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상시보다 체온이 높아지는 그 무렵에 피해야 할 일]
머릿속이 복잡해질 때면 어김없이 방의 구조를 바꾸곤 한다.
옷장에서부터 갖가지 잡동사니가 올려진 화장대며 침대까지 전부 그 위치를 바꿨다.
모든 살림살이를 다 뒤집고 헤집어서 정리를 다 마치고 난, 그 새벽. 갑자기 그의 안부가 궁금해졌다.
아니 처음부터 그의 안부가 궁금했고 그 생각을 멈추려고 애꿎은 방을 다 뒤집어놓았는지도 모른다.
곤히 자고 있을 눈먼곰에게 전화를 했다.
그가 보고 싶다고...
평상시보다 체온이 높아지는 그 무렵에는, 감성이 차고 넘처 흐르는 라디오나 이별 노래를 듣는 일 따위는 피해야 한다.
‘얼마나 울었나, 멀리 손을 흔들던 그대 모습 바라 보면서. 이순간도 그때 기억은 나를 눈물짓게 해요.’
심플리 선데이 노래가 흘러 나온다.
오늘밤도 틀렸다.
[다시, 봄]
함께 처음으로 본 영화, 뮤직 & 리릭스
처음으로 손을 잡던 날
테스코에서 점심을 먹던 평범한 토요일 오전
달콤한 맛이 좋아 자주 마시던 그 칵테일
비행기를 놓치는 바람에 바르셀로나 길거리에서 밤새 고생했던 그날
구엘 공원으로 향하는 길에 이유없이 티격태격했던 일
이별 여행이라고 생각했던 스위스
내가 쉽게 싫어질 것 같지 않다고, 말하던 그의 맑은 눈동자
유럽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그의 뜨거운 손을 맞잡던 그 지하철 역 앞
내 모든 투정을 받아주던 그의 어른스러움 (지금 생각해보면 그의 인내심....)
다시 또 봄이다.
단 한 번의 봄을 함께 보냈을 뿐인데 무수히 많은 봄과 여름, 가을 그리고 겨울을 함께 보내고도 헤어질 수 밖에 없는 연인들은 어떻게 그 시간과 추억을 감당하는 걸까.
시간은 모든 것을 원활하게 해준다는 것을 믿지만 그 시간의 길이에 대해서는 누구도 명확하게 말해줄수가 없다. 2년이 지났다. 다시 2년 전 그때로 돌아간다면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월하노인이 묶어준다던 그 빨간 실, 내 새끼 손가락에 메어 있는 그 실의 끝이 닿은 곳이 그의 손가락이라고 생각했던 시간들.
지금 잠시 실타래가 엉켜서 혹은 너무 길게 늘어져서 아직 서로의 끈을 알아볼 수 없는 것뿐, 언젠간 함께할 것이니 기다림의 시간을 견뎌내라고 그렇게 말해준다면, 지금 이 시간이 조금은 덜 힘들 것 같다.
몇년이 더 흘러야 나의 봄에서, 그가 떠나게 될까....
[‘처음’이자 ‘마지막’이 된, 단 한번의 크리스마스]
그가 줬던 선물과 편지들을 정리했다.
미처 다 정리하지 못한 크리스마스 카드 하나가 서랍에서 나왔다. 불과 며칠 전, 처음으로 함께 맞이했던 크리스마스 이브에 그에게서 받은 카드다.
눈물이 쏟아졌다.
‘다음 크리스마스도, 그 다음해 크리스마스에도 무얼 할 지 함께 고민하자, 사랑해’
무척이나 기뻐했으면서도 괜히 “그럼 다음다음해 크리스마스엔 함께 고민하지 말자는 거야? 왜 다음해 크리스마스라고만 썼어?” 라며 말도 안 되는 투정을 부렸던 그때의 내 모습이 원망스럽다.
새로운 다이어리에는 이미 그와의 기념일이 빼곡하게 적혀있다.
300일, 1주년, 그리고 아직도 한참이나 남은 우리의 1000일. 뭘 또 그렇게 서둘러 그 모든 기념일들을 기록해뒀는지.
그가 나 때문에 힘들어했으면 좋겠다는 못된 생각이 들다가도 그만이라도 편히 지내기를 기도한다.
맑게 웃는 그의 목소리가 듣고 싶다.
[헤어짐의 계기가 되는 것은 언제나 ‘전화’따위의 사소한 일이다]
혼자 있었으면 하루 종일 힘들었을텐데 다행히 뽐이 찾아와 함께 시간을 보내주었다.
그녀와 같이 저녁을 먹고 함께 티비를 보면서 그의 생각을 잠시 미뤄둘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돌아가고 나니 다시 또 그의 이야기를 함께 나눠줄 누군가가 필요했다.
그와 헤어지기 전날 함께 있었던 엄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연애도 잘 못하면서, 있던 남자친구랑도 헤어지고. 잘한다.
이미 니 껀데, 그가 전화 좀 안 하면 어떠니?"
쿨한 기집애.
내가 너무 그를 닦달했던 걸까, 그깟 전화 때문에?
아니다. 쌓인 것들이 그 전화로 터져버린 것 뿐이다.
대학친구들과 스키장을 다녀오던 그날, 전화를 하지 왜 문자를 넣었냐고 묻는 내게 운전하는 친구에게 방해가 될까봐 전화를 못했다는 그의 말이 그땐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았다.
늘 나를 기다리게 하고 혼자 둔다는 생각이 들게 했다.
하지만 지금은 헷갈린다. 그가 정말 그랬는지, 내가 지나치게 예민했던 건지.....
[이름도 사랑스러운 핑크커플요금제]
아침 10시.
회사에 출근하자마자 커플요금제를 해지했다.
새해 벽두부터 이런 일로 그의 기분을 상하게 만들고 싶지 않아 연말에 미리 해지를 했다.
안달희복달희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무슨 일이든 조바심을 내면서 빨리 처리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다. 그런 내가 하루를 참았다는 건 분명 기특한 일이지만, 상대방이 일방적으로 커플요금제를 해지했다는 내용을 114상담원으로부터 통보 받기에 아침 10시는 아무래도 너무 이른 시간이다.
미안했다.
오후 8시.
회사 앞으로 D선배가 찾아왔다. 그녀의 진심이 담긴 따뜻한 격려와 위로의 말이 얼마나 큰 힘이 돼주었는지 모른다. 친구가 없이 어떻게 이별의 시간을 견뎌낼 수 있을까.
그러나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땐 괜찮은 것 같다가도 혼자 있을 땐 어김없이 힘들다.
이별 후 제일 서러운 것은 더 이상 아무도 내게 '잘자'라는 말을 해주지 않는 단 사실이다.
그게 이렇게 슬플 줄은 예전에는 미처 알지 못했다.
아침에 일어났을 때 밀려드는 상실감 또한 늦은 밤 못지않게 나를 괴롭힌다.
12월 30일 오후 5시, 그와 마지막 통화를 했으니까 이제 겨우 3일이 지났을 뿐인데
벌써 그의 목소리가 너무도 그립다.
[He is too good for me!]
엘리자베스를 만나기 위해 광화문에 있는 그녀의 집에 들렸다.
그녀는 내 표정이 여느 때와 다르게 슬퍼보인다며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물었다.
나는 겨우 서너번 만난 것이 고작인 그녀 앞에서 남자친구와 헤어졌다며 창피하게도 눈물을 보이고 말았다.
(그녀는 나의 client의 아내다)
“더 좋은 누군가 나타날 거야, 분명히.”
“그 사람보다 더 좋은 사람은 없을 거예요. 그는 내게 너무나 과분한 사람이었어요.”
“그 누구도 자신보다 더 소중한 사람은 없어.
분명히 다른 좋은 사람이 있을 테니 시간의 흐름에 슬픔을 맡겨보는 건 어떨까.”
그녀와 헤어진 뒤 건대에서 갑빠(고등학교 친구들 모임)를 만났다.
그와 헤어졌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를 위로해주기 위해 서울까지 올라와준 고마운 친구들.
그녀들은 궁금해했다. 그토록 사랑했던 그와 헤어진 이유를. 그와 헤어진 이유를 하나하나 되뇌이며 입 밖으로 그 이유들을 내뱉는 순간, 그가 내게 서운하게 했던 것들만 털어놓으려고 해도 자꾸 그가 내게 잘해준 기억만 떠올랐다. 그와 헤어진 순간부터 아니 헤어지기로 결심한 그 순간부터 줄곧 후회했던 내 선택에 대해 나는 친구들의 동의를 구하고 싶었다. ‘잘 헤어졌어’ 라는 친구들의 말로 위안 아닌 위안을 찾고 싶었다. 그렇게라도 스스로를 위로하지 않으면 그를 보낸 게 나 스스로였다는 죄책감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았으니까.
그런데 인정할 수 밖에 없다.
그는 내게 너무나 멋진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섣부른 내 결정에 대한 당위성은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결국 나는, 우리는 인연이 아니었다고 억지를 부려야 했다.
[마음에도 없는 아픈 말들]
오늘은 MJ가 신천으로 나를 찾아왔다. 사실 오늘 MJ를 만나기 전까지는 그에게서 다시 연락이 올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있었다. 그래서 버틸 수 있었는데 오늘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미처 나도 기억하고 있지 못했던 우리의 마지막 전화통화 내용이 떠올랐다. 쉬지 않고 내 할만 쏟아 부었던 그날 그 전화통화. 그에게 말할 틈조차 주지 않고 일방적인 통보를 했던 그날의 기억이 떠오르자, 실낱 같은 희망마저 사라졌다.
“너를 만나는 동안 나는 늘 불안했어. 그래서 행복하지 않았어.
부담없이 만나자는 네 말에 나는 동의할 수가 없어,
나는 앞으로 그 누구를 만난다고 해도 부담 있이 만날 거야.
부담 없이 조금만 더 만나자는 건 너무나 이기적인 생각이야. 관계라는 건 책임이 뒤따라야 한다고 생각해,
책임감 있게 서로를 만나야 하는 거 아니야?
나는 이제 곧 스물 아홉이고 서른인데 그때 가서 우리가 헤어진다면, 나는 정말 힘들 것 같아. 우리가 헤어져야 한다면 지금이 맞는 시기인 것 같아.”
그는 갑작스런 내 결정과 가시돋힌 말들로 인해 상처 받았을 것이다.
그는 이해할 수 없겠지만 그와 헤어지기로 결심하기까지 나는 수없이 많은 날을 혼자 고민하고 괴로웠다.
점점 더 그에게 빠지는 내가 두려웠고, 더 깊어지기 전에 그와 헤어지는게 맞다고 생각했다. 언젠가 찾아올지도 모를 이별로 인해 상처를 받게 될 것이 두려웠다.
그래서?
상처받는 게 두려워서 가장 사랑했던 순간, 사랑을 놓아버렸다.
게다가 그에겐 지금, 자신에게 상처를 준 사람을 다시 안아줄 만한 여유가 없다. 해야 할 일이 너무도 많기 때문이다.
그가 해야 할 모든 일을 마치고 나를 찾아와준다면,
그땐 그가 받은 상처 하나하나를 따뜻하게 어루만져 주고 싶다.
그런 기회가 생긴다면, 그래주고 싶다.
[이별]
사랑하는 이들은 떨어져 지내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별이라는 건 아무리 오랫동안 헤어져 있더라도 서로가 아무렇지 않은 듯 살아갈 수 있을 때 그때서야 비로소 할 수 있는 법칙이 있다면 어땠을까? 나의 이별은 사랑에 대한 반칙이고 기만같았다. 하루종일 보고싶다는 생각만 하고 있으면서도 상대가 조금만 무심한 것 같으면 쉽게 상처받고, 보란듯 일방적으로 이별을 통보하곤 했었다.
사랑한다면 내가 이토록 홀로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것 정도는 알고 보듬어주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정작 나는 단 한번도 상대방을 고려하지 않았다.
그도 나처럼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걸 미처 알아채지 못했던 거다.
알았더라면 조금 더 상대방의 입장에서 이해하고 기다려주었을텐데.
다시 또 누군가와 이별을 해야 한다면 그때는 조금 덜 조급해 하고 조금 더 배려하고 싶다.
기다림조차 행복임을 알고, 더 많이 인내하고 싶다.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는데, 과연 내가 다시 사랑하게 된다면 그럴 수 있을까? 자신은 없지만, 노력하고 싶다.
[술취한 나의 귀고리를 빼주던 사람]
<**을 그만 둔 사람들의 모임>이 있어서 강남 모처에 있는 M쉐르빌이라는 곳엘 갔다.
그곳에서 그날 처음 소개받은 Y 선배(그는 내가 입사하기 바로 몇 달 전 퇴사를 했기에 우리는 서로 이름만 들었을 뿐 그날 처음 마주쳤다)라는 사람을 만났다. 서로 안부를 주고 받으며 그간의 연애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때 처음 본 Y 선배라는 분이 내게 이런 말을 했다.
“헤어졌다는 그분 꼭 다시 만났으면 좋겠네요.
그분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동안 눈동자가 굉장히 반짝반짝 빛나는 거 아세요?
혹시라도 저도 다시 그때로 돌아갈 수 있다면 지금 제니퍼처럼 순수하고 예쁜 사랑을 하고 싶네요.”
그는, 나의 남자친구와 같은(아직은 ‘전 남자친구’라고, 말하는 것도 가슴이 아프다) 부류의 남자들은, 자기의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고 싶어하지도 않고, 여자친구에게서 그런 모진 말들을 들은 이상 다시 그 여자친구에게 연락을 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말을 해도 되는지 모르겠지만..그래도 그분…제니퍼 연락을 기다리고는 있을 거예요.”
과연 그럴까?
참 신기한 일이다.
일년을 만난 나는 헤어지고 난 후 그의 심정에 대해 도통 모르겠는데 어떻게 한번도 그를 보지도 못한 사람이 그렇게 정확히 그를 아는 것처럼 이야기 하는 걸까?
그의 말대로라면 그는 내게 절대로, 절대로 연락을 하지는 않겠지만 내 연락을 기다리고는 있을 거란다.
그렇지만 내 연락을 기다리고 있을거라고 했다.
오늘은 문득 조심스레 내 귀고리를 빼주던 기억이 떠오른다.
그는 (내게) 다정한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