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종 심리학적인 용어는 대중들에게 인기있는 영화에서 유래되곤 한다. 가령 스스로 만들어낸 거짓의 세계를 실제처럼 믿어버리는 공상허언증 같은 증상을 ‘리플리 증후군’이라고 하는데, 그 용어의 유래가 르네 클레망의 영화 <태양의 가득히>( Plein Soleil, 1960)와 안소니 밍겔라의 <리플리>(The Talented Mr. Ripley, 1999)인 것처럼 말이다. 물론 그 두 영화 공히 프랑스의 패트리샤 하이스미스의 원작소설 ‘재능있는 리플리(The Talented Mr. Ripley)를 각색해 만든 작품이지만 말이다. 두 영화에서 공상허언증에 빠진 주인공 ‘리플리’ 역할은 당대 최고의 배우들(알랑 들롱, 맷 데이먼)이 맡았기에 ‘리플리 증후군’이라는 용어가 보다 쉽게 활용될 수 있었던 것 같다. ‘가스라이팅’이란 용어도 마찬가지다.
가스라이팅의 기원과 의미 : 심리치료사 로빈 스턴과 영화 <가스등>(1944)
최근 우리 사회에서는 누가 누구를 ‘가스라이팅’을 했다는 식의 기사가 자주 떠오르곤 한다. ‘한 유명 여배우가 남자 친구를 가스라이팅 했다’거나 ‘가스라이팅 및 가정폭력으로 제 동생을 죽음으로 몰고 간 부사관의 처벌을 요구합니다’라는 국민청원이 올라오기도 했고, 가장 최근에는 한 야당 최고위원이 페이스북에 ‘문정부, 북한에 가스라이팅 당하고 있나?’라는 식의 문제 제기를 하기도 했다.
주로 부부나 가족, 연인 사이에 이뤄지는 것으로 일종의 심리적인 지배 행위이자, 정서적 학대라고 알려진 ‘가스라이팅(Gas lighting)’이란 용어가 우리 사회에서 일상적으로 사용된 건 최근의 일이다. 정확히는 14년 정도 밖에 안됐다. 2007년 미국의 심리학자인 로빈 스턴(Robin Stern)이 자신의 저서 [가스등 이펙트](The Gaslight effect)-최근에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라는 제목으로 재출간 되었다.-를 통해 언급한 후, 처음으로 상용화되었기 때문이다.
로빈 스턴은 30년 이상 심리치료사로 일하며 정서적 학대와 심리적 조종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던 중, 1944년 만들어진 조지 큐커 감독의 영화 <가스등>(The Gaslight)을 보고, 그 영화의 주요 모티프이자 제목인 ’Gaslight’를 따서 ‘가스라이팅’이라고 명명한 것이다.
그것은, 간단하게는, ‘한 인물(가해자)이 다른 인물(피해자)에게 가하는 심리적 지배로 인한 정서적 학대’, ‘타인의 심리를 조작하여 그를 지배하는 행동 과정’등으로 표현하기도 하지만, 좀 더 정확하게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가해자가 타인의 심리나 상황을 의도적으로 조작해, 그 사람이 스스로 의심하게 만듦으로서 자기 판단을 믿지 못하도록 하여 그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로빈 스턴의 이같은 정의는 사실상 영화 <가스등>(1944)의 기본 스토리를 요약한 거와 다를 바 없다.
물론 위와 같은 영화 <가스등>(1944)은 패트릭 해밀턴(Patrick Hamilton)이라는 작가가 1938년 쓴 희곡 <Gaslight>를 각색해서 만든 작품이다. 해밀턴의 그 희곡은 1939년 1월 연극으로 초연되었는데, 나중에 브로드웨이에서 1300회 가까이 공연될 정도로 아주 흥행한 멜로 드라마가 되었고, 라디오극, TV영화로도 만들어졌다. (참고로, 페트릭 헤밀턴(1904-1962, 영국)은 히치콕의 유명한 영화 <로프>(1948)의 원작 희곡 작가다.) 해밀턴의 희곡은 1940년 영국에서 쏘롤드 디킨슨 감독에 의해 처음으로 영화화 되었다. 하지만 로빈 스턴이 ‘가스라이팅’용어를 만들게 계기가 된 영화는 미국의 MGM영화사에서 조지 큐커라는 중견감독에 의해 다시 만들어진 영화<가스등>(1944)이다. 어떤 이유인지 몰라도, 조지 큐커 감독이 찰스 보이어와 잉그리드 버그만(Ingrid Bergman)을 주인공으로 해서 리메이크 하려 했을때, MGM은 이전 버전의 영국영화 [가스등](1940)의 모든 프린트를 불태워 없애려고 했다. 근데, 다행히도 그 영화를 만든 쏘롤드 디킨슨 감독이 네거티브가 손실되기 전에 은밀하게 프린트를 빼서 숨겨놓았다고 한다.
원작 희곡과 1940년 영화 <가스등>, 그리고 조지 큐커의 1944년 <가스등> 비교
하지만 두 영화를 다 보고 나면, 왜 MGM이 1940년 버전을 없애려고 했는지 약간은 이해가 된다. 같은 원작을 가지고 영화로 만들지라도, 감독이나 배우에 따라 얼마나 그 영화가 달라질 수 있는가는 우리가 과거 수많은 영화들을 통해 자주 보게 되는데, 이 두 작품 역시 마찬가지다. 1940년 <가스등>(84분)은 여러 면에서 어설프고 완성도가 떨어진다. 그런 반면에 1944년의 <가스등>(114분)은, 걸작이라고 까진 할 수 없어도, 전작에 비해 상대적으로 뛰어나다. 상영시간이 30분이나 더 길었던 측면도 있겠지만, 남녀 주인공의 심리묘사나 연기가 단연 돋보인다. 특히 피해자인 아내로 나온 잉그리드 버그만의 연기와 이미지는 무척 돋보이고 공감이 극대화된다. (잉그리드 버그만은 그 영화로 그해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로빈 스턴이 심리적 지배로 인한 정서적 학대의 의미로 ‘가스라이팅’을 사용하게 된 건 전적으로, 그녀가 자신의 책에서도 밝혔듯이, 잉그리드 버그만 주연의 <가스등>이지, 1938년 희곡이나 1940년 영화 <가스등>이 아니다. 사실상 희곡이나 1940년 영화가 1944년의 <가스등>에 기본 스토리나 캐릭터 등을 제공하긴 했지만, 상대를 조종하고, 심리적으로 지배하는 과정의 디테일은 1944년 영화가 매우 잘 표현되었기 때문이다.
조지 큐커의 <가스등>(1944)을 보면 로빈 스턴이 얘기한 가스라이팅 3단계가 잘 묘사되어 있다
1단계: 불신_당연한 것으로 믿어온 신념이 흔들리는 혼란단계
폴라(잉그리드 버그만)는 가스등이 희미해지는 것과 위층에서 들려오는 발자국 소리를 의심하지만, 귀가 어두운 하녀와 질투심 많은 젊은 하녀를 그녀 말을 믿지 않고, 남편인 안톤 역시 "당신이 잘못 본 거야", "왜 엉뚱한 소리를 해"라고 계속 핀잔을 준다. 남편이 선물로 준 브로치도 없어지고, 액자도 어디로 치웠다고 남편이 뭐라고 하자, 폴라는 혼란스러워 한다.
2단계: 자기 방어_가해자의 평가를 적극적으로 부정하며 자기 방어단계
폴라가 적극적으로 자기는 분명 발소리를 들었고, 가스등이 희미해지는 걸 봤다고 남편 안톤에게 어필하고 방어해 보지만 소용없다. 하녀들조차 그녀를 이상하게 바라본다.
3단계: 억압_ 자신에 대한 가해자의 평가를 믿으며 가해자의 기대에 부응하도록 행동
안톤은 자기 시계를 몰래 폴라 핸드백에 넣고, 나중에 내 시계가 없어졌다고 말하자, 폴라는 자기가 안가져갔다고 방어해 보지만 본인 핸드백에서 남편 시계가 나오자, 무너지고 만다. 그래서 결국 자기가 돌아가신 어머니처럼 정신병이 있는 거 아닌가하고 스스로를 자책하게 되면서 남편의 말을 따르게 된다.
위와 같은 가스라이팅의 단계는 3막으로 이뤄진 원작 희곡에선, 기본 내용은 유사하지만, 세부적인 과정의 심리적인 단계는 생략된다, 1940년 영화 역시 스토리는 유사하지만, 가스라이팅의 세부 과정이 단순하게 묘사된다. 1944년 <가스등>에서 보여지는 가스라이팅은 기본적으로 가해자(남편 안톤)는 자신의 욕망(물욕, 값비싼 보석)을 달성하기 위해 아내(아내 벨라)에게 접근해 결혼한 뒤, 그녀를 심리적으로 지배하고 정신적으로 피폐하게 만들어가는 행위이다. 희곡이나 영화에서는 결국 그 가스라이팅은 한 예리한 전직 수사관에 의해서 남편이 붙잡히면서 실패하지만, 결국엔 물질만능주의에 대한 풍자이자 비판을 담고 있다. 막상 <가스등>(1944)을 보면, 주인공 안톤의 행위는 다소 이해가 안가고 다소 답답해 보이기도 한다. 저렇게 3층 저택까지 있는데다, 아름답고 착한 아내(벨라, 잉그리드 버그만)를 두고 왜 저렇게 물질에 광적으로 욕심부리나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반면 그런 남편에게 당하는 아내 벨라도 답답하기 그지 없다. 어떻게 저렇게 바보처럼 당할 수 있지? 하는 생각이 든다.
가스라이팅의 최악 사례 :
히틀러 치하의 독일 관료및 군인들, 5.18때 광주에 투입된 계엄군들
하지만 우리 현실에서 그런 상황은 드물지만, 실제로 있다. 불과 며칠 전(2021.10.7.)에도 그와 관련된 기사가 뜨기도 했다. 30대 중반의 여성 이씨가 중학생시절부터 과외교습소 원장인 박모씨로부터 은밀하고도 집요한 가스라이팅을 당해왔는데, 최근 10년간은 거의 노예처럼 당하다가 음식물 쓰레기와 자신의 인분까지 먹게했다는 충격적인 내용이다. 가스라이팅은 주로 친밀한 관계나 주종관계에서 이루어진다. 가스라이팅 가해자들은 상황 조작으로 상대방 자아를 흔들어서 자신의 영향력을 증폭시킨다. 이를 통해 상대방을 자유자재로 가지고 놀 수 있고 그 사람이 가진 재산 등을 탈취할 수도 있다. 가스라이팅 피해자는 자신에 대한 신뢰감을 잃어가게 되고 결국에는 자존감이 없어진다. 가해자들은 상대방의 공감능력을 이용해서 상대방을 통제한다. 동정심을 이용해서 타인을 조종하는 소시오패스가 될 수 있다.
그런 가스라이팅은 사실상 현대에서도 부부나 연인 관계에 한정되지 않고 학교, 군대, 직장, 종교 등에서 광범위하게 발생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역시 그 목적은 희곡과 영화 <가스라이팅>에서처럼 가해자가 자신 또는 집단의 욕망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 가스라이팅 행위가 개인에 머무르지 않고 집단으로 확장되면 독일의 나찌에서도 볼 수 있듯이 엄청난 비극이 유발될 수 있다. 패트릭 해밀톤은 1930년대말 극단적인 자본주의(또는 파시즘)의 폐해를 비판하고 싶어 <가스등>이란 작품을 쓰지 않았을까? 독일의 나찌가 2차대전에서 엄청난 학살을 자행하게 된 것도 결국 독일 국민들이 유럽을 지배하고자 하는 히틀러의 파시즘 권력에 교묘하게 가스라이팅 당했기에 일어난 비극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나는 얼마전 광주 5.18 민주화운동 당시 광주에 진압군으로 참여한 가해자들의 반성과 복수를 다룬 영화 <아들의 이름으로>(2021)를 만든 적이 있는데, 그 영화 시나리오를 쓰기 전에 당시를 겪은 사람들의 수많은 증언록을 읽은 바 있었다. 그 중 가해자 편에 선 계엄군들의 증언록을 읽으면서 놀라운 사실들을 발견했다. 그들은 광주에 투입되기 전 모두 군부대에서 철저히 광주시민들의 민주화 시위를, 좌익 빨갱이들이 주도하는, 단순한 폭동으로 인식하게 하는 정신교육을 받았다. 그 결과 그 군인들은 아무런 죄의식 없이 명령에 복종해 무차별한 강경진압을 했고, 그 과정에서 무고한 광주 시민과 학생들에게 극단적인 살상을 자행했던 것이다. 그들이 받은 정신교육과 그 후의 행위들은 일종의 가스라이팅 방식과 매우 유사했다. 결과적으로 권력을 탐한 소수의 군 수뇌부에 가스라이팅 당한 그 평범한 군인들은 자신도 모르게 가해자이자 동시에 피해자가 된 것이다.
가스라이팅 가해자는 은밀하게 상황을 조작해서 친밀한 관계를 만들어놓고, 자신에게 의지하도록 세뇌하는 데 능숙하고, 피해자가 일단 세뇌당하고 나면 자신의 판단을 믿지 못하고 가해자에 의존하게 된다고 한다. 그렇다면 정말 과연 우리는 누구나 그런 가스라이팅을 쉽게 당할 수 밖에 없는 걸까? 그런 가해자들의 행위를 미리 알아채고 벗어날 수 있을까? 1980년 당시 광주에 간 군인들이 가스라이팅을 당하지 않았다면, 군부 권력자들의 기만 행위를 미리 알았다면, 과연 자기 국민을 향해 그렇게 총을 쏠 수 있었을까?
로빈 스턴은 가스라이팅을 극복하는 방법으로 크게 세 가지를 제시한다. ‘첫째, 왜곡과 진실을 구분하기. 두 번째, 자신의 감정에 주목하기. 세 번째, 가해자와의 관계를 포기할 각오를 무릅쓰기’이다. 상대방이 내게 한 말은 아무리 주종 관계이고, 가족이나 연인이라 하더라도 그게 진실인지 왜곡된 내용인지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자신이 느낌 감정에 대해 상대가 아닌 다른 객관적인 위치에 있는 사람들에게 검증을 받아 보면서, 자신과 그 상대를 객관화 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자신이 옳고 상대가 그르다고 생각하면 과감하게 상대와의 관계를 단절할 생각도 해야 가스라이팅에서 벗어날 수 있는 말이다. 하지만 말이 쉽지, 그 가스라이팅 가해자가 군대 상관일 경우는 쉽지 않다는 걸 이해한다. 자칫하면 명령불복종으로 죄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거대 집단이라도 비인도적인 행위를 강요할 때는 심각한 고민을 할 필요가 있다. 아무 생각없이 명령대로 하는 것은 한나 아렌트의 말대로 더 큰 엄청난 범죄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독일 태생의 유대인 철학자인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1906~1975)는 독일 나찌 군인들이 명령대로 유대인 홀러코스트에 동조하고 협조한 것에 대해, 2차대전 당시 유대인 수용소의 경비를 담당했다가 전쟁 후에 도피하던중 이스라엘 모사드에 잡힌 아돌프 아이히만의 예로 들어 얘기한다.
평범한 중년 남성으로 보인 아이히만은 재판 과정에서 시종일관 자기는 위에서 명령대로 했고 직접 죽이지 않았기에 아무 죄가 없다고 주장하지만, 그는 결국 사형선고를 받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한나 아렌트는 그의 재판 과정을 지켜 본 뒤에 [예루살렘의 아이히만](Eichmann in Jerusalem, 1963)이란 저서를 통해 악은 그저 평범한 개인들이 ‘아무 생각없이’ 상대의 주장(명령)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여 행동함으로써 발생하다는, 이른바 ‘악의 평범성( the Banality of Evil)’을 주장했다.
나는 여기서 아이히만은 가해자이자 독일 나찌의 집단적 가스라이팅의 피해자라는 생각이 든다. 결국 그가 생각을 신중하게 했더라면 가스라이팅을 어느 정도 피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물론 그 혼자 노력으로는 쉽지 않았겠지만, 당시 독일 국민들 다수가 제대로 생각하고 행동했다면, 그 엄청난 비극은 애초에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우리의 5.18 비극도 마찬가지다.
마지막에 극단적인 가스라이팅을 예로 들었지만, 그런 행위는 앞으로 또다시 개인이나 집단에서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보장은 없다. 욕망을 추구하는 인간의 본질이 그리 쉽게 변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항상 누군가가(또는 어떤 집단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우리의 상황과 심리를 조작해, 스스로 의심하게 만들어 판단력을 잃게한 뒤, 맘대로 조종하는 정서적 학대 행위를 경계해야 한다. 가스라이팅 당하게 되면, 운이 좋으면 그저 어리석은 피해자로 머물지만, 자칫하면 아이히만이나 5.18 당시 광주에서 학살을 자행한 군인들처럼 극악무도한 가해자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영화에서는 종종, 의도이건 아니건, 가스라이팅이 핵심 모티프로 활용되어 스토리를 극적으로 만드는 경우도 있다. 박찬욱 감독의 <아가씨>(2016), 데이빗 핀처의 <나를 찾아줘>(Gone girl, 2014), 알레한드로 아메나바르의 <디 아더스>(The Others, 2001), 피터 웨어의 <트루먼쇼>(The Truman Show,1998), 아리 에스터의 <미드소마>(Midsommar,2019)등이 그런 작품들인데, 로빈 스턴이 규정한 의미에서 다소 벗어난 영화도 있지만, 그래도 넓은 의미에서 보면 대부분 ‘가스라이팅’이 효과적으로 들어가 있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