뷰에서 대학시절 히치 콕의 <현기증>을 보고 푹 빠졌고, 그야말로 인생영화가 됐다고 한 적이 있다.
<올드보이>가 얼마나 좋은 영화인가를 알려면 이 작품을 리메이크한 미국판 <올드보이>(2013)와 비교하면 알 수 있다. 동일한 시나리오로 영화를 만들었음에도 스파이크 리 감독이 만든 <올드보이>는 박찬욱의 <올드보이>가 갖고 있는 수많은 장점이 거의 사라져 버렸다. 특히 <올드보이>는 오대수의 나레이션이 매우 의미있게 잘 사용된 바 있는데, 미국 리메이크작은 그게 빠지니 너무 평이해져 버린다. 거기에다 박찬욱 <올드보이>의 큰 장점중 하나인 유머감각까지 사라져 버려 그야말로 범작이 되었다. 그 외에 많은 시각적인 연출이나 배우들의 연기, 그리고 촬영 등도 박찬욱 영화보다 못하다. 처음엔 그래도 스파이크 리 감독이 할리우드에서 나름 성공했고, 나도 한때 그의 초기작을 좋아했기에 기대했었는데, 큰 실망이었다. 원작 판권을 사지 않고 <올드보이>를 거의 표절하다시피한 인도 영화 <진다>(2006)라는 영화는 평가할 가치도 없다. 박찬욱의 <올드보이>는 시나리오 뿐 아니라, 배우들의 연기, 시각적인 묘사, 편집, 그리고 액션 씬-특히 그 유명한 장도리 액션을 롱테이크로 촬영한 씬-까지 모든게 거의 완벽하게 연출해 냈다. 물론 박찬욱의 <올드보이>는 극단적인 근친 설정과 폭력 수위때문에 일부 관객들이 거부감을 나타내기도 했지만, 국내 극장에서 흥행을 했고, 수많은 국제영화제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타란티노를 비롯한 세계적인 감독들이 찬사를 표했다.
<올드보이>는 특히 플롯 아이러니를 절묘하게 잘 활용한 영화이다. 즉 관객은 초반이 이 영화가 오대수의 복수 이야기로 알고 보는데, 나중에 알고보면, 이우진의 복수 이야기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래서 영화의 전반부는 오대수의 복수극이지만, 후반의 이우진의 복수극으로 바뀌는 식의 플롯은, 나중에 나도 한번 써먹고 싶은, 흥미로운 플롯이다. 나는 <올드보이>를 여러번 보고 난 뒤, 박찬욱이 다시는 그런 걸작을 만들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영화역사상 최고의 걸작중 하나인 <시민케인>(1940)을 데뷔작으로 만든 오손웰스가 그랬듯이 말이다. 예상대로 나는 그 이후 박찬욱의 영화들은 그 다지 좋지 않았다고 보는 편이다. <친절한 금자씨>(2005), <사이보그지만 괜찮아>(2006), <박쥐>(2009), 그리고 미국에서 만든 <스토커>(2013)등 다들 내가 보기엔 너무 목에 기브스만 들어간 범작들이었다, 물론 가장 최근작인 <아가씨>는 그런대로 좋게 봤지만, <올드보이>와 비교하면, 여러 면에서 약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어느 순간 약 먹고 만든 것처럼 <올드보이>와 같은 미친 영화나 나오길 기대해 본다. 비록 내가 아는 후배가 너무 잘 나가는게 한때 질투가 좀 나기도 했지만, 이젠 그런 단계는 지났고, 요즘에는 세계적인 감독이 내가 한때 잘 아는 후배였다는 게 은근 자랑스럽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