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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간병일기 3

50년 만의 합방 서로 다른 기억



  엄마를 거실에 모시면서 나도 잠자리를 엄마 옆으로 결정했다.

  나는 네 살쯤 엄마에게서 잠자리를 독립했다고 한다. 믿거나 말거나 한 얘기지만 엄마의 증언이니 신빙성은 있는 얘기. 어린 내가 어느 날 아버지한테 술 냄새 나서 싫다고 옆방으로 넘어가 혼자 자기 시작했다고 한다.

내 기억에 부모님이 부부싸움을 심하게 한 날 엄마가 내 방에 넘어온 적이 있었다. 한 이불을 덥고 자다가 심하게 혼난 기억이 있다. 내 딴에 불안했던지 금방 잠들지 못하고 심하게 뒤척인 모양이었다. 엄마가 욕설을 섞어 불같이 화를 냈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나는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부모님과 자는 걸 한사코 기피했던 어린애였다.


  나는 엄마 나이 45세, 엄마의 생일날 저녁에 태어났다. 엄마 나이로 치면 갱년기가 올 나이에 태어난 거다. 주변 친구들이 육아를 다 끝내고 홀가분할 나이에 다시 육아를 시작하게 되었으니 엄마도 힘들었을 것이다. 엄마 역시 큰 딸이 시집가서 엄마보다 서너 달 뒤에 딸을 낳은 할머니였다. 그 나이에 출산도, 할머니도 다 꿈같은 얘기지만 엄마 나이 16세에 결혼 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나는 엄마의 늦은 출산과 생일까지 같은 인연이 운명이 아닌가 생각한다.  엄마의 고단한 인생에 나를 도우미 내지는 엄마의 수호천사로 보내진 게 아닌가 생각들 때가 있다. 50대 후반의 엄마가 어이없이 간첩 조작사건에 휘몰려 고문 피해를 입었을 때 나는 고작 초등학교 5학년 이었지만 엄마대신 밥을 하고 집안일을 배웠다.

  80대 후반 털 진드기 병인 쯔쯔가무시에 감염 됐을 때도, 90세에 중증 열성 혈소판 증후군 (SFTS)바이러스, 일명 살인진드기에 물려 사경을 헤맬 때도 모셔와 간병을 도맡았다. 90이 넘어 허리 골절상을 입어 입원했을 때도 역시 만만한 건 나밖에 없었다. 그때마다 나는 굳이 피할 생각이 없었다. 특히 최대 위기였던 90세 살인진드기 감염 때는 한 달 정도 상급병원으로 옮겨 입원할 만큼 위독한 지경까지 갔었다. 그때 우리 둘째가 고3 수험생이었지만 마찬가지로 피하지 않았다. 그때 나는 내 가족보다 엄마를 선택하는 것에 주저하지 않았다. 둘째에겐 앞으로 기회가 있지만 엄마에겐 마지막 기회였다.

  지지난해에도 엄마는 코로나에 걸려 2주간 격리병동에 홀로 입원한 적도 있다. 지금까지 여러 번 생사의 고비를 겪으며 오뚜기처럼 살아나셨기에 희망을 갖고 싶지만 이번엔 다른 문제였다. 이번엔 정말 엄마의 마지막을 준비해야 한다는 게 보편타당한 일이 될 만큼 얼마는 명을 다 한 것 같다. 받아들이고 나니 오히려 담담해졌다. 엄마를 지킬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온 것이니 나는 오히려 다행이란 생각이 든다. 사랑하는 가족과 갑자기 준비 없이 맞이하는 이별은 얼마나 슬프고 황망한가. 그에 비해 우리에겐 자식의 마지막 도리를 다할 기회가 주어진 거다.

  엄마는 이만하면 좋은 인생이었고 원도 한도 없다는 말을 내개 해주셨다. 그건 마치 유언처럼 들렸고 엄마 자신에게나 내게 위안이 되는 말이었다.


  마침 갱년기 불면증에 잠귀가 밝고 예민한 건 간병하는데 좋은 조건이라고 생각하게 됐다. 엄마의 작은 뒤척임을 알아채고 이른 새벽 화장실 가는데 도울 수 있으니 그만큼 위험을 줄일 수 있다.

엄마가 작게 코를 골면 그만큼 나는 편안했다. 너무 조용하면 귀를 더 기울이게 되는 긴장감을 덜 수 있어서다. 이런 부분까지 내가 신경 쓰는 거에 비해 엄마는 오로지 아들 바라기에서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을 타고났다.

  내가 내 가족 희생 시키며 몸 부서지도록 간병하고 애를 써봐야 아들이 나갔다 들어와 한 번 들여다보는 걸 엄마는 최고의 효도로 아는 사람이다. 그걸 내색하고 느낄 때마다 내가 느껴야 할 좌절감을 엄마도 오빠도 모를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내 운명을 거스르지 않을 생각이다. 그런 애증의 관계가 내 타고난 운명이라면 어쩌겠는가. 아들이 전부인 세상에 태어나 그 아들만 바라보느라 미처 막내딸인 내가 받는 상처를 돌아볼 여력이 없는 걸. 그래서 더 안타까운 걸. 그런 엄마라고 해서 나에 대한 모성이 왜 없겠는가. 내가 상대적으로 느끼는 감정이 그만큼 큰 것일 뿐이란 걸 나 역시 잘 알고 있다.

  오빠가 받는 사랑을 나도 받고 싶어 애태우던 시절이 있었다. 아니 어쩌면 그건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하지만 엄마의 아들에 대한 사랑이 짝사랑이듯 나 역시 엄마에 대한 짝사랑 중이고 짝사랑도 사랑이니 인정하기로 했다.

  내가 엄마 병간호를 할 때마다 둘째의 말처럼 나는 엄마가 고심 끝에 준비한 엄마의 생명보험인지도 모른다.


  엄마의 손을 가만히 만져보았다. 현재 내가 엄마의 손을 잡고 있는 게 중요하다. 그거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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