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마지막 간병일기 4

종양보다 무서운 변비


고향으로 가는 버스 타본 게 얼마만인지 기억에도 가물거린다.

분기별로 있는 친구들 모임에 참석하러 가면서 여분의 옷과 노트북등을 챙겼다. 언제까지라고 기한을 두지 않고 당분간 엄마 곁에 머물 계획이다.

두 시간 반 만에 버스가 태안 터미널에 도착했다. 터미널 앞에서 바로 택시에 올랐다. 택시를 타고 집에 들어가는 것도 극히 드문 일이다. 출발해 5분도 지나지 않아 큰언니의 전화를 받았다. 엄마는 내 집에서 고향 집으로 내려온 후 낮에 세 시간씩 재가요양 서비스를 받는다.    엄마의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받아들인 언니들의 마음은 혼란스럽기 짝이 없는 중에 자신들이 할 일을 궁리하기 시작했다. 큰언니가 먼저 실행에 옮겨 엄마 곁에 머물고 있었다.

“막내야, 어디쯤이니?”

“택시 타고 출발했는데요.”

“잘 됐다. 그 차로 엄마 병원 가야 할 거 같다. 아침부터 신호가 와서 화장실에 세 번이나 갔는데 안 나오나 봐, 병원 가서 관장해야 할 거 같어.”

전화를 받는 순간 이제 올게 왔구나 라는 생각과 엄마가 나를 여태 기다렸구나 하는 생각이 동시에 들었다. 엄마를 집에서 편안하게 모시겠다는 것은 자식의 욕심이었을까. 결국 병원에서 돌아가시게 되는 걸까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간병을 해본 사람들이라면 어느 정도 알고 있을 것이다. 임종 전 많은 환자들이 병증 자체의 고통과 함께 힘들어하는 게 바로 변비다. 내 아버지도 그랬다. 아버지는 80세에 간암으로 돌아가셨다. 간에 생긴 종양보다 막판에 정작 아버지를 괴롭힌 것은 변비였다. 엄마는 이미 한 달 넘도록 변을 못 보는 상황이었다. 그렇게 오래 변을 못 보면서도 엄마가 변의를 느끼지 못하고 힘들어하지 않은 건 먹는 양이 극히 적어서였을 것으로 짐작되었다. 이유식을 시작한 어린아이만큼도 먹지 못하는 것 역시 노화의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했다. 섭취량이 작은 만큼 소, 대변의 횟수와 양도 자연스럽게 줄어든다고 했다. 엄마의 상황으로 봐선 집에서 함부로 관장을 시도할 상황도 아니었다.

태안 의료원은 엄마의 신상을 파악한 후 관장에 난색을 표했다. 이유는 크게 두 가지였다. 현재 의사들 파업으로 의료진이 부족하다는 것과 태안 의료원은 1차 진료기관이라 위급한 상황에 적절한 대응이 어려울 수 있다. 그러니 2차 의료기관인 서산의료원으로 가라. 이미 엄마를 받지 않기로 결정한 병원 측에 억지 쓰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서산 의료원 응급실에 도착 만일의 경우 연명치료를 원하지 않는다는 서류에 사인을 한 후 진료를 시작했다. 원인을 알 수 없는 복통과 배변의 관계를 알기 위해 복부 엑스레이 촬영을 하고 기본적인 소변 검사(소변이 나오지 않아 소변 줄을 통해)와 피검사를 실시했다. 채혈하는 과정 또한 쉽지 않았다. 너무 마르고 핏줄도 선명하게 나타나지 않았다. 이미 빈혈수치가 정상인의 반에도 미치지 않을 만큼 낮다는 것을 알고 있는 상태에서 한 방울의 피도 아까운 지경이다. 한참 만에 검사에 필요한 양만큼 채혈을 할 수 있었다. 그런 다음 관장을 시작했다. 만일을 대비해 기저귀를 채운 후였다. 관장을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엄마에게 신호가 왔다. 괄약근을 조일 힘이 없어 바로 약간의 변을 본 상태였다. 문제는 거기서부터 시작했다.

그간 여러 번 입원을 반복했고 그때마다 기저귀를 채웠었다. 나이로 보나 기력으로 보나 기저귀를 착용하는 건 전혀 부끄러운 일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그때마다 엄마는 절대 기저귀에 실수하는 법이 없었다. 걷지 못해도 어떤 수를 써서라도 화장실에 가야 했다. 축 늘어진, 수액 줄을 주렁주렁 달고 있는 환자를 데리고 화장실에 가는 일은 보호자에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엄마가 90세에 중증 열성 혈소판 증후군(살인 진드기 감염) 일 때 기억이 떠올랐다. 올 게 왔구나 라는 생각이 들면서 바짝 긴장됐다. 그 당시 2차 병원에서 며칠 입원 중이었는데 백혈구 수치가 너무 떨어져 무균실이 있는 병원으로 긴급 이송 필요했다. 분당 서울대 병원 응급실로 이송직후 언니들이 찾아왔다. 다행히 이송 후 수치가 올라 무균실이 아닌 일반 2인실 병실이 나길 다 같이 기다리고 있었다. 응급실 입원을 했다고 입원실이 금방 배정되는 것이 아니다. 지루한 기다림 후 언니들이 돌아가기 위해 막 응급실 문을 나서기 무섭게 엄마가 화장실을 재촉했다. 이미 응급실을 빠져나간 언니들을 부를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이송되기 전 입원했던 병원에서 기저귀를 착용하고 왔으니 제발 기저귀에 보시라고 했지만 막무가내였다. 휠체어를 챙겨 와 앉히고 링거 줄을 단속하는 동안 재촉은 극에 달했다. 정신없이 화장실로 달려가 바지를 내리고 변기에 앉히는 순간 ……. 내 손에 묻은 건 당연하고 어떻게 뒤처리를 했는지 정신없었지만 나는 분명하게 기억한다. 엄마가 그만큼 원망스러웠다.

“엄마 왜 나한테만 이래?”

방금 전까지 다른 딸들이 셋이나 있었는데, 그때도 이미 신호가 있었을 텐데, 조금만, 몇 초만 빨리 얘기했어도 언니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는데 나 혼자 감당하게 하는 엄마가 너무 밉고 원망스러웠다. 그랬는데 지금 또 그때와 똑같은 일이 벌어지게 생긴 거다.

“엄마, 제발 기저귀에 하세요. 엄마 기운 없어서 변기에 못 앉아요.”

내 부탁보다 더 간절히 엄마는 화장실을 원했다. 관장해 놓은 상태라 엄마는 더 참을 수 없는 모양이었다. 그때처럼 다시 휠체어를 가져오고 엄마를 앉혔다. 그나마 그때보다 나은 건 아직 링거 줄이 없다는 것뿐. 같이 화장실에 들어갔다. 한참을 앉아있는 엄마와 선 채로 그런 엄마를 하염없이 기다리는 나.

다른 노인들도 그럴까? 아버지 역시 단 한 번의 실수 없이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혼자 화장실에 가서 해결했다. 아버지가 자신 간에 생긴 종양보다 더 힘들어했던 변비처럼 엄마 역시 결국은 변비 때문에 큰 고생을 하게 되었다.

한참을 기다려 묵은 변을 해결했다. 엑스레이 결과 변은 생각보다 많지 않았고 복통의 다른 원인을 밝히기 위해 CT를 찍고 정확한 판독이 나오는 월요일까지 입원해 기다리기로 했다.


하나뿐인 아들과 큰 딸이 응급실 밖에 있었지만 보호자는 한 명만 허락됐고 그러다 보니 연명치료 여부 사인을 하는 것은 자연스럽게 내 몫이 되었다. 아버지에게 위급상황이 왔을 때도 그랬다. 부모의 연명치료거부 서류에 사인을 하는 건 오만가지 생각을 하게 한다. 소생 불가능한 상황에 누군가 꼭 해야 할 일이고 가망 없는 일에 환자를 더 괴롭히기 싫어서 하는 선택이긴 하지만 마음이 무거운 일이다.

오빠는 엄마와 관련해 내 선택에 따르겠다는 의사를 표현했다. 엄마의 가장 큰 의지인 아들임에도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의 오빠 마음도 편하지 않음을 안다. 그래서 더 조심하고 배려하려 애쓰게 된다.




이전 04화 마지막 간병일기 3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