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에서 생활연기와 연출 2-1
우리 한국영화는 1990년 내가 데뷔할 무렵, 대부분 후시녹음이었던 한국영화가 동시녹음으로 막 바뀌어가는 시기였다. 내 데뷔작 <부활의 노래>(1991)는 후시녹음이었지만, 다음 작품 <두 여자 이야기>(1994)는 동시녹음이었다. 동시녹음은 배우들의 연기패턴을 바꾸었다. 자기 목소리로 연기하기에 좀 더 자연스런 생활연기가 가능했다. 그 이전에는 아무리 연기를 잘해도 후시녹음에서 전형적인 목소리가 들어가는 경우가 많아 아무래도 어색함을 온전히 감출 순 없었다. 한국영화 제작시스템이 동시녹음체재가 되면서 배우들도 점차 세대교체가 되기 시작했다. 1990년대 단역급으로 시작해 나중에 주연급으로 올라서게 된 송강호의 리얼한 생활연기는 그야말로 동시녹음 시대의 산물이다. 물론 아직도 일부 영화나 TV드라마는 전형적인 연기 톤을 유지하는 배우들과 감독이 있지만, 이젠 분명 생활연기 연출이 대세다. 그래서 난 2000년부터 대학 영화과의 연기전공과 연출 전공 학생들을 가르치는 선생이 되었는데, 그때 학생들과 연극의 에쭈드에 기반한 즉흥연기로 영화를 찍는 작업을 시도했고, <연기연습>(2006)을 비롯 몇편의 단편 사례를 바탕으로 '생활연기와 연출을 위한 훈련프로그램'에 관한 논문을 썼다. 그리고 내가 만든 그 훈련프로그램을 이용해. 여러차례 학생들과 작업을 했다. 지금 유명 스타가 된 제자 유연석과 이무생등이 모두 그런 과정을 거쳤다. 나중에 광주에서 순수 아마추어인 시니어분들과 작업을 하기도 했다. 여기에 싣는 글은 내 논문을 알기 쉽게 수정 정리한 것이다.
문학에선 작가의 상상력이 펜으로서 구현되고, 연극이 배우로서 구현된다면, 영화는 카메라와 배우로 감독의 상상력이 구체화 된다. 영화는 그 역사가 다른 예술에 비해 상대적으로 짧은 탓에 초기에 여러 면에서 연극이나 문학 등에 크게 의지하였는데, 특히 영화에서 배우의 연기는 대부분 연극의 전통을 그대로 흡수하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클로즈 업과 사운드의 전달력 등과 같은 영화 매체의 특성으로 인해 영화 연기는 연극 연기와 다르다는 것을 인식하기 시작했고, 좀 더 일상에 가까운, 연극연기와는 차별화된, 영화 연기가 선보이게 되었다. 이미 영화적인 특성에 맞는 연기에 대한 연구와 실제 활용은 몽타주 이론을 창안하고 체계화한 에이젠스타인이나 클레쇼프, 프도프킨 등과 같은 러시아 영화감독들에 의해 시작되었고, 사운드가 본격적으로 도입된 1930년대부터 할리우드를 비롯한 전 세계 영화들에 적용되었다.
본격적인 영화연기 교육 시스템의 기초는 ‘삶 그 자체를 무대로 가져오는 것’을 강조하며 배우들이 연기를 사실적이고 개연성 있게 하도록 훈련시킨 러시아의 연극 연출가 스타니슬랍스키(Stanislavski)의 연기론에서 출발한 리 스트라스버그의 메소드 연기에서 확립되고 발전되었다고 할 수 있다. 21세기 들어 디지털 시대가 오면서 영상은 영화, TV, 인터넷, 아이폰 등 모든 부분에서 일상화되고 있기에 더 이상 연극 연기의 아류가 아닌 영화 연기만을 위한 교육 훈련 시스템이 체계화되고 일반화될 필요가 있다. 영화가 진정으로 감독의 예술이 되려면, 카메라 외에도 배우와 어떻게 소통하고 그의 영화 연기를 어떻게 연출할 것인가에 대한 공부와 훈련은 매우 중요하다. 사실 이글의 목적인 영화연기와 그러한 연기의 연출을 위한 훈련 프로그램 연구는, 영화감독이자 영화 교육자로서, 이 같은 상황을 방관했던 것에 대한 일말의 책임을 느끼고 일종의 반성에서 출발한 것이다. 그래서 영화 연기에 관한 막연한 이론적인 서술 보다는 구체적인 텍스트를 만드는 과정과 실례를 통해 어떤 방식이 영화 연기와 연출의 훈련 프로그램으로서 유용한 지를 연구함과 동시에, 그에 대한 실용적인 대안을 제시하고자 한다.
참고로 여기에서 실례로 든 주요 텍스트인 단편영화 <생활연기의 힘>과 <연기연습>은 실제로 필자가 대학원과 학부에서 연기를 전공하는 학생들과 매체 연기와 연출에 관한 수업의 일환으로 창작한 워크숍 작품이다. 이 수업 과정으로 얻어진 긍정적인 결과와 부분적인 시행착오를 통해 이 논문의 최종 목적인 ‘영화 연기와 연출을 위한 훈련 프로그램’의 실질적인 방법론을 도출해 내고자 한다.
<시티 오브 갓>(2002, City of God)이란 영화가 있다. 1960~70년대 브라질의 수도 리오데 자이네로의 빈민가에서 실제로 벌어진 사건을 배경으로 만든 갱스터 영화인데, 브라질의 페르난도 메이렐레스(Fernando Meirelles, 1955생)감독의 데뷔작이다. 그 작품은 당시 전 세계 영화제에서 50여개의 상을 수상하고, IMBD (2010년 5월 기준)에서 2000년대 10년간 만들어진 세계영화 중 <다크 나이트>(2008), <반지의 제왕; 왕의 귀환>(2003)에 이어 걸작 3위에 오를 정도로 대단한 평가를 받았다. 아틀란타 저널의 밥 론지노가 ‘스콜세지의 <좋은 친구들, Good fellas> 이후 최고의 갱스터 영화다’라고 찬사를 보낼 정도로 대다수의 평론가들로부터도 격찬을 이끌어낸 그 영화의 가장 큰 장점은 배우들의 리얼한 연기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그런 사실주의적인 연기를 해낸 배우들은 연기경력이 전혀 없는 비전문배우들이라는 점이다. 단지 그들은 영화를 위해 짧은 기간 동안 연기 수업을 받았을 뿐이다. 감독 메이렐레스는 영화의 현실감을 주기 위해 애초부터 비전문 배우를 기용할 생각을 갖고, 영화 배경이 되는 빈민가(소위 ‘신의 도시’라 불리는)에 정통한 전문가 카티아 룬드를 공동감독으로 영입하였다. 그리고 카티아 룬드를 통해 빈민가에 연기학교를 열어 1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들어온 200여명의 아이들과 함께 6개월간 연기 수업을 진행하면서 최종적으로 <황금의 문>이라는 실습 단편을 만들었다.
2008년 깐느 영화제의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로랑 캉테의 <더 클래스>(the Class) 역시 최고 미덕은 아마추어 배우들의 리얼한 연기다. 교직 경험을 살려 원작 소설을 쓴 작가 프랑수아 베고도를 직접 주인공으로 캐스팅한 감독은 파리 20구역에 있는 돌토 중학교를 촬영장소로 선택한 후, 오디션을 거쳐 실제 그곳에 재학 중인 학생들과 근무 중인 교사들까지 모두 연기자로 끌어들였다. 이 영화 역시 지속적인 워크샵을 통해 연기 경험이 없는 출연진과 적극적으로 상호작용한 결과물이다. 영화 <클래스>의 형식은 아마추어 연기자들의 활력을 최대한 끌어내는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직업 배우가 아니기에 반복적인 연기가 힘든 상황에서, 기동성 좋은 여러 대의 카메라로 동시에 핸드 헬드로 근접 촬영한 뒤, 편집에서 액션과 리액션을 오가는 비교적 짧은 쇼트들을 속도감 있게 이어붙임으로써 에너지를 극대화했다. 그 결과 흡사 다큐멘터리를 보고 있는 것 같은 생동감과 현장감이 매순간 담기게 되었지만, <클래스>는 엄연히 극적인 짜임새가 있는 극영화다.
이상 두 영화의 공통점은 그 주요 장점이 연기가 매우 리얼하고 뛰어나다는 점,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영화를 만들기 전에 감독과 촬영감독, 그리고 영화에 출연할 배우들이 함께 모여 실전을 위한 영화 연기 워크숍을 했다는 점이다. 그것은 앞으로 영화 연기의 교육이 어떻게 진행되어야 할지에 대한 단서를 제공해주는 좋은 실례다. 여기서 언급을 필자의 수업 사례인 단편영화 워크숍을 통한 영화 연기와 연출은 이들 영화의 연기 워크숍 사례와 유사한 점을 발견하고 보다 체계화할 필요성을 느껴 본격적으로 쓰게 된 것이다.
여기서 예로 들 단편 <생활 연기의 힘>은 내가 재직한 대학원에서 영화 연출 전공과 연기 전공 학생들이 공통으로 듣는 수업인 ‘매체 연기와 연출’에서 영화 연기 워크숍의 일환으로 만들어진 작품이다. 그 수업은 매체 연기에 대한 기본 이론과 실습을 통해 매체 연기와 그 연출에 대한 기초를 터득하고, 최종적으로는 연기전공과 연출 전공 학생들이 직접 하나의 단편을 공동 창작해 가는 과정을 통해 영화 연기에 대해 실질적인 체득을 하는 것이었다. 당시 이 수업의 구체적인 목표는 국내에선 전무한 영화연기 훈련 프로그램을 개발해 보자는 것이었다. 연기력보다는 이미지 캐스팅이 종종 있는 영화의 경우, 훈련이 거의 안 된 신인 연기자들을 교육시킬 때 영화 연기 훈련을 위한 나름의 방법론이 없기에 대부분 연극에서 활용되는 훈련 프로그램을 이용한다. 물론 그러한 방법론은 일정 부분 계속 유효하다. 하지만 초기에 잘못 길들여진 연극적인 연기 스타일은 배우 생명에 치명적일 수 있다. 이제는 모든 분야에서 영상 매체가 주류를 이루는 현실에서 영화 및 방송 연기를 위한 나름의 정리된 훈련 과정과 연기 재교육(기성 연기자를 포함한) 프로그램이 분명 필요하다. 동시에 영화감독 입장에서 주어진 배우를 어떻게 연출할 것인가 하는 연기 연출도 그 훈련 과정을 통해 함께 공부할 수 있다고 보았다. 실제로 대다수의 영화감독들은 배우를 다루는 훈련이나 원하는 연기를 효과적으로 연출해내는 방법을 터득하지 못한 채 작품에 임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영화연기에 노련한 배우들과 작업할 경우에는 그런 방법론을 몰라도 자신의 연출 주관만 뚜렷하면 배우에게 전적으로 기대어 좋은 영화를 만들 수도 있지만, 아마추어나 과거의 잘못된 연기패턴에 사로잡힌 배우들과 작업할 땐 심각한 문제가 초래될 수 있다.
수업 초기에 스타니슬라브스키(1863-1938)의 연기 훈련법의 일종인 ‘에쮸드’와 스타니슬라브스키 시스템에서 파생되어 1940년대 액터스 스튜디오에서 리 스트라스버그에 의해 활성화된 ‘메소드 연기(Method Acting)’에 관해 최종 정리하고 영화적인 관점에서 고찰하는 세미나를 가졌다. 액터스 스튜디오(Actors Studio)는 1947년 엘리아 카잔을 비롯한 감독들과 연극연출가 리 스트라스버그에 의해 뉴욕에 설립된 전문배우 양성기관이다. 스타니슬라브스키식 연기훈련 방식이 그 기초가 된 이 연기법의 요지는 극중 캐릭터를 제대로 연기하기 위해선 미리 주문된 형식적인 연기가 아니라 캐릭터에 대한 상세한 이해를 바탕으로 실제 캐릭터의 내면 요소까지 연기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영화감독의 입장에서 볼 때, 연극에서 가장 기초적인 연기훈련법 중 하나로 활용되고 있는 ‘에쮸드’는 카메라와 결합해 영화 연기 훈련 프로그램 중 하나로 응용할 수 있는 것으로 보였다. 그 ‘에쮸드(étude)’란 용어는 원래 그림이나 조각에서 '습작', 음악에서는' 연습곡'을 의미하는 것으로 사용되었으나, 스타니슬라브스키가 연기 훈련 시스템에 그 용어를 차용하여 ‘즉흥성’과 ‘극적 구성이 있는 스토리’를 기본 틀로 해서 ‘배우의 기술을 발전, 완성시키기 위한 연습극’으로 활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리 스트라스버그의 매소드 연기법에서도 알 수 있듯, 연극을 완전히 배제한 채 완전히 독창적인 영화연기 연습 및 훈련기법을 만드는 건 무리다. 이미 다양한 실험과정을 거친 연극의 훈련기법을 장점을 도입해 보다 나은 영화 연기 연습기법을 만드는 게 합리적이라고 본다. 스타니슬라브스키의 제자에게 수업을 받았던 리 스트라스버그의 매소드 연기(Method Acting)법은 배우가 실생활에서 진짜 대상물을 다룰 수 있는 것처럼, 무대나 카메라에서도 상상의 대상물을 생생하게 다룰 수 있도록 하는 감성을 훈련하는 것과 그 감성의 지속성을 훈련하는 것으로 구성되어있다. 말론 브란도, 제임스 딘, 마릴린 몬로, 몽고메리 크리프트 등과 같은 영화배우들이 그가 설립한 액터즈 스튜디오를 통해 연기를 공부한 바 있다.
스타니슬라브스키가 체계화한 본격적인 연기훈련법은 연극뿐 아니라 현대 영화연기 교육의 기반이 되고 있다. 실제로 1920년대에 푸도프킨이나 클레쇼프 같은 영화감독들은 영화를 찍기 전에 ‘에쮸드’를 이용해 배우들의 연기 훈련을 시켰다고 한다. 영화역사상 가장 위대한 캐릭터 중 하나인 <대부>의 비토 콜레오네의 역은 말론 브란도가 연기했는데, 주지하다시피, 그는 스타니슬라브스키의 연기법에서 파생된 매소드 연기의 대가로, 비토 콜레오네라는 캐릭터는 그의 연기가 아니면 도저히 나올 수 없는 캐릭터다. 스타니슬라브스키 이전 시대만 해도 세계도처에 있는 연극학교들에서의 연기자 훈련은 발레, 펜싱, 발성, 연설, 화법등 주로 신체적인 요소만 가르쳐 왔지 ‘내면 연기의 방법’에 관한 것은 거의 없었다. 배우가 역할의 영혼, 즉 무대 위에서 창조되는 인물의 내면세계를 만들어 내는 데 도움이 되는 기술을 발전시킨 결정적인 인물이 바로 연기 에쮸드를 창안한 스타니슬라브스키였던 것이다.
일종의 연극연기 연습 프로그램인 에쮸드는 주어진 상황과 인물의 목표, 그리고 사건의 결말과 구체적으로 구성된 극적인 스토리 안에서 배우들의 즉흥성을 요구한다. 이 훈련법의 장점은 배우 자신의 본성과 습성을 자연스럽게 이끌어 낼 수 있다는 데 있다. 에쮸드 훈련법에도 여러 가지 단계와 종류가 있지만, 필자가 실제 극장을 통해서 처음 본 학생들의 어떤 에쮸드는 짧지만 디테일이 뛰어난데다 배우들의 연기가 자연스럽고 실감나 막상 정식 공연 때의 정형화된 연기보다 훨씬 공감이 갔다. 그러한 연기야말로 영화 연기에 가장 가까웠고, 실제로 영화에서 배우들에게 가장 요구되는 디테일이 살아 있었다. 그것은 에쮸드에서의 연기가 사전에 작가에 의해 주어진 대사를 그대로 외워서 하는 게 아니라 주어진 상황과 캐릭터에 맞게 배우 스스로가 자연스럽게 뱉어낸 대사였기에 가능했다고 보여 진다.
본격적인 워크숍에 들어가기 전에 학생들이 직접 세미나를 통해 발표한 에쮸드에 대한 글을 보면, 에쮸드를 하기 전에 배우들이 사전에 구체적으로 인식해야할 사항으로 주제, 인물의 목표, 제기된 상황의 내용, 사건의 결말 등 네 가지로 크게 나누고 있다. 그것을 영화적으로 보면 주제, 캐릭터, 갈등, 플롯으로 이뤄진 단편영화와 유사 하다. 차이라면 에쮸드는 철저히 배우 그 자신의 역할 창조를 위한 것이라면 단편은 그러한 요소가 영화의 일부에 속한다는 것일 뿐이다. 물론 국내에는 스타니슬라브스키식 에쮸드가 아닌 배우의 역할 창조를 위한 기초훈련법이 나름대로 있다. 가령 안민수 교수의 ‘배우수련’에 따르면, 우선 인물간의 갈등과 에피소드를 먼저 만들고, 두 인물의 캐릭터를 구체적으로 정하고 갈등을 주어 극단적인 상황까지 몰아간 후, 두 인물 사이에 제 3자를 등장시키거나 다른 에피소드를 추가하여 일상의 작은 에피소드로 완결하는 방식이 그 것이다. 필자가 보기에 그런 방식은 에쮸드와 유사하다.
간혹 ‘연기 아주 잘하는 배우’를 메소드 배우(Method Actor)라고 하기도 하는데, 그것은 바로 극중 인물의 동일시를 통한 극사실주의적인 연기 스타일을 칭하는 용어인 ‘메소드 연기’에서 유래되었다. 매소드 배우란 극중 캐릭터의 내면에 숨어있는 감정까지 이끌어 낼 수 있는 경험이 풍부한 연기자를 말하는데, 그 용어는 1950년대 할리우드 영화를 통해서 본격적으로 등장했다. 액터스 스튜디오에선 화려함만을 강조하던 기존 영화 풍토에서 벗어나 극중 캐릭터의 성격이나 심리 등 세세한 내면까지 연기할 수 있는 배우들을 배출하는데 주력을 다하였고, 그곳 출신들인 말론 브란도, 몽고메리 크리프트, 제임스 딘, 폴 뉴먼 등을 메소드 배우라 불렀었다. 메소드 연기법은 프랑스 누벨바그 영화감독들의 즉흥연기론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실제로 장 뤽 고다르의 <네 멋대로 해라>(1959)나 프랑소와 뜨뤼포 감독의 <400번의 구타>(1959, The 400 Blows)등의 영화들에선 잘 폴 벨몽도와 장 피에르 레오 같은 배우들을 통해 이전 영화들의 전형적인 연기패턴과 현저히 다른 매우 사실적이고 자연스러운 연기 스타일을 볼 수 있다. 자연주의적 연기론에 가까운 메소드 연기의 핵심은 정서적 기억, 혹은 감정기억이라는 테크닉이고, 그 훈련법에서 중요한 것은 캐릭터 몰입이 아니라 배우 개인의 인간적인 개성의 발전에 있다.
사실 영화에선 ‘에쮸드’ 용어를 전혀 안쓰지만, 필자가 학부 학생들과 이미 유사한 영화 워크숍 수업을 해본 적이 있기에 에쮸드를 응용한 단편영화 작업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단지 일방적으로 스토리를 던져주고 끌고 가기 보다는 학생들이 모든 것을 직접 제안하여 자신들에게 익숙한 이야기를 스스로 만들도록 유도했다. 단, 이 수업을 효과적으로 진행하기 위해 몇가지 조건이 필요했다. 즉, 1. 제작 가능한 컨셉트, 제한된 시간과 공간(30분 이내, 세 장면 이하), 2. 수업 참가 학생들이 자기 개성을 갖고 참여할 수 있는 스토리, 3. 기본적인 플롯과 인물간의 갈등 요소, 그리고 극적인 반전 설정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전제하에 학생들 각자 경험한 사건이나 남에게 들은 내용, 또는 책이나 인터넷을 통해 본 내용이라도 좋으니 모두 하나의 스토리를 1주일 내에 발표하도록 하였다. 그러한 ‘스토리 만들기’는 워크숍이나 시나리오 창작 수업에서 자주 해왔는데, 그 정도 단계는 사실 연기 전공이든 연출전공이든 (때론 영화 비전공자라도) 누구나 할 수 있다. 시나리오 양식을 안 갖추고, 그저 구술만 하더라도 그 스토리만 재미있으면 되기 때문이다. 7명의 학생들이 1주일 후, 각자 다양한 내용을 발표했다. 다행히 그중 단연 돋보이는 이야기가 있었다. 한 학생이 전년도 대학 졸업공연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있었던 실제 사건이었다.
그것은 '연습 중에 생일을 맞이한 한 여학생을 위해 다른 모든 동료 학생들이 그녀를 위해 깜짝 파티를 벌이는 과정에서 벌어진 사건'이었다. 먼저 학생들은 미리 합의하여 생일인 여학생을 속이고, 연습 중에 서로 싸우는 척 하면서 분위기를 살벌하게 만들었다 한다. 모처럼 생일을 맞이해 일찍 연습이 끝나고 파티를 기대했던 여학생은, 영문도 모른 채, 다툼 끝에 한 친구가 뛰쳐나감으로서 공연이 무산될 뻔 하자 그들을 말리다 결국엔 울고 마는데, 화내며 나갔던 그 친구가 생일 케이크를 가지고 들어와서 그 생일을 맞이한 여학생을 놀라게 했다는 스토리였다. 그것만 가지고 보면 연극 속에 또 다른 연극이 있다는 점에서 흥미로웠지만 자칫 방송의 몰래카메라 수준에서 머무를 수 있었다. 그런데, 그 스토리 속에 또 다른 재밌는 서브 플롯이 인상적이었다. 깜짝 파티 모의 과정에서 빠진 한 학생이 자신까지 속였다는 데 분노해 정말 연극을 그만두겠다고 하는 바람에 모두가 그 학생을 달래느라 혼이 났다는 것이다. 그 얘길 듣고 해볼만 하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애초에 전제조건으로 내건 모든 인물 참여, 제작 현실성, 제한된 공간과 시간, 극적인 구성과 반전 등 네 가지가 잘 맞아 떨어지는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그 스토리로 결정한 뒤, 좀 더 탄탄한 구성을 위해 도입부와 중간 에피소드의 구체성, 그리고 결말을 어떻게 할 것인지 좀 더 이야기 하였다. 특히 반전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 가령 반전 없이 관객에게 미리 알려주고 서스펜스로 가느냐, 아니면 관객도 눈치 못 채게 해서 깜짝 반전으로 가느냐 였는 데, 결국 미리 알려주는 것은 너무 방송의 몰래 카메라와 유사하다는 생각에 관객도 같이 속이는 반전으로 가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그들이 연습하는 영화 속 연극 작품을 무엇으로 할 것인가도 정해야 했다. 학생들과 논의 끝에 최근에 학부생들이 공연한 적이 있었던 몰리에르의 풍자 희극 <재치를 뽐내는 아가씨들>로 하기로 결정했다. 그 작품을 선정한 결정적인 이유는 우리 대학원생들 7명중 여학생이 5명인데, 그 연극의 캐릭터 설정이 거기에 잘 부합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이 음모를 꾸민 후, 친구를 속일 때 자기들끼리 다투는데, 그 갈등의 구체적인 에피소드를 무엇으로 시작할 것인가도 중요했다. 논의 끝에 갈등의 동기는 연출자와 배우간의 캐릭터 해석으로 인한 사소한 말다툼과 연기력에 대한 인신공격으로 잡았다.
이런 식으로 스토리를 배우들 중심으로 공동 창작해서 꾸며나가는 과정은 매우 중요하다. 그래야만 매소드 연기처럼 자신의 캐릭터를 자신의 노력으로 자유롭게 구현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전체적인 틀과 부족한 부분은 연출자가 책임지면서, 배우들과 적절한 소통은 이후 결과물이 얼마나 자연스럽고 훌륭하게 나올 것인가를 가늠하기 때문이다.
결국 그 스토리가 워크숍의 과제로 결정되자, 우선적으로 7명의 학생들의 각자 역할을 정했다. 크게 연출자 1인, A팀 배우 3인, B팀 배우 3인으로 정한 후, 생일을 맞이한 여학생을 정하고, 도중에 지각하게 되는 학생도 미리 정했다. 배역선정은 사전에 학생들 각자의 의견을 참고하면서, 연출자인 필자가 각자의 캐릭터에 맞게 결정하였다. 표면상 생일을 맞이한 친구가 주인공처럼 보이지만, 사실상 7명 모두가 주인공이나 마찬가지이기에 배역을 놓고 갈등이나 긴장관계는 크게 없었다. 단지 7명중 1명은 개인사정으로 이후 연습에 거의 참석을 못해 도입부만 잠깐 등장하고 막상 영화 속 연습 장면에서는 실제상황을 그대로 이용해 아예 불참하는 것으로 설정하였다. 배역이 다 정해지자 각자의 캐릭터에 대해 논의를 하였고, 어떤 식으로 주어진 역할을 연기할 것인지 큰 틀의 차원에서 논의하였다. 에쮸드가 ‘배우 자신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처럼 이번 워크숍의 각자 캐릭터들도 스스로 표현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일일이 구체적으로 파고들거나 분석하지 않았다.
영화에서는 장소 헌팅이나 세팅이 중요한 데, 우리의 워크숍 단편은 사실 있던 공간을 활용할 수 있는 스토리이기에 큰 무리가 없었다. 만약 특정한 공간이라면 기존 공간을 변경해 활용하거나 세트를 제작할 필요가 있겠지만, 그럴 필요도 없었다. 애초에 워크숍의 취지가 그런 영화적인 요소보다 ‘영화 연기의 구현’에 중점을 두었기 때문이다. 실화 스토리대로 주요공간은 공연 연습 장소인 학교 대연습실로 정하고, 도입부 장면은 바로 옆 로비 휴게실로 정했다. 도중에 늦게 오는 학생 장면을 위해서 인서트로 연습실 앞마당 공간이 잠깐 보이지만, 주요 공간이 대연습실 건물 안과 밖이기 때문에 크게 보면 공간은 하나나 다름없었다. 특정한 공간이 필요했다면 세팅하는 데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겠지만, 이번 워크숍 작품에서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인위성을 배제하기 위해 대부분 있는 그대로 둔 채 촬영에 임했다. 단지 프롤로그에 해당하는 로비 장면에서만 인물 배치와 구도 때문에 책상의 위치를 변경하는 정도였다.
일반적인 영화 작업이라면 배우들과 둘러앉아 시나리오를 보며 리딩하는 정도로 끝났겠지만, 이번 워크숍 작품에는 시놉시스와 캐릭터는 있지만, 시나리오는 없었다. 애초 수업의 목적대로 전체적인 상황을 스토리대로 배우들이 직접 재현하면서 즉흥적인 대사를 상황과 자신의 캐릭터에 맞게 대사를 내뱉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 부분은 에쮸드를 기본 축으로 하고 있지만, 공간 활용에 있어서는 연극과 달리 제한되지 않고 배우들이 동선을 자유롭게 움직이도록 하였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배우들의 창조적인 즉흥성이었기에, 사전에 상황에 필요한 인물의 정서(감정)나 변화, 대사, 그리고 행동을 세부적으로 정하지 않았다. 단지 중요 지점이 될 만한 곳에서 어떤 식의 대사가 필요하다는 정도만 암시했다. 가령, 생일을 맞이한 배우와 동료들의 음모 내용을 모른 채 연습 중간에 등장한 B팀의 연기자 중 한 사람은, 들어오자마자 (그 이전 다툼의 동기를 전혀 모른 채)어색한 분위기를 보며 얼른 그 친구가 ‘우리 힘내요, 파이팅!’ 하는 식으로 소리쳐 주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주문을 했다. 그로인해 그 지각한 친구는 분위기 파악 쉽게 못하는 다소 맹한 캐릭터로 살아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그의 액션은 분명 코미디를 유발하면서 극전 분위기를 전환시키는 좋은 지점이 될 수 있다고 보았다. 실제로 나중에 시사회 때 그 장면에서 모든 관객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결과적으로 그녀는 상대적으로 짧게 등장하지만 가장 재밌는 캐릭터가 되었다.
연기 전공 학생들에게 자율적으로 모여서 촬영할 장소인 대연습실에서 30분 이내의 상황을 만들어 연습한 뒤 필자에게 보여 달라고 하였다. 그들은 2주에 걸쳐서 수업시간을 이용해 두 번 정도 자발적으로 에쮸드식 상황극을 창작하여 연습한 뒤, 연출자인 내가 직접 그들이 그동안 짜놓은 구체적인 상황을 보기로 했다. 장면은 크게 두 개였다. 하나는 학생들이 식사하면서 서프라이즈 음모를 꾸밀 5분 정도의 로비 장면이었고, 다른 하나는 하루 정도 시간경과가 이뤄지고 나서 연습실에서 연습하던 중 서로 갈등이 벌이다가 서프라이즈가 이뤄지고 마무리되는 20분 정도의 장면이었다.
최종적으로 그들의 연습했던 장면을 바로 옆에서 처음부터 끝날 때까지, 마치 실제상황처럼 연기하는 것을 지켜보았는데, 예상 보다 훨씬 리얼했고, 각자가 자기 역할에 맞춰 내뱉은 대사나 캐릭터도 좋았다. 총 25분 정도 진행된 그 상황 극은 연극을 기본으로 하고 있지만, 공간 개념에선 영화적이었다. 가령, 연극처럼 무대라는 한정된 공간 개념으로 의식하고 거기에 맞춰 동선을 만드는 게 아니라, 실제 현실적인 공간처럼 동선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게 한 것이다. 왜냐하면 카메라가 나중에 촬영할 때 그들을 따라가면 되기 때문이다. 그들은 에쮸드처럼 일정한 스토리와 정해진 결말, 캐릭터를 갖고 출발했지만 구체적인 대사나 액션 및 동선은 스스로, 또는 서로 상의 하에 즉흥으로 만들어낸 것들이었다.
하지만 나는 결말 부분의 반전이 아무래도 너무 단순해 보여 부분적으로 장면 수정을 하자는 의견을 내었다. 반전(깜짝 파티)이 이뤄진 후, 다시 한 번 뒤집자는 것이다. 즉 생일 당사자가 아닌 인물이 자기를 소외시켰다고 화내며 연습에서 빠지겠다며 나가자 다들 그녀를 말리는데, 알고 보면 그녀 역시 다른 모든 동료들을 속였다는 것이다. 즉 그녀가 속은 게 아니라 속은 척 연기했다는 또 다른 반전을 만들었다. 그 재반전은 그동안 친구들에게 비밀로 했던 남자 친구(A팀 중 한사람)와의 백일 기념이라고 고백하는 것으로 마무리하기로 했다. 두 사람을 제외한 모든 사람이 연기 속에서 또 다른 연기를 하도록 한 것이다. 모두 동의했고, 그 디테일 구현에 대해선 학생들 스스로 해결하도록 했다. 또한 배우들의 동선도 부분적으로 수정해 주었다. 그건 대부분 영화적인 카메라 워킹을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수정한 부분, 특히 라스트의 재반전을 포함하여 한 번 더 연습한 뒤, 1주일 후, 일정을 잡아 바로 촬영에 들어가기로 했다. (다음 편에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