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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주 Feb 19. 2023

능소화가 질 때

우린 어디에 피어있을까

별안간 소중한 것이 생겼을 때

그것을 잃는 상상부터 하는 사람.

내 소중한 고양이가 아파하면

전부다 나 때문이라고 자책하는 사람.

계절의 끝에서 떨어지는 꽃을 보면

마음 한 구석이 저려 정말로 숨이 가빠지는 사람.

철이 들지 않은 것 같지만, 소소하게 철이 든 사람.

그런 애매한 지점에 서 있다.


나처럼 철들다 만 어른에게 꽤나 벅찬 현실이다.

아예 철이 없었다면, 들판을 아무렇게나 뛰어다니는 망아지처럼 온 세상의 주인공이 나 인 것 마냥 이 환상적 세상을 마음껏 즐겼을 텐데. 남들보단 덜 하지만 조금은 철이 든 탓에 자꾸만 멈춰 서서 먼 곳을 바라본다.질겅이던 풀도 입에 머금고 삼키는 것을 잊은 채 깊은 상념에 빠진다.  

답이 없는 문제를 푸는 동안 옆에서 자꾸만 나를 유혹하는 것은 깊이를 알 수 없는 새카만 늪.

자괴감이라는 이름의 늪.

1cm만 미끄러져도 바로 풍덩 빠져 삼켜질 것만 같다. 그 늪에 빠지지 않기 위해 부단히도 노력하고 있다. 자신을 탓하지 않으려는 노력.

내가 해온 선택들과 과오, 업적, 혹은 전생의 잘못 때문에 이런 문제에 봉착한 게 아닐까. 내가 그 해 그 날 태어났고, 내가 그 때 거길 갔고, 내가 그 순간 그런 표정을 했기 때문에 이 모든 일이 일어난 건 아닐까. 전부 나 때문에 벌어진 일인 걸까. 이게 다 내 잘못이라면, 아마 스스로 늪에 걸어 들어가는 게 맞겠다.


아니라고 믿고 싶다.

사실 난 이미 늪에 빠져 있었고 호수괴물이 되기 직전의 상태였는데,

이제야 겨우 수면 밖으로 나온 거라고

이제야 숨을 쉴 수 있게 되었다고

그렇게 믿고 싶다.

이 밤. 당신을 생각하면 눈물이 나 견딜 수가 없다.


능소화 _ oilpastel on paper, 20x20cm, 2022, by 예주


여름도 가을도 아닌 계절

능소화가 질 때

난 어디에 서 있을까.

여전히 여기 이곳일까, 다시 늪의 바닥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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