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는 거울이다(10편): 본 시리즈 2-1
12년전, 나는 100억대의 한국형 액션스릴러 영화를 모 제작사와 계약까지 하고 준비한 적이 있다. 그 당시 나는 감독으로서 그 영화를 어떻게 연출할 것인지에 대해 본 시리즈등을 예로 들며 투자사에 가서 직접 PT를 해 따낸 프로젝트였다. 안타깝게도 투자사가 영화업을 접게 되면서, 그 영화는 엎어졌다. 지금도 좀 아쉬운 프로젝트였지만, 본 시리즈는 그 당시 내가 액션 스릴러를 공부하고자 분석했던 영화중 하나였다. 본 시리즈 2, 3편을 연출한 폴 그린그래스의 <블러디 선데이>는 2002년 베를린영화제 황금곰상을 받은 작품이다. 그 영화는 1972년 1월 시민권을 주장하며 평화시위를 벌이는 북아일랜드 데리 시민들을 영국군이 진압과정에서 13명을 학살한 사건을 다뤘다. 광주 5.18을 생각나게 하는 역사적 사건인데, 영화가 너무 리얼해 마치 내가 그 항쟁에 직접 참여한 느낌이었다. 그 영화의 다큐멘터리적 스타일을 너무 좋게 보았고, 나도 그런식으로 1980년 5.18 항쟁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에 시나리오를 쓴 바 있다. 즉 당시 군부의 학살에 저항한 시민들의 항쟁 10일간을 리얼하게... 하지만 이 작품은 200억 이상 들어야 하는 대작이라 감히 시도도 못하고 묻어두고 있다. 대신 최근에 독립영화 버전으로 써둔 시나리오로 <아들의 이름으로>라는 영화를 광주광역시의 지원으로 만들어 개봉했다. 그리고 아직도 나는 <블러디 선데이>같은 5.18영화를 만들고 싶은 꿈이 있다.
전 세계 관객들을 대상으로 하는 할리우드 입장에서 볼 때, 가장 쉽게 대중에게 접근할 수 있는 익숙한 장르의 틀을 사용하는 것은 당연한 선택이다. 할리우드에서 가장 인기 있는 장르는 공포, 액션, 스릴러, SF, 멜로, 코미디 등 다양하지만 그 중에서 가장 오랫동안 끊임없이 진화를 거듭하면서 지속되고 있는 장르는 액션(action;活劇)과 스릴러(thriller)일 것이다. 액션은 무성영화 시대부터 주로 고전이나 역사소설을 바탕으로 한 사극 액션 <마크 오브 조로>(1920)나 <삼총사>(1921), <로빈 후드>(1923)등이 만들어지면서 본격 시작되었고, 스릴러는 영국에서 건너 온 히치콕감독에 의해 거듭 발전되어 왔다.
현대에 와서 액션은 스릴러와 결합하기 시작하였고, 이제 ‘액션 스릴러'는 할리우드 영화의 대표 장르가 되다시피 하며 대중의 큰 인기를 누리고 있다. 특히 수십 년에 걸쳐 만들어진 007 시리즈는 장르로서의 액션 스릴러가 시대를 초월해 얼마나 대중들의 지지를 받고 있는지를 확실히 입증한다.스파이 액션 스릴러 007 시리즈는 1962년 <Dr.No>(살인번호)>부터 ,최근 2021년 <NO TIME TO DIE>까지 총 25편까지 제작되었다. 과거 할리우드 액션은 주로 총이나 칼, 차량, 또는 살상병기 등을 이용하였으나 21세기엔 홍콩 액션영화의 영향을 받아 맨손 주먹과 주변 일상 도구를 활용한 거친 액션이 추가되어 더욱 강력한 액션 스릴러로 거듭나고 있다. 이 글에서 주요 텍스트로 언급할 '본(Bourne) 시리즈'의 경우가 특히 그렇다.
본 시리즈는 기존 007 시리즈를 현대적 감각으로 재해석한 첩보 액션 스릴러라고 할 수 있다. 007의 제임스 본드처럼 특수 정보요원의 활약을 다루고 있지만, 그 내용이나 형식면에 있어선 차별화 된다. 007 시리즈가 히치콕의 <해외 특파원>(Foreign Correspondent, 1940), <북북서로 기수를 돌려라>(North By Northwest,1959)등과 같은 스릴러 영화들에 보다 강렬한 액션과 화려한 볼거리를 가미해 포장한 영화라면, 본 시리즈는 007 시리즈의 화려한 겉치레와 과장된 액션의 힘을 빼고 대신 주인공의 내면 심리묘사와 보다 극적인 리얼 액션을 강조해 변화해 가는 현대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은 시리즈 영화다. 그 대중적인 성공은 일단 수치로도 확인된다. 본 시리즈 3부작은 1, 2편만으로도 전 세계에서 5억 달러 이상 벌어들이고 DVD 역시 폭발적인 판매기록을 세웠고, 3편 <본 얼티메이텀>에선 당시 역대 8월 개봉작중 최고의 오프닝 수익으로 3일 만에 총제작비를 회수할 정도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
본 시리즈의 중요한 가치는 다른 시리즈와 달리 비평에서도 큰 찬사를 받았다는 점이다. 롤링 스톤지의 피터 트래버스는 “만일 당신이 유머와 스타일, 그리고 스마트함을 갖춘 빠른 속도의 액션 영화를 보고 충격 받은 지가 오래되었다면, 바로 이 영화를 보시라.” 라고 했고, 시카고 트리뷴의 마이클 윌밍턴은 “훌륭하게 계획되고 만들어진 스릴러의 완벽한 사례에 가까이 다가간 영화.”라고 찬사를 보냈다. 특히 영화 관련 유명 사이트인 엠파이어 닷컴에서는 2007년 개봉영화중 가장 뛰어난 영화로 <본 얼티메이텀>을 선정했을 정도였다. 실제 영화를 본다면 그런 찬사를 실감할 수가 있다. 본 시리즈는 그야말로 과거의 액션 스릴러의 기본적인 규범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진화해 가는 할리우드 액션 스릴러의 모범 사례를 잘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물론 본 시리즈는 현재 5부작까지 나왔다. 1편 <본 아이덴터티>(The Bourne Identity,2002), 2편 <본 슈프리머시>(2004, The Bourne Supremercy), 3편 <본 얼티메이텀>(2007, The Bourne Ultimatum) 4편 <본 레거시>(The Bourne Legacy, 2012), 5편 <제이슨 본>Jason Bourne (2016)인데, 이중 2, 3, 5은 폴 그린그래스가 감독했다. 여기서 주로 언급할 영화들은 초기 3부작까지다. 이 시리즈를 집중 분석함으로서 최근 할리우드 액션 스릴러의 힘과 그 원리가 무엇인지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본다.
본 시리즈는 1980년 출간되어 미국에서만 500만부 판매기록을 올린 로버트 러들럼(Robert Ludlrum, 1927-2001)의 3부작 첩보 스릴러 소설이다. 로버트 러들럼은 당시 톰 클랜시와 더불어 미국 문단계의 톱 클라스 작가로 냉전 시대에 제이슨 본 시리즈를 완성하였다. 1988년 TV 영화로 만들어진 적이 있지만, 1부 <본 아이덴터티>에서 끝났다. TV영화는 1988년 2부작(185분)으로 만들어졌고, 국내에선 <저격자>란 제목으로 방영되었다. 하지만 그의 소설은 본 시리즈의 열혈 팬인 덕 리먼 감독이 원작자 러들럼을 설득한 끝에 판권을 따내 유니버셜 스튜디오에서 제작할 수 있었다. 유니버셜은 덕 리먼이 감독한 1부 <본 아이덴터티>(The Bourne Identity,2002)가 큰 성공을 거두자, 즉시 2편을 기획하였고 덕 리먼은 제작총지휘로 물러나고 <블러디 선데이>(Bloody sunday,2002)를 감독한 영국출신의 폴 그린그래스(Paul Greengrass, 1955생 )를 영입해 2편 <본 슈프리머시>(2004, The Bourne Supremercy), 3편 <본 얼티메이텀>(2007, The Bourne Ultimatum)을 완성해 시리즈를 마무리하였다.
본 시리즈 성공의 1차적인 공헌은, 폴 그린그래스가 2편의 연출을 제안을 받고나서 1편 <본 아이덴터티>를 보고 칭찬했듯이, 덕 리먼 감독(Doug Liman, 1965~)에게 있다. 하지만 역시 본 시리즈의 최종 공헌자는 바로 2, 3편을 연출한 폴 그린그래스 감독이다. 왜냐하면 시리즈 영화들이 1편보다 부족한 속편을 만드는 경우가 흔한데, 본 시리즈의 경우 폴 그린그래스가 참여함으로서 오히려 전편을 능가하는 속편을 만들어 내어 시리즈를 훌륭하게 마무리하였기 때문이다. 특히 그는 본 시리즈를 통해 자신이 이전에 작업해 왔던 독립영화적인 연출 스타일을 할리우드식 장르영화에 성공적으로 접목하여 새로운 차원으로 업그레이드된 액션 스릴러를 만들었다. 본 시리즈의 매력은 ‘코믹북의 슈퍼 히어로가 아닌 어드벤처를 통해 동시대적인 이슈를 다룬다는 것’이었다고 말한 그린그래스는 <본 슈프리머시>가 주류에서 작업한 첫 영화였는데도 ‘아무도 내게 어떻게 만들어야 한다고 지시하지 않고 많은 자유가 주어졌다.’고 말했다. 결과적으로 본 시리즈 2, 3편은 제작자가 재능 있는 비주류 독립영화 출신 감독에게 주류영화를 맡기면서 나름의 자유를 주고 신뢰했기 때문에 기존 할리우드의 고루한 액션 스릴러 장르 관습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본 시리즈의 차별화는 유사한 컨셉트인 007 본드 시리즈와 비교해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일단 본 시리즈는 겉치레 보다는 리얼리티를 강조한다. 그러다 보니 화려한 타이틀 시퀀스도 없고, 늘씬한 미녀인 소위 본드 걸과 벌이는 야릇한 로맨스 신도 거의 없다. 관광명소의 화려한 볼거리에 치중하기 보단 공간의 리얼리티에 관심이 더 많다. 주인공 본은 본드보다 덜 멋있고 신무기도 없고, 리얼 액션으로 실감나게 상대와 격투 신을 벌이지만 훨씬 더 친근감 있고 공감이 간다. 스토리 전개는 쉴 틈 없이 속도감 있게 전개된다. 물론 최근 <카지노 로얄>(2006)이후 007 시리즈도 주인공의 맨몸 리얼 액션을 강조하고 스피디하게 전개되고 있긴 하지만 여전히 과장되고 인위적이다. 본 시리즈가 이전 첩보 액션 스릴러와 특히 다른 점은 외적인 사건의 흐름보다는 주인공 내면 의식의 흐름을 쫒아가면서 거대권력의 모순을 심도 있게 비판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실존적인 자아’를 찾아 가는 주인공의 고된 여정은 액션 스릴러의 특성인 시각적인 액션의 현란함과 긴장감 못지않게 심리적인 갈등 요소로 인해 보다 깊은 울림을 주게 된다.
무엇보다도 본 시리즈가 단순한 할리우드 액션 스릴러에 그치지 않고 나름대로 스타일이 강한 블록버스터가 될 수 있었던 데에는 감독들의 공헌 못지않게 프랭크 마샬이란 제작자의 안목과 역량도 크다. 그는 2부 <본 슈프리머시> 스토리 개발 작업을 하면서 여기에 맞는 적당한 새 감독을 찾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고, 작가 토니 길로이의 소개로 폴 그린그래스(이하 폴)를 만날 수 있게 되었다. 마샬은 그가 만든 영화 <블러디 선데이>를 본 후, 매우 리얼하고 마치 자신이 현장에 있는 것 같은 최고의 느낌을 받았다고 격찬하며 바로 연출을 제안했다고 한다. 토마스 샤츠는 할리우드 장르의 구조를 분석하면서 할리우드 시스템에 확립된 ‘피드백’순환은 성공적인 스토리와 테크닉의 반복을 촉진시킨다면서 영화작가들의 창조적 충동은 그러한 관습과 관객의 기대에 의해 둔화된다고 논한 바 있지만, 적어도 본 시리즈에서는 제작자와 감독의 절묘한 정서적 교감 덕에 영화작가의 창조적 충동이 진화한 드문 케이스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본 시리즈 1편 <본 아이덴터티>는 기억상실증에 걸린 비밀요원 본(Bourne)이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이야기이고, 2편 <본 슈프리머시>는 제이슨 본이 연인 마리가 본부에서 보낸 암살요원에게 피살당하자 그녀의 복수를 하는 이야기이자 자신이 과거에 저지른 범죄에 대한 속죄를 구하는 이야기다. 그리고 3편 <본 얼티메이텀>은 본이 자신이 왜 언제 암살자가 되었는지 그 최초의 기억과 공간을 찾아가는 여정을 그린다. 이와 같은 스토리의 본 시리즈는 각각 별 개의 작품으로 봐도 무방하지만, 서로 연결된 한 작품으로서 봐야 훨씬 그 묘미를 느낄 수 있다. 그들 시리즈는 매우 유기적인 관계를 갖고 있어서 1, 2편에서 의문스러웠던 문제의 많은 부분들이 3편에서 해결되고 있기도 하고, 앞의 시리즈를 봐야 뒤의 시리즈가 더 재미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1편에서 암살요원이 죽기 직전 본에게 ‘우릴 봐! 그들이 당신에게 뭘 한 건지 보라구!(Look at us! look at what they make you give)’라고 자조적으로 한 대사를 3편 마지막에서 본이 자기를 죽이려는 다른 암살 요원에게 1편 요원의 그 말을 인용해 말한다. 그것은 주제와 관련된 매우 중요한 대사로 1편을 봐야 3편의 그 대사가 얼마나 아이러니한지 알게 된다. 그리고 2편의 라스트 신에서 본부의 랜디가 본과 통화하면서 그의 본명과 생년월일을 가르쳐 주며 끝맺는데, 3편에 가면 그 상황이 다른 시각에서 반복된다. 즉 본명은 맞지만 그녀가 2편에서 알려준 그 숫자는 본의 생년월일이 아니라, 그가 처음 교육받았던 특수연구실험실 주소였던 것이다. 그 장면 역시 2편을 보고나야 3편의 상황이 멋진 반전이라는 것을 실감할 수 있다.
기존의 액션 스릴러 시리즈 작품들은 마치 시트콤처럼 상황과 고정된 주인공 캐릭터와 공식화된 구성, 그리고 그 시리즈를 특징짓는 일정한 규칙을 유지 하면서도 각 시리즈의 스토리는 전편의 내용과 큰 연결고리 없이 독립적으로 만들어지곤 했다. 거기에 반해, 본 시리즈는 <대부>시리즈처럼 각 작품의 스토리가 상호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완결된 영화다. 그래서 각 작품을 별도로 언급하는 것 보단 세 편의 시리즈 작품을 묶어서 한 편처럼 이야기하고 분석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본다. 다소의 차이는 있겠지만, 할리우드 영화는 대부분 제작사에서 먼저 작품을 기획하고 시나리오까지 만든 후 감독을 섭외하는 경우가 많다. 물론 본 시리즈 1편은 덕 리먼이 판권을 확보해서 제작사를 찾아간 특별한 경우긴 하지만, 2, 3편의 폴 그린그라스 감독의 경우엔 그런 일반적인 관례를 따랐다고 볼 수 있다. 그러기에 연출의 영역은 스토리나 시나리오가 나온 이후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된다고 볼 수 있다. 물론 감독이 정해지면 이미 나온 시나리오일지라도 그 방향은 각색을 통해 수정되어질 수 있다. 일단 감독이 정해지고 계약되면 감독의 연출이 시작된다고 볼 수 있다. 물론 그 권한 역시 사안에 따라 다양하지만, 적어도 본 시리즈는 감독 전작의 스타일과 완성도를 보고난 제작자의 믿음에서 출발해서인지, 폴의 언급처럼 최대한 연출의 자유가 주어졌고 결과적으로 스타일리쉬한 영상이 창조된 것이다.
연출을 분석하기 위한 첫 단계는 시나리오다. 감독은 영화의 기본 뼈대가 되는 시나리오를 통해 주제와 캐릭터에 대한 견해, 그리고 일종의 연출 스타일 기반까지 구축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딕 리먼 감독은 시나리오 작가 토니 길로이를 내세워 작업하면서 원작에서 기본 설정과 캐릭터만 가져오고 많은 부분을 과감하게 수정했다. 토니 길로이(Tony Gilroy,1956생)는 풀리쳐 상을 받은 작가 프랭크 D.길로이의 아들이기도 한데, <돌로레스 크레이븐>(1995), <아마겟돈>(1999)등으로 할리우드에서 명성을 날린 시나리오 작가다.
1980년도에 출간된 소설 <본 아이덴터티>는 냉전시대를 배경으로 한 작품이었다. 비교적 원작에 충실하게 따라간 1988년 TV영화를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그런데 <본 아이덴터티>의 감독과 작가는 기본적으로 소설의 원래 배경인 20년 전의 냉전시대를 현대적 상황으로 바꾸고, 주인공 본이나 여타 캐릭터들도 예전처럼 이분법적인 선악구도가 아닌 본성적인 접근을 통해 그야말로 21세기형 인물을 재창조해 내는데 주력을 기울였다. 토니 길로이는 아예 소설을 읽지 않고 감독이 작성한 기본 시놉시스만을 토대로 시나리오를 작업하였다고 한다 예를 들어, 루들럼의 원작에서 중요하게 등장한 카를로스라는 국제적인 암살범은 아예 삭제하였고, 제이슨 본도 실제 다른 제이슨 본이라는 인물의 신분(identity)을 빌려와 성형을 한 캐릭터라는 설정이었는데, 그런 부분을 딕 리먼의 시나리오에선 모두 없애 버렸다. 본 시리즈에서 본을 제거하려고 혈안이 된 트레드스톤의 책임자인 에보트(Ward Abbott; Brian Cox)라는 인물도 원작에서는 오히려 본의 아버지 같은 존재로 본이 배신했다고 믿는 정부 관료들을 설득하려고 애쓰다 죽는다. 본과 동행하게 되는 마리라는 여자도 다소 다르게 묘사된다. 원작에선 초기에 본의 인질이 되어 끌려 다니다 결국 둘이 사랑에 빠지지만, 덕 리먼의 영화에서는 일시적인 계약관계로 만나 같이 다니다 사랑에 빠지고 마지막엔 그녀를 떠나보낸 뒤 혼자서 CIA와 대결하며 자신의 정체성의 일부를 확인한 뒤 다시 둘이 만나면서 끝난다. 이런 식으로 캐릭터와 기본 스토리 뼈대만 남기고, 자기 정체성을 찾아 헤매는 본의 캐릭터를 중심으로 한 각색은 결과적으로 새로운 현대 액션스릴러로서 영화적인 완성도를 가져온 계기가 되었다.
불확실한 자아 정체성, 선악에 대한 모호성, 거대 권력의 이중성 및 비윤리성이 본 시리즈에서 중요하게 다뤄진 주제다. 1부 프롤로그에서 총을 맞은 채 선량한 선원에게 구조된 주인공 본은 그저 피해자이자 착한 사람처럼 보이지만, 그가 정체성을 찾아 기억을 회복해 갈수록 그 자신이 가해자인 암살범이었음을 알게 된다. 그래서 그가 자신으로 인해 억울하게 희생당한 가족에게 속죄할 때쯤이면 관객은 그에게 동정심을 갖게 된다. 하지만 3부 마지막에 기억을 최종적으로 회복했을 때, 주인공은 원래 잔인한 인물로 인간병기가 될 것을 자청했던 군인이었음이 드러난다. 결국 그의 진정한 자아는 무엇인가? 선한 자인가? 악한 자인가?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기억상실 덕분에 인간성과 도덕성을 회복하게 된 것이다.
시리즈는 그가 이제 인간미와 도덕성을 회복한 좋은 영웅이 될 가능성을 보여주며 끝내지만 또 어떻게 알 수 있을 것인가? 또다시 그가 현재 자신의 기억을 잃어버리고 다시 과거의 악마성만 회복된다면? 인간의 본성은 환경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음을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듯하다. 폴 그린그래스는 본 시리즈를 ‘정체성을 찾아나서는 이야기, 정확히는 도덕적 정체성에 관한 질문’이라고 하면서 ‘애초부터 그가 살인자인가? 아니면 살인을 하도록 의도된 존재인가?’바로 이런 질문이 본 시리즈를 단순한 액션 첩보물에서 한 발자국 더 나아가게 해준 것이라고 하였다. 본의 정체성 외에도 거대 권력의 이중성과 비윤리성도 시리즈 전반에 흐르는 또 다른 주제다. 시리즈에 걸쳐 가장 중요한 갈등은 자신의 정체성을 찾으려는 주인공 제이슨 본과 조직의 비리가 드러날까 봐 그런 그의 시도를 막고 죽이려는 미국 정보부 CIA와의 대립이다. 애국을 빙자해 세계를 무대로 작전을 펼치던 정보 권력은 한때 자신들의 도구로 이용했던 요원이 걸림돌이 작용하자 바로 제거하고자 한다. 세계 평화와 자유를 내세우면서 자국을 위해서는 물불을 안 가리는 미국 대표 정보기관의 비윤리성과 이중성에 대해 본이라는 고독한 영웅을 통해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본 시리즈는 크게 보면 액션 스릴러지만 좀 더 세부적으로 따져보면 ‘첩보 미스테리 액션 서스펜스 스릴러’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대부분의 첩보 액션 스릴러 영화는 어느 정도의 미스테리 코드를 갖고 가지만 본 시리즈의 경우 기억상실증에 걸린 주인공이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간다는 설정으로 인해 특히 미스테리가 강하다. <본 아이덴터티>의 경우, 바다에서 총에 맞고 구조된 주인공이 기억상실증에 걸린 것으로 드러나면서 과연 그의 정체성은 무엇인가? 그리고 본과 관련된 CIA 본부(이하 본부)의‘트레드스톤 작전’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왜 본부에선 본을 죽이고자 하는가? 등등의 미스테리가 하나씩 주어지고 그리고 조금씩 스토리 진행과정에서 그 비밀을 풀어나간다. 그리고 그 해결 과정은 액션 스릴러를 통해 보인다. 2부에서도 그 미스테리는 계속 주어진다. 또다시 본에게 악몽처럼 떠오르는 기억의 파편의 진실을 무엇인가? 그리고 왜 본부는 자기를 계속 죽이려 하는가? 그리고 7년 전 본부의 비밀 자금 2천만 불을 횡령했던 사람은 누구인가? 3부는 그 동안 쌓인 미스테리를 해결하는 데 주안점을 두고 있다. 결국 3부는 본의 정체성을 최종 확인시켜 주고, 본부 자금의 횡령에 관한 미스테리를 풀어주며 마무리된다.
하지만 원작에 충실한 로저 영의 TV영화와 비교해 보면, 본 시리즈 영화는 미스테리보다 스릴러를 강조하고 있다. TV 영화는 초반에 기억을 잃은 본에 대해 그가 원래 누구였는지 본인과 관객도 전혀 예상할 수 없는 미스테리로 시작한다. 하지만 덕 리먼의 영화에선 초반에 CIA 본부를 미리 보여주며 본의 정체성이 그 본부와 관련 있음을 미리 암시하면서 서스펜스 스릴을 더 강조한다. 무엇보다도 원작이 첩보 미스테리 스릴러 소설 특유의 ‘음모’에 비중을 둔 것과 달리, 영화에선 ‘액션’과 ‘스릴’에 큰 비중을 둔다. 가령 1988년 TV 영화에선 액션은 총에 의한 사격과 고전적인 격투신이 대부분이고, 차량 추격신은 매우 약하게 묘사되고 있지만 딕 리먼의 영화뿐 아니라 폴 그랜그래스의 2, 3편에선 총과 맨몸 액션 뿐 아니라 차량을 이용한 추격 신이 핵심 요소로 매우 극적이고 리얼하게 묘사되고 있다. 특히 본 시리즈에서 액션 스릴러란 장르 세팅을 확실하게 하기 위해 로맨스 신 연출을 절제시킨 것은 뛰어난 선택이었다. 사실 나름대로 장점도 있었던 로저 영의 TV영화의 가장 치명적인 단점은 본과 마리의 지나치게 전형적인 러브신이었다. 여자의 벗겨지는 몸매를 너무 길게 보여주고 그들의 사랑을 과장되게 포장하였다. 그와 달리 본 시리즈 1편에선 마리와 본이 욕실에서 머리를 염색한 후 간접적으로 표현되는 애정 신이 뛰어나다. 또한 3편에서 니키와 본이 카페에서 나눈 대화‘당신과 일할 때, 굉장히 힘들었어. 정말 어떤 것도 기억이 안나요?’하는 식으로 예전에 본이 기억을 잃기 전 둘 사이에 애정관계가 있었을 거라는 암시만 주는 표현도 애틋해 보일 정도로 절제되고 자연스럽게 잘 표현 되었다.
좋은 시나리오는 작업 단계에서 드라마 구축을 위해선 모티프, 아이러니, 반전 등이 필수적으로 활용된다. 특히 스릴러 영화에서는 지속적인 스토리 몰입을 위해 히치콕 식의 매커핀(MacGuffin)이 자주 사용된다. 본 시리즈 전편에서는 ‘기억상실증’이 핵심 매커핀으로 사용되고, 극의 몰입을 유도하는 부수적인 모티프로는 작전명인 ‘트레드스톤’과 ‘블랙브라이어’, 그리고 ‘도청장치’ ‘핸드폰’등이 사용된다. 그 외에도 1부에선 은행계좌의 돈, 유인과 함정, 배신이 2부에선 CIA 자금 2천만불의 횡령사건과 마리의 죽음이 이야기를 끌어가는 주요 모티프가 되고, 본의 뒤집어 쓴 히치콕 식의 누명도 일종의 상황의 모티프 역할로 활용 된다. 3부에선 본과 정보국의 비리가 담긴 비밀서류, 정보 누설, 그리고 본의 정체성을 마지막으로 밝혀줄 특수연구실험실이 주요 모티프 역할로 사용된다. 본 시리즈에서 주요 아이러니는 자기가 자신을 스스로 추적해간다는 설정과 헌신한 조직으로부터 오히려 자신이 쫒기는 상황이다. 그리고 결국 피해자라고 생각했던 자신이 가해자였다는 것도 커다란 아이러니로 극적인 힘을 강화시켜주는 역할을 한다. 반전의 경우, 전형적인 할리우드 영화들처럼 대반전에 대한 집착은 없다. 단지 에피소드식 반전을 수시로 활용한다. 가령 1편의 경우, 후반에서 킬러가 본을 암살하러 나타난 줄 알았는데, 간부요원인 콘클린을 암살한다거나, 2편에서는 본이 책임자 에보트를 만나 그로부터 본부자금 횡령에 대한 대화를 나눈 뒤, 나중에 그것을 녹음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것, 3부는 랜디가 예전에 본에게 알려줬던 생년월일이 실은 본의 정체성을 알려줄 장소의 특수실험실의 방 번호라는 사실 등, 이런 것들이 매우 효과적인 반전으로 활용되었다.
본 시리즈가 기존의 액션스릴러와 크게 차별화된 요소 중 하나는 편집인데, 시리즈 세 편을 통 털어 1분 이상의 롱 테이크는 찾기 힘들 정도로 빠르다. 1편에서는 도입부만 30여초 정도의 숏(shot) 정도만 있을 뿐이다. 대부분의 숏이 드라마 신(scene)에서는 4초에서 10초, 액션 신에서는 0.5초에서 4초 마다 분할된다. 1편 <본 아이덴터티>는 액션 신을 빼고는 대체로 기존의 액션 스릴러 장르의 편집 스타일을 따른다. 하지만 폴의 <본 슈프리머시>와 <본 얼티메이텀>은 마치 뮤직비디오처럼 매우 빠르게 컷이 연결된다. 가령, 장면이 바뀔 때 새로운 공간을 보여줄 마스터 숏에서 대개 최소한 5초 정도의 여유를 주는 게 일반적인데, 그런 숏마저 3, 4초 정도에서 끊고 바로 구체적인 상황 속으로 들어간다. 폴 그린그래스의 그런 에이젠스타인 식의 몽타주는 핸드 헬드 촬영과 함께 하나의 스타일이 되어 버렸다. 10여 년 전이었다면 아마 관객들이 쉽게 적응 못했을 편집 방식이다. 하지만 요즘 젊은 관객들은 워낙 빠른 뮤직비디오나 CF등 영상속도에 길들여져서인지 쉽게 적응하고 오히려 그 속도감에 찬사를 보내는 것 같다. 일반적인 액션 스릴러에서 그런 빠른 편집은 대부분 액션 장면에서만 사용하고, 그 외 드라마 장면에선 크레인 숏을 이용해 롱 테이크를 쓰거나 트랙을 이용하여 감정을 끊지 않고 길게 찍는 경우가 많고 그런 긴 숏의 연결(편집)을 통해 감정의 기복을 자연스럽게 조절한다. 하지만 본 시리즈에서는 영화 전반이 일관된 톤으로 빠르게 편집된다.
그렇다면 왜 본 시리즈는 이런 식의 편집을 의도적으로 사용했을까? 그리고 그런 게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질 수 있었을까? 그건 바로 주인공의 캐릭터 및 전체적인 주제와 관련이 있다. 즉 주인공의 기억상실증으로 인해 파편화된 그의 분리된 기억을 강조하기도 하면서, 하나의 상황에 대해 다양한 각도로 나눠 보여줌으로서 의도하는 이중적인 시각 때문이다. 2편 도입부인 인도 고야에서 본과 마리가 킬러에게 쫒기는 차량 추격 신은 3분 15초 가량 진행되는 데, 총 144 숏이 소비된다. 1숏 당 평균 1.3초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을 정도로 편집된다. 3편에 가서는 더욱 빨라진다. 후반 뉴욕 도심 차량 추격 신에선 3분 40초 동안 247숏이 소모되는데, 그것은 1숏 당 0.9초 정도로 편집이 된다. 그런 편집은 스릴러의 긴박성을 강조하고, 액션의 속도감을 높이는 역할을 하고 있다.
폴의 또다른 편집 스타일은 평행 몽타주이다. 영화는 본을 중심으로 끌고 가면서도 끊임없이 그를 쫒는 본부와 암살요원들의 모습을 교차하여 보여준다. 어느 한쪽만 일방적으로 보여주기 보다는 상호 적대적인 개인과 집단을 모두 보여줌으로서 나름대로 객관적인 균형을 유지하며 보다 본질적인 측면을 드러내고자 애쓴다. 본을 부당하게 제거하려는 정보 집단인 CIA 본부를 단지 비판대상으로만 그리지 않고 그 안에도 파멜라 랜디같이 본의 진심을 이해하고 지키려는 의인이 있다는 것도 보여준다. 폴의 그런 편집 방식은 전작 <블러디 선데이>와 매우 유사하다. 그 작품도 비폭력 평화행진을 준비하는 아일랜드 시민 측과 무력진압을 준비하는 영국군의 모습을 초반부터 계속 평행 몽타주로 보여준다. 결국 그런 식의 편집은 결과적으로 한쪽 편의 시점만으로 묘사하는 것보다 훨씬 주제에 대한 설득력이 강함을 알 수 있다. 3편의 최고 명장면인 영국 워터루역도 본이 기자 로스와 접선하는 신에 대한 묘사는 1숏당 평균 1.5초 정도로 편집(7분 30초 동안 301숏)이 될 정도로 빠르다. 그 신은 액션보다는 서스펜스 스릴러가 주는 힘이 매우 강한데, 그 동력이 바로 본과 기자, 킬러, 그리고 본부의 빠른 평행 몽타주 편집이다. 모로코 탄지에르 주택가에서 본과 니키, 킬러, 경찰의 추격신은 약간 더 빠르다. 1숏당 평균 1.4초 정도(8분 19초 동안 363숏)로 편집된다. 이렇듯이 본 시리즈에서 감독의 편집 방식은 하나의 시각적인 스타일로 본 시리즈를 진화한 액션 스릴러로 만드는 데 일조하고 있다. (다음 편에 계속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