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방하는 여자들
“엄마 어디 가?”
떡 주문이 없어 공방에 출근할 필요가 없는데, 엄마는 아침부터 외출 준비를 했다.
“R쌤이 약과 만드는 수업 출강 하러 간다고 하길래, 따라가기로 했어. 다녀올게.”
R쌤은 엄마에게 앙금플라워와 한식 디저트를 가르쳐 준 선생님이다. 엄마는 처음 앙금플라워케이크를 배우고 싶어졌을 때, R쌤을 찾아갔다. R쌤은 우리 지역에서 10년 가까이 공방을 운영하며 앙금플라워 창업반 수업도 하고, 한식 디저트를 가르치는 출강도 다니는 이 분야의 멋진 전문가다. 엄마와 R쌤이 알고 지낸 지도 1년이 넘었다. 엄마는 케이크를 만들다가 궁금한 게 생기면 자주 R쌤에게 전화해 sos를 요청했다. 공방을 오픈하고 나서는 가끔 R쌤이 공방에 찾아와 급하게 필요한 재료를 구해가기도 했다. 엄마에게 정말 필요한 조언을 건네고, 공감해 줄 수 있는 R쌤은 엄마의 선생님이자 첫 동료였다.
공방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 엄마는 일주일에 한 번씩 평생교육원에서 R쌤의 디저트 수업을 듣고 돌아오면 이런저런 이야기를 재잘거리며 들려줬다. “오늘은 같은 조 사람이 너무 온도를 높게 튀기는 바람에 디저트가 이렇게 된 거 있지?” “오늘 만든 거 너무 예쁘지 않니?역시 난 디저트가 좋아.” “수강생들이 이건 얼마에 파는지 물어보는데, 쌤이 안 팔겠다 그러더라? 손이 엄청 많이 간다고! 손이 많이 가긴 해…. 그래서 맛있나 봐.” 수업을 듣고 오는 날이면 엄마는 대체로 기분이 좋아 보였다. 같은 지역에 친구도 모임도 거의 없는 엄마에게 매주 디저트 수업에 가서 비슷한 나이대의 쌤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일은 엄마의 일상에 필요한 숨구멍이었다.
엄마가 다시 수업을 찾아간다는 건 긍정적인 신호였다. 당장 공방을 접을 것 같았다면 굳이 수업까지 발걸음하지 않았을 테니, 엄마가 수업에 가서 R쌤이나 다른 쌤들과 여러 이야기를 나누고 오길 바랐다. 정말 공방이 이렇게 힘든지, 장사를 그만두고 싶을 때는 없었는지. 누군가의 말로 정답을 찾을 수는 없겠지만 때로는 나의 이야기를 털어놓을 곳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위로가 될 때가 있으니까.
엄마는 한 손에 오늘 수업에서 만든 약과를 들고 돌아왔다. 오랜만에 식탁에 마주 앉아 엄마가 수업에서 만들어 온 약과를 먹으며 엄마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엄마, 공방 계속할 거지? 그래서 수업 간 거지?”
“아직도 마음이 왔다 갔다 해.”
엄마는 긍정도 부정도 조심스러워했다.
“R쌤한테는 얘기해 봤어? 공방 접고 싶다는 얘기….”
“쌤이 그러더라,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은 나 봐야 한다고. 일단 시작했으면 그냥 고야, 가는 거라고.”
“맞아 엄마, 저번에 잠깐 쉬었다가 공방 가니까 힘든 건 알겠는데 접기에는 또 우리가 꾸려둔 게 꽤 많더라. 미래도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지금 접기에는 아까운 마음이 들었어.”
“그런데 정말 새벽에 답례 떡 하는 거는…. 케이크는…. 너무 떨려, 너무 힘들고.”
엄마가 의지할 수 있는 한 기둥이 되어주는 R쌤이 엄마의 의지를 조금 붙잡아준 것 같아서 다행이었다. 조금 더 엄마를 설득해 보려 했으나 엄마는 여전히 공방을 이어가는 것을 두려워했다. 일은 인생의 큰 부분이고, 엄마의 생계가 걸린 일이기에 시작할 때 오래 고민하고 마음먹었던 것처럼 그만둘 때도 아주 큰 마음이 필요할 것이 분명했다. 엄마의 머릿속이 얼마나 복잡할지 다 알지 못해서 다시 말을 삼켰다.
엄마가 공방 문을 닫겠다고 해서 공방에 출근할 수 없어진 어떤 날, 엄마가 떡을 만드는 사람들이 모여있는 카페에 가입했다는 사실이 생각났다. 내게도 처음인 이 분야를 오래 걸어 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커뮤니티라면 어떻게든 답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스쳤다. 재료를 주문할 때마다 사용하는 엄마의 아이디로 카페에 들어가 보았다. ‘공방’, ‘가정의달’, ‘카네이션’ 여러 이야기를 검색하다가 ‘내가 쓴 글’ 버튼을 클릭해봤더니 엄마가 카페에 남긴 글이 있었다. 7개 남짓한 글 중에 최근에 올린 글 두 개의 제목이 눈에 띄었다.
[제목 - 오늘도 실수...]
오늘 답례들어온 거 제작했는데 망했어요ㅜㅜ,,, (중략) 실수로 비싼 재료와 시간을 다 버렸네...멘탈 회복이 안 되더라고요. 4개월 차... 힘드네요.
[제목 - 버틸 수 있을까요?]
오늘은 새벽 5시 반에 집을 나섰어요. 다른 선배 사장님들에 비할 수 없는 주문량이지만 아침 일찍 시작하고 하루 종일 서 있고 체력은 딸리고 여기저기 아프고 힘만 드네요…. (중략)
… 버틸 수 있을까요?
엄마는 몰래 이곳에 자신의 감정을 털어놓고 있었다. 엄마의 일기장을 훔쳐본 것 같아 미안했지만, 그보다 엄마랑 같이 일하면서 이런 마음을 살피지 못했던 지난날에 더 큰 미안함이 밀려왔다. 그리고 이어진 댓글을 보며 다시 마음이 울컥했다. 많은 선배 사장님이 현실적인 조언과 위로를 전했다.
“힘내시고 내일은 웃으면서 오늘 일을 얘기할 수 있을 거예요.”
“다리 마사지기 구입하세요” “손 마사지기 필수예요. 저도 매일 온몸이 쑤셔요.”
“일단 하고 계시다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화이팅입니다”
“저도 처음에는 주문 들어오는 게 무섭더라고요. 무슨 일이든 처음은 어렵고 힘든 것 같아요. 천천히 컨디션 조절하시면서 오래 일해보아요.”
엄마는 모든 댓글 하나하나에 답글을 남기며 고마움을 전했다. 익명의 누군가가 남긴 응원에 힘을 얻고, 다시 일어서고, 다시 그 힘을 누군가에게 돌려주는 과정이 엄마의 삶에도 닿아 있어서 다행이었다. 엄마는 무너지고 다시 일어설 용기가 없다고 했지만, 엄마의 주변에는 엄마가 다시 일어나고 싶을 때 잡아 줄 손이 곳곳에 기다리고 있었다.
이번 주에도 엄마는 R쌤의 수업을 들으러 갔고, 이번에는 R쌤이 돈을 주고 배워야 하는 레시피를 엄마에게 주겠다고 했다. 나는 공방에 출근하지 않는 날에, 공방 매출을 다시 살려 낼만한 상품을 기획해서 엄마에게 전했다. 엄마는 떡 카페에 글을 올리고, 엄마를 잘 이해해 줄 수 있는 떡 공방 사장님들은 엄마에게 각자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위로를 건넸다. 삶의 무게를 많이 느끼고 있을 엄마에게 해줄 수 있는 게 많지 않지만, 엄마가 헤쳐 나가고 있는 이 터널이 부디 너무 어둡지만은 않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