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이 자유롭고 즐거운 나라
이제 잘할 수 있을 것 같아
by 자유로운 글쓰기 여행자 Oct 13. 2022
지성과 카페에서 브런치를 즐기던 중 옆 좌석으로 자꾸만 눈이 갔다.
기저귀를 찬 세 살쯤 돼 보이는 남자아이가 신발도 벗은 채 카페 바닥에 앉아 자동차 놀이를 하고 있다. 나와 지성은 그 생경한 모습이 놀랍고 신기한데 다른 손님들 그 누구도 그 장면을 의식하지 않는다. 아기를 케어할 부모조차 바라만 볼뿐 제지하지 않았다. 아기 아빠는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임신 중인 듯한 엄마는 천천히 차를 마시고 있다. 가족과 함께 온 강아지는 창 아래쪽 깔개 위에 얌전히 앉아있다. 아기는 이따금 제 아빠랑 대화하며 놀이를 계속했다.
와장창
접시 몇 개가 내 뒤쪽에서 깨졌다. 너무 놀라 돌아보니 바닥에 파편이 잔뜩 흩어져있다. 그때 역시 아기의 부모는 태연했다. 그 가족뿐 아니라 모두가 태연했고 아무도 깨진 그릇 따위 신경 쓰지 않는 분위기였다. 심지어는 그릇을 깬 종업원이나 다른 직원들까지. 손님들에게 놀라게 해서 죄송하다고 사과하지 않았고 그 즉시 득달같이 달려와 치우려는 제스처도 취하지 않았다. 잠시 뒤 빗자루를 들고 와 아무 말 없이 치우고 갈 뿐이었다. ‘앗! 실수, 그릇이 깨졌네, 치워야겠네.’ 그냥 거기 있는 모두의 보편적인 생각일 뿐 아무도 호들갑스럽게 행동하지 않았다. 경험할수록 왜 자꾸 이들의 여유가 부러울까.
저녁 무렵 발코니에 앉아 한참 동안 놀이터를 바라보았다. 놀이터라고 해봐야 주차장 앞에 대여섯 평의 모래밭에 그네 두 개, 그 맞은편에 비슷한 규모의 모래밭에 미끄럼틀 하나가 전부다. 방금 전까지 신나게 씽씽이를 타고 놀던 아이들 셋이 맨발로 놀이터에서 놀기 시작했다. 며칠 동안 그 자리에 그대로 있던 장난감 자동차, 모래놀이 통들을 가지고 모래놀이를 하고 놀더니 잠시 뒤엔 여전히 맨발인 채로 풀밭을 뛰어다닌다.
모래와 몇 가지 놀이기구가 전부인 놀이터, 그럼에도 몸을 써서 신나게 노는 아이들. 독일에 와서 보니 놀이터는 어디나 통나무가 주였다. 페인트칠을 하지 않고, 플라스틱 놀이기구가 없고, 탄성고무매트인 우레탄을 깔지 않았다. 모래가 깔려 있지만 놀이기구는 최소화되어 있었다. 그런데도 아이들은 잘도 놀았다. 알록달록 놀이기구로 가득 찬데 반해 아이들을 찾아보기 힘든 우리 놀이터와 비교된다고 말하면 억지일까?
아기를 데리고 나온 젊은 아빠가 버드나무 아래 요가매트를 깔고 아기를 내려놓았다. 돌도 지나지 않은 듯 아직 걷지도 못하고 기저귀를 찬 상태로 기어 다니는 어린 아기였다. 아기는 밖에 나온 것이 잔뜩 신난 모양이다. 아빠의 무릎을 붙들고 일어나더니 엉덩이를 들썩인다. 그러다가 금세 물 만난 물고기처럼 좁은 요가매트를 탈출해 풀밭 여기저기를 기어 다닌다. 풀이 엉성한 곳은 흙이 그대로 드러난 곳도 있었다. 아가는 아이들이 놀고 있는 놀이터를 향해 계속 기어가고 있다. 하지만 아빠는 아기가 그러거나 말거나 제지하지 않고 잠깐씩 아이의 동선을 확인하며 휴대폰을 들여다본다.
잠시 뒤 아기가 방향을 틀어 다시 아빠에게 돌아가자 놀이터의 아이들이 다 몰려와 아기를 참견하고 좁은 요가매트에 엉덩이를 들이밀고 앉는다. 아기가 제 손을 입으로 가져갈 때마다 내 입에서 한숨이 나오는데 아기 아빠는 그냥 보고만 있었다.
정말 알 수 없는 이 나라의 육아방식에 계속 놀라는 중이다. 분명 그건 비난이나 흉이 아니다. 나 자신 딸 셋을 키워냈지만 내가 옳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혹시 과잉은 아니었을까. 나 어릴 적 시골에서 저와 다르지 않게 자란 것을 생각하면 말이다.
옆집의 갓난아기가 울기 시작한 지 오래되었다. 내가 달려가 달래주고 싶을 만큼 오랫동안 금방 넘어갈 듯한 울음소리가 이어지고 있다. 왜 달래지 않는 걸까? 여기선 카페 같은 곳에서 아이가 울거나 떠들어도 아무도 찌푸리지 않는다. 그건 어쩌면 아이들 이기에 당연한 현상으로 그럴 경우 모두가 신경 쓰지 말자고 합의라도 한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처음 노 키즈 존이 생겼을 때 나는 아무 생각이 없었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반갑기도 했었다. 세 딸이 다 성인이 되고 어느덧 중년이 되었다. 중년이 소음에 민감한 나이라도 되는 듯 카페 같은 곳에서 아이들이 울어대거나 떠들면 자꾸 신경이 쓰이고 달래지 못하고 쩔쩔매는 아기 엄마들이 이해가 안 됐다. 나와 내 일행의 떠드는 소리가 더 클 거라는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다. 그런데 지천명의 나이를 지나고 어느 순간부터 특별한 이유 없이 아이들에게 너그러워지기 시작했다. 어린아이는 하나같이 예쁘고 하는 짓은 귀여웠다. 노 키즈 존에 아무 생각 없던 스스로를 반성하게 됐다. 아이는 곧 어른이 된다. 그 시기 아이들에게 당연한 것을 어른이 억지로 제재하고 간섭할 권리가 있을까? 아이가 갈 수 없는 곳은 누구도 갈 수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한참이나 놀이터를 바라보다 뜬금없이 나는 다시 육아를 한다면 정말 잘할 수 있을 것 같은 근거 없는 자신감이 생겨 혼자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