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집 앞에서 나를 기다려 준다면…]
“혹시 무슨 일 있어?”
노량진에서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하느라 통 연락이 없던 다이아에게서 느닷없이 연락이 왔다.
그와 헤어져 힘들다고 말했더니 그녀는 그날밤 두 말 않고 나를 찾아와주었다.
우리는 함께 술을 마셨다. 이별을 하게 된 과정과 계기를 이야기 하는 것도 이제는 어느덧 능숙해졌다.
길고 길었던 우리의 수많은 문제를 핵심만 짚어 짧게 요약해 전달할 수 있게 될 정도로.
그녀도 많이 힘들고 지칠텐데 오히려 나를 위로하고 걱정해주었다.
‘사랑’때문에 하는 고민은 사실 아무것도 아닌 행복한 고민인데 괜히 힘들게 공부하는 친구 앞에서 힘들다고 잰 것 같아 미안했다.
사람이라는 동물 자체가 참 그렇다. 남의 큰 상처보다 제 손가락에 난 작은 생채기에 더 야단법석을 떠는 법이니까....
오늘 날씨가 많이 쌀쌀하다. 혹시라도 ‘우리가 늘 만나던 회사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지는 않을까’, ‘우리 집 앞에서 나를 기다리지는 않을까’하는 쓸데없는 걱정을 하고 있다.
시간이 조금 더 지나면 이런 기대들도 옅어지겠지?
시간이 한 십년쯤 빠르게 흘러갔으면 좋겠다.
(시간은 그렇게 빠르게 흘러....어느덧 십년이 훌쩍 지나 2021년이 되었다.
올해, 그에게는 큰 변화가 생겼다. 그가......................)
[이별의 본질]
“이별의 본질은 상실감에 있는 거야.
내 것이었던 것이 더 이상 내 것이 아니라는 것에 대한 절망감이 드는 게 가장 힘이 들더라. 소유욕을 버리고, 그 절망감을 이겨내는 것이 중요해”
너무 멋진 첫사랑과 헤어진 이후 그 어떤 이에게도 온전히 마음을 주지 못하는 S선배가 해준 조언이다.
그녀의 말에 공감한다. 하지만 아직도 나는 아침 저녁으로 밀려오는 상실감에 허우적대고 있다.
사랑은 또 올 거라고 누구나 말한다. 하지만 나는 아직 회의적이다.
사랑이야 다시 찾아오겠지만 나를 설레게 하는 사람이 또 있을까?
그와 눈이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찬 때가 있었다.
나의 감정에 나조차 불안해 했을 때 그는 내게 이렇게 말해주었다. slow and steady.....하자고.
하지만 지금 나는 나에게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상실감, 비참함, 그리운 마음이 fast and perfect....하게 사라지기를 바랄 뿐이라고.
[그대가 좋아하는 스타일]
전에 그에게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유난히 외모에 자신없어 하는 나지만 ‘일년 365일중 단 5일’은 내가 굉장히 예뻐 보이는 날이 있다고.
애석하게도 오늘은 그런 드문 날 중의 하루다(그렇다면 이제 올해는 그런날이 4일 남게 되는 건가?)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이렇게 예쁜데 그에게로 달려갈 수 없다는 사실에 슬프고 화가 난다.
그가 오늘 날 보았다면 분명, 예의 그 쑥쓰러운 미소를 한껏 머금고 오늘, 정말 예쁘다.........라고 말해주었을텐데.
그가 좋아하는 헤어 스타일에, 진하지 않은 화장, 하얀 셔츠가 유난히 잘 어울려 보이는 날이다.
혹시 우연히 마주치는 날이 오더라도, 그날은 그가 좋아하는 스타일로 머리를 하고 옷을 입고 화장을 해서 평소보다 예쁘게 보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로부터 3년뒤 정말로 우연히 교대역에서 그를 우연히 만났다. 나의 당시 새로운 남자친구와 함께. 어색하게 지나쳤고, 나는 굳이 알은체를 했다. 하지만 전혀 예뻐보이진 않았을 것 같다. 당시 만나던 친구와 저녁을 먹으러 가던 길이었다. 그리고 그날, 나는 결국 당시 애인과 저녁먹는걸 취소하고 혼자 집으로와 울며 잠들었다.)
[잊었던 적 있어?]
잊었던 적 있어?
-물론 있어. 하지만 잊었다는 것은 표층적인 것이고 그것은 그저 잊는 것뿐 소멸하는 것은 아니야. 잠시 필요가 없어서 마음의 호수 같은 장소에 잠겨 있을 뿐. 하지만 뭔가를 계기로 그것은 다시 떠오르지.
_아디안텀 블루 중에서
갑자기 세상에 모든 이별 노래와 세상의 모든 이별을 다룬 소설이 마냥 내 이야기처럼 느껴진다.
그말은 곧, 세상의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나와 같은 이별을 겪었다는 말일텐데 마치 나 혼자만 이별한 듯, 모든 슬픔 다 짊어진 듯 지내고 있는 내가 부끄러워지기 시작했다.
에잇! 맘대로 슬퍼도 못하겠다.
오늘은 그의 계절학기 기말고사 날이자, 그에게 진정한 의미의 방학이 시작된 날이다. 하지만 내가 알고 있는 그의 스케줄대로라면, 시험이 끝났다는 해방감도 잠시 다시 일주일에 3 번 가야만 하는 토익 학원으로 바쁜 걸음을 재촉했으리라.
언젠가 그는 내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내가 너무 바빠서 너랑 많은 시간 함께 보내지 못해 미안해, 하지만 나 자신도 너무 화가 나.
이렇게 빡빡하고 숨쉴 틈조차 없는 생활은 내가 상상했던 캠퍼스 생활이 아니라고!”
잠도 줄여가며 공부에 전념하는 그가 안쓰러웠던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이제 정말로 그가 기다리던 방학이 됐으니 조금은, 여유로운 생활을 하면서 지냈으면 좋겠다.
[그는 당신에게 반하지 않았다]
나를 만나기 전, 그러니까 그가 영국에 오기 훨씬 전, 그가 막 대학에 입학했던 그 시기에 그에게는 여자친구가 있었다. 언제나 바쁜 공대생 스케줄에도 불구하고 아마도 그는 그녀와 상당 시간 붙어 다녔을 것이다.
그와 그녀는 흔히들 말하는 캠퍼스 커플이었다. 그들이 어떻게 그리고 왜, 헤어졌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모든 연인들의 헤어짐의 이유가 표면적으로 정확히 드러나는 법은 없으니까) 그는 지난 이별의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나를 많이 의심했어. 나는 그런 점이 싫어서 헤어졌고…”
나는 그녀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이렇게 믿음직하고 바른 아이를 의심했다니, 그로 인해 이렇게 사랑스런 아이를 잃었으니 무척이나 현명하지 못한 여자라고 생각했다. 절대로 나는 그렇게 어리석은 행동을 하지 않을 거라고. 하지만 돌이켜보건대, 나 역시 예전의 그녀와 다를 바 없었다. 그에 대한 사랑이 깊어지면 깊어질 수록 아이러니하게도 예전 그의 그녀가 그랬던 것처럼 나에 대한 그의 사랑을 의심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사랑 자체보다는 사랑의 크기를 의심했다고 하는 것이 맞겠지만.
늘 그에 대한 나의 사랑의 크기에 비해 나에 대한 그의 사랑은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툴툴대면서 땡깡을 부렸다. ‘그가 정말 나를 사랑할까, 사랑한다면 이렇게 해주어야 하는데, 그는 그렇게 해주지 않잖아. 그렇다면 그가 날 많이 사랑하지 않는 거겠지.....’라는 혼자만의 생각으로 얼마나 많은 시간 바보같이 힘들어했는지 모른다. 갖가지 말도 안 되는 시중의 서적들도 내게는 사탄과 가까운 말들로 나를 힘들게 했다. 그 대표적인 책이 바로 <그는 당신에게 반하지 않았다> 는 것.
전화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면, 그는 당신에게 반하지 않았다.
당신과 데이트하지 않는다면, 그는 당신에게 반하지 않았다.
술기운에만 당신을 찾는다면, 그는 당신에게 반하지 않았다.
결혼 이야기를 피한다면, 그는 당신에게 반하지 않았다.
아직 대학도 졸업하지도 않은 그에게 결혼을 서두르길 바란 것은 분명히 아니다.
하지만 직접적으로 결혼은 먼 미래의 일이며 아직 생각해본 적도 없다는 말을 그에게서 들었을 땐, 난 왜 내가 그를 더 만나야 하는지에 대해 그 어떤 이유도 찾을 수 없었다.
그를 독차지할 수 없다면, 그는 당신에게 반하지 않았다.
무모하지 않고, 비이성적이지 않고, 여유만만하고, 언제나 제멋대로인 그 사람,
지금도 당신을 헷갈리게 하고 확신을 주지 않는 남자라면 대답은 단 한가지 그는 당신에게 전혀 반하지 않았다.
그런건가, 결국? 내가 아는 그는 무모하지 않고, 이성적이며 여유가 있다.
그렇다고 해서 정말로 그는 내게 반하지 않았던 것일까?
앞으로 만나게 될 나의 그는 예전 그만큼 따뜻하고 바르며 정직했으면 좋겠고, 조금 덜 이성적이고 조금 덜 냉정했으면 좋겠다.
[나는 네가 쉽게 싫어질 것 같지 않아]
“나는 네가 쉽게 싫어질 것 같지 않아.”
그가 내게 했던 수없이 많은 달콤한 말들 중에서 내가 가장 좋아했던 말이다.
때는 바야흐로 2007년 6월 23일. 본머스.
그날은 밤바람이 무척이나 찬 겨울이었고 우리는 둘 다 어느 정도 취기가 오른 상태였다.
E&H 집에서 모두 모여 술을 마시던 중, 그가 친구들에게 여행하는 동안 내가 저질렀던 만행(?)에 대해 털어놓았다. 졸지에 그 모든 비난의 화살을 받아야 했던 나는 토라졌고, 그는 그런 내 기분을 눈치채고 잠시 바람을 쐬자며 나를 밖으로 데려갔다. 물론, 인정한다. 행복하기만 해도 모자를 그 시간에 참 많이도 못되게 굴면서 그를 힘들게 했다. 언제나 말없이 모든 걸 참고 이해해주었던 그인지라 그때 그가 그렇게 힘들었는지 솔직히 몰랐다. 그는 여행에서 돌아온 이후 처음으로 여행하는 동안 많이 속상했노라고 털어놓았다. 특히 스위스 융프라호 정상에서 참 많이도 화가 났다고. ‘유럽에서 가장 높은 우체국’에서 어떻게 후안 마틴(당시 내 사랑을 독차지했던 콜럼비안 가이)에게 엽서를 쓸 수 있냐고 말이다. 나는 그저 언젠가 후안이 내 수첩에 적어준 그의 집 주소가 생각났고, 그래서 그에게 엽서를 보냈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게 그를 화나게 한 모양이다. 입장을 바꿔 생각해보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유럽의 가장 높은 우체국이라는 특별한 의미가 있는 장소에서 그가 내가 아닌 다른 여자에게 엽서를 보낸다는 것. 생각만으로 기가 찬 일이다.
그는 화가 나거나 속상한 일들을 일일이 다 표현하지 않는다.
그래서 몰랐는데, 듣고나니 너무나 미안했다.
“………기분 나빴다면 미안해, 진심이야. 내 옆에 네가 있어서 옆에 있는 네게 편지를 쓰는 게 쑥스러워서 그랬는데……다시는 그런 일 없을 거야.”
마음을 다해 미안하다고 말하는 내 모습에 그는 화를 애써 억누르며 그렇게 말했다.
내가 쉽게 싫어질 것 같지 않다고. 그러니 제발 자기 말 좀 잘 들으라고…
(부모님 말도 선생님들 말도 안들었는데;;;)
그 이후로 나는 너무도 철썩같이 그 말을 믿었다.
언제나 한결같은 그가 나에 대한 마음이 변할 리도 없을뿐더러, 그의 말처럼 쉽게 나를 싫어하게 될 일은 없을 줄로만 알았다. 물론 그와 내가 헤어진 이유가 그가 나를 싫어해서는 아니다. 하지만 쉽게 싫어지지 않을 것 같다면서…쉽게 싫어지지 않을 것 같으면 내가 아무리 못되게 굴고 모진 말로 헤어지자고 해도 나를 놓지 말았어야지…그는 나를 놓아버렸다.
놓아달라고 한 건 나였고 그래서 입이 열개라도 말은 없지만, 나는 그가 나를 끝까지 잡아줬으면 했다.
못되고 이기적인 발상이란 거 안다.
만약 또다시 스위스 융프라호에 오를 기회가 주어 진다면, 그래서 유럽에서 가장 높은 우체국에서 누군가에게 우편엽서를 쓸 수 있게 된다면 그에게 엽서를 띄울거다.
다시… 너를 만나, 처음부터 다시 제대로 사랑하고 싶다고.
[눈이 내려도 만날 수 없다, 우리는]
퇴근길에 갑자기 눈이 내리기 시작했던 어느 날, 도서관에서 열심히 공부를 하고 있을 나의 그에게 문자를 보냈다. 하늘에서는 눈이 내리고 있었고, 밖에는 손을 잡은 다정한 연인들이 거리를 거닐고 있었다.
나를 제외한 길거리 사람들 모두 너무나 행복해 보여서 괜히 심술도 났다.
하지만 차마 시험을 앞두고 있는 그에게 전화를 걸어 지금의 내 상황을 말하며 툴툴거릴 수는 없었다.
그래서 나는 심술을 부리는 대신 이렇게 문자를 보냈다.
[text-나] 밖에 눈이 많이 와....
[text-그] 눈 많이 맞지 말고 들어가, 다음에 나랑 같이 맞자^^
그때 심술이 났던 나는 이렇게 답을 보냈다.
[text-나] 그럴 수 있다면.
그럴 수 있다면? 예쁜 그의 답 문자에 나는 고작 그렇게 밖에 말할 수 없었을까?
결국 우리는 단 한 송이의 눈도 함께 맞지 못하고 헤어져야 했다.
오늘도 창밖에는 그날처럼 하얀 눈이 내린다.
하지만 눈이 내려도 만날 수 없다. 우리 둘이는.
비가 내려도 만날 수 없다. 더 이상 비가 내리는 날의 가로등을 함께 올려다 볼 수 없게 됐고, 우산 속에서 몰래 입을 맞출 수도 없게 됐다.
하지만 여전히 눈을 감으면 보이는 얼굴.
[헤어지던 날]
2시간 정도의 대화를 끝내고 나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 주변사람들 이야기 때문에 흔들리지 말고 조금만 더 만나보자.”
하지만 우리는 헤어졌고 그는 결국 내가 주변사람들이 말하는 대로 귀가 얇아 자신을 놓은 거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생각한다고 해도 이제 와서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그래도 왠지 조금은 억울한 생각이 든다. 주변사람들 이야기에 솔깃해하며 좌지우지되기도 하는 성격이긴 해도 그를 만나는 동안 그에 대한 내 마음은 한번도 흔들린 적 없었다.
내가 이별을 결심하게 된 것은 주변사람들이 아니라 바로 그 때문이었다.
그는 많이 변했다.
그는 잔디밭이나 계단 난간에 앉을 때마다 엉덩이 차가워진다며 자기 무릎에 앉혀주던 사람이었다.
행여 자는 동안 내가 불편할세라 말없이 귀고리를 빼 자기 바지에 고이 넣어주던 사람이었다.
혼자 토라져서 그의 생일날 끝끝내 전화 한 통, 문자 한 통 보내지 않았던 여자친구에게 화가 났을 법도 한데 먼저 전화해서 "니가 전화 안 하면 불안해, 또 나쁜 생각을 하고 있을 것만 같아서"라며 화를 풀어주던 멋진 남자였다.
헤어지자는 말에 무척 화가 났겠지만, 그 모든 화를 참으며 묵묵히 나를 잡아주던 사람이었다.
한 달 간의 유럽여행을 떠난 동안 도착지마다 내게 엽서를 보내주던 사람이었다.
여행에서 돌아왔을 때 제일 먼저 나를 찾아와 보고 싶었노라고 말해주던 그런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는 언제부턴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는 만약 자신이 변한 게 있다면 그건 아마 나 때문일거라고 했다.
“니가 날 이렇게 만들었어”
그때 그는 분명 장난스런 말투로 대수롭지 않게 말했지만, 나는 그 말을 듣고 꽤 충격 받았었다.
너무도 다정하고 로맨틱했던 그를 내가 변화시킨 거라는데 달리 할말이 없었다. 단지 대체 내가 그를 어떻게 만든 건지 스스로가 원망스러웠다. 그는 나를 선택했다고 말했고, 그가 만났던 그 누구보다 내가 마음에 든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아니다.
나는 그를 선택한 게 아니라 그가 내 마음에 들어온 그때부터 그가 아니면 안 되었다.
그는 또다시 다른 사람을 선택해서 마음에 드는 누군가를 찾을 수 있겠지만 어쩐지 나는 그게 조금 힘들 것 같다. 누군가 다시 내 마음에 들어와서 사랑하게 되는 것. 그게 가능할지도 지금으로서는.... 잘 모르겠다.
[ 둘만의 룰, 이성친구 일대일로는 만나지 않기!]
약속이 많아졌다.
그가 만나지 말라던 친구도 만나기로 했고, 소개팅도 한 번 했다.
소개팅하던 날은 그가 더욱 생각나 차만 마시고 바로 집으로 왔고, 그가 만나지 말라던 친구와의 약속시간을 앞두고 있는 지금은 괜히 또 서러워서 눈물이 난다. 그 친구와 한국에서 또 만난다면 자기랑은 헤어질 생각하라고 무척이나 확고하게 이야기했던 그날,
“나는 니가 싫다면 그 누구도 만나지 않을거야, 그러니까 화내지마”
“나는 이성친구가 있는 사람들이, 애인 외에 다른 이성을 둘이서만 만난다는 건 절대 이해할 수 없어”
“갑자기 궁금한건데. 그럼 너는 예쁜애들이나, 니네 과 후배 보고 흔들릴 때 없었어? 단 한번도?”
“신기하게도, 여자친구가 있을 땐 다른 이성들은 이성으로 보이질 않아 나한테는”
그는 그렇게 이야기했었다.
그의 말대로라면 이제 그에게는 더 이상 여자친구가 존재하지 않으므로 그의 주변에 있는 모든 여자후배와, 여자동기, 여자선배, 여행을 하다 알게 된 누나, 등 모든 지인들이 이성으로 보일거다, 젠장!!
요즘 나는 약속이 많아졌다.
그도 역시 약속이 많아졌을까?
[나 홀로 300일]
예정대로라면, 그러니까 그와 내가 헤어지지 않았다면 오늘은 우리가 만난 지 300일이 되는 날이다.
혹자는 어리석게도 왜 헤어진 그와의 기념일을 세고 있냐고 묻겠지만 우연히 들춰본 새 다이어리에 빨간 하트와 함께 300일이라는 메모를 본 것 뿐 이다.
다이어리는 친절히도 내게 우리가 만난 지 삼백일이 된 날뿐만 아니라 그와 내가 1000일이 되는 날이 언제인지도 알려주었다. 해가 바뀌기도 전에 미리, 우리의 300일, 일년, 500일 그리고 천일 등을 미리 적어 놓은 탓이다. 잠시 아무 생각도 나지 않고 멍해졌지만 그래도 괜찮다.
‘오늘이 무슨 날인 줄 알아? 우리 300일이야’하며 아무일도 없었던 듯 그가 먼저 연락해주기를 기다리는 어리석은 미련도 사라질테니까.
괜찮다. 그가 없어서 300일도 1주년도 우리의 천일도 내 생일도 무의미하게 느껴지지만 그래도 괜찮다.
시간이 흐르면 분명 나아질테니까,
그러니까 괜찮다.
다 괜찮다.
[꿈]
Part I. 꿈을 꾸었다
그가 떠나버리고 홀로 남은 나는 흐르는 눈물을 멈추고자 세수를 했다. 그때 누군가 나에게 믿을 수 없는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그가, 돌아왔어. 햇살이 눈부시게 맑아도, 제니퍼 없이는 아무 의미가 없다면서.’ 놀란 나는 서둘러 세수를 마치고, 그에게로 향했다. 무슨 말을 먼저 하면 좋을까.
열마디 말 필요 없이 그냥 뛰어가 그의 가슴에 안길까.
아님, 일부러 냉랭하게 왜 돌아왔는지부터 조목조목 따지고들까..
이런 갖가지 상념 속에 그에게로 향하는 순간, 나는 너무도 낯선 풍경을 보았다.
깊은 한숨과 함께 담배를 피고 있는 그의 모습. 차마 한걸음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던 나는 가만히 그 자리에 서서 너무도 낯선 그의 모습만을 지켜보았다.
그렇게 한참을 소리없이 울면서. 깨어나 보니 꿈이었다.
그의 모습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내 눈가엔 눈물이 고여 있었다.
그에게 무슨 일이 있는 걸까? 아니면 혹시 그도, 내가 그리운 걸까?
왜 그는 생전 입에도 대지 않던 담배를 태우고 있는 것일까…
Part II. 사랑하는 여자가 불행하다는데 계속 그 사랑을 이어갈 수 있는 남자는 없다
또 그의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그는 내게 물었다. 그와 사귀는 동안 불행했다면서 지금은 헤어져있으니 행복하냐고.
사랑하는 여자가 불행하다고 말하는데, 계속 그 여자 곁에서 그녀를 사랑할 수 있는 남자는 없다고.
나는 꿈속에서도 아무 말도 못한 채 고개를 떨구고 울고 있었다.
그때 비록 아무 말도 못하고 눈물만 흘렸지만 혹시 현실에서 그가 내게 다시 물어온다면 이제는 말 할 수 있다. 많이 좋아한 만큼 힘들어서 행복하지 않다고 생각했다고, 늘 당신을 기다리기만 하는 것 같아 가슴 아프고 속상했는데 헤어져 있는 건 그보다 훨씬 더 많이 힘들고 불행한 일이라고, 가슴 아프고 속상해도 좋으니 다시 기다리고 싶다고, 내가 기다리면, 예전처럼 늦더라도 꼭 내게 온다면 아무리 오랜 시간이 걸린다 하더라도 기다리겠노라고.
Part III. 그가 자주 꿈에 등장하는 이유
잠들기 직전까지 생각했던 한 사람, 그 사람은 너무도 자연스레 꿈속에서도 나를 찾아온다.
우리들의 천국을 여러번 되풀이해보며 잠든 날에는 김찬우나 장동건이 등장했고, 마지막승부를 보다 잠든 날에는 손지창이 예의 그 고글을 낀 모습으로 3점슛을 하는 멋진 자태를 선보였다. 한 때 열광했던 HOT의 음악을 들으며 잠든날에는 어김없이 토니와 우혁사이에서 갈등하는 내가 꿈에 등장했다. 그렇게 TV속 트렌디 드라마의 주인공 혹은 가요톱10의 단골 가수들과 수많은 사춘기 밤을 지새운 후, 남자가 내 꿈을 찾아온 적은 거의 없었다. 오직 SF 혹은 업보와 관련된 미스테리한 스토리가 꿈의 대부분을 차지했을 뿐.
그런데 나름 열정적이고 나이브했던 사랑이 끝난 이후에는 줄곧 꿈속에서 그 사람을 만난다.
사귈 당시에는 단 한번도 꿈에 등장하질 않아 속상하게 하더니 헤어진 후에는 매일밤 나를 속상하게 한다.
눈을 뜨고 있어도 감고 있어도 생각난다.
Part IV. 또다시 꿈
어딘지 모를 낯선 교실 안. 1분단 맨 뒷줄 창가 쪽에 그가 앉아 있다.
그리고 2분단 중간 즈음 그를 의식하면서도 아닌 척 친구들과 열심히 대화를 하고 있는 내가 보인다.
그의 눈은 시종일관 나를 쫓고 나는 그것을 알아채고, 일부러 더 그의 시선 따위 아랑곳 하지 않는다는 듯 그렇게 제 할 일을 한다. 그런 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이, 그의 표정이 조금은 슬퍼 보인다.
사실, 나의 마음은 그보다 더 아프다.
하지만 둘 중 누구 하나 선뜻 서로에게 다가가지 못한다. 깨어보니 또 꿈이다.
꿈은 잠재의식의 표상이라는 세인의 말처럼 어제 새벽까지 그의 생각을 하다 울며 잠든 탓인지 요즘 그가 꿈에 자주 보인다. 그가 잘 살고 있었으면 좋겠다.
그는 지금 나만큼 힘들지 않을 것이니 쓸데없는 걱정 따위 하지 말라는 지인들의 말처럼 그렇게 그가 잘 지내고 있었으면 좋겠다.
Part V. 악몽
“어디야?”
“명동.”
“알았어, 그럼 잘 놀아, 끊을께.”
둘 중 누구도 선뜻 전화를 끊지 못하고 어색한 침묵이 흐른다. 그 침묵을 먼저 깬 건 언제나처럼 성격이 급한 그녀.
“뭐해?”
“네가 왜 화가 났을까 생각하고 있어.”
“난 네가 연휴 끝엔 나와 시간을 보낼 거라고 생각했어, 근데 명동이라니? 휴…됐다. 끊을께.”
달칵. 깊게 생각도 해보지 않고 그녀는 그에게 문자를 전송했다.
[text] 차라리 헤어지자.
또 그의 꿈을 꾸었다.
처음에는 슬픈 얼굴이더니 이제는 제법 표독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다.
어쨌거나 나는 꿈속에서도 그에게 제멋대로 이별을 고하고 있었고 우리는 꿈속에서도 가슴 아픈 이별을 했다. 아, 이 지긋지긋한 악몽. 하지만 이 악몽이 조금 더 지속됐으면 하는 마음이 든다.
광화문에서 을지로 4가 그리고 신천으로 이어지는 지하철 안에서 흘렸던 내 눈물과 매일 밤 꿈속에 등장해서 나를 괴롭히는 그의 모습 그리고 그와 얽힌 추억들. 이 모든 것이 조금은 천천히 사라졌으면 좋겠다. 조금 길게 아파도 좋으니 천천히 아주 천천히 희미해졌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