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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읽는 헤드헌터 Dec 02. 2021

사랑의 시작 2

 

[그의 엽서]


 언젠가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내가 아주 긴 여행을 떠나게 된다면, 그가 혼자 떠난 여행지에서 내게 보내주었던 것처럼 도착하는 목적지마다 그에게 엽서를 보내야겠다고. 


따스한 햇살이 비치는 길거리 낯선 여행지에서,

내 안부를 궁금해 할 단 한 사람을 위해 여행하는 동안 일어난 소소한 일상을 편지로 전하는 것.


기다리는 사람에게서 온 엽서만큼 반가운 것이 또 있을까? 

홀로 유럽을 여행하고 있을 그에게서 하나 둘씩 도착한 엽서, 그것이 주는 행복은 받아보지 않은 이들은 결코 알 수 없을 것이다. 특히나 어떤 선물보다 진심이 담긴 손편지를 좋아하는 나같은 부류의 여자에겐 그야말로...


멀고도 낯선 여행지에서 나를 생각하며 쓴 글들. 

한정된 엽서 지면이지만, 한 마디라도 더 전하고 싶은 마음에 여행지에서 생긴 일들을 빼곡하게 적어 내려갔을 그의 모습이 그려진다. (그럴꺼면, 아예 편지지에 쓰지...엽서는 너무 좁잖아!!)


예정과 달리 프라하의 야경에 매료돼 하루를 더 묵게 되었다고, 

로마에서는 바티칸이 특별하듯 그에게 있어서는 내가 가장 특별하다고, 

베를린에서 마음 맞는 사람들과 기분 좋게 술을 한 잔 하고 있다고, 

몸이 떨어져 있어도 마음이 멀어지지 않는 경우도 있는 것 같다고, 

내가 보고 싶다고, 


그리고.........나를 많이 사랑하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고.


아직은 생각뿐이지만 언젠가는 나도 여행을 떠날 것이다. 

지금 내가 느끼는 이 복잡하고도 오묘한 감정을 그에게 전하고 싶어서라도 꼭 혼자 여행을 떠나야겠다.

이제 7시간 후면 그를 만날 수 있다. 


유럽의 강렬한 햇살에 피부가 검게 그을린데다 제대로 씻을 수가 없어 엉망이라는 그의 전화를 받았지만 그런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에게 뭐가 제일 먹고 싶은지 물었더니 1초의 망설임도 없이 고기가 먹고 싶다고 했다. 제육볶음, 불고기, 소고기 미역국을 준비하려면 새벽까지 못 잘 것 같다. 


빨리 그가 돌아와서 그를 위해 준비한 저녁을 맛있게 같이 먹고싶다.

맛이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지만;



 

[비타민 C의 남다른 효능] 


본머스에서 6개월간의 짧은 어학연수를 마친 그는 한달 간 유럽 배낭여행을 가는걸 끝으로 최종 목적지 한국으로 돌아가는 일정을 짜놓았다. 유럽여행 전날, 그에게 ‘못된너구리표’ 비타민 C를 건네주었다. 

농담 속에 진심을 가득 담아 비타민 복용법에 대해 일러 주었다.


“하루 한 알씩만 복용하면 돼. 꾸준히 복용하게 되면 나 외에 그 어떤 이성에게는 어떤 반응도 할수 없게 되는 아주 아주 무서운 비타민이야. 매일 하나씩 take해줘, 용법 용량 제대로 지키지 않으면 부작용도 있으니까 조심하고.”


비장한 표정으로 그에게 겁을 주었지만, 비과학적인 이야기는 믿지 않는 그는 대수롭지 않게 비타민을 챙겨 넣었다. 굳이 저 무서운 비타민을 복용하지 않더라도 딴짓 따위는 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믿지만, 그래도 예방해서 나쁠 건 없으니까. 지금은 이탈리아를 여행 중인 그에게서 전화가 왔다. 

비타민 효과 정말 제대로인 것 같다고. 다른 여자를 봐도 아무 반응이 오지 않는다고. 

오예 ㅋㅋㅋ



[두번째로 이별을 고하던 날]

연애에서 중요한 건 지속적인 애정과 관심이다. 

그게 느껴지지 않을때 여자들은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에게라도 이별을 고할 수 있다.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

광화문 오피시아 빌딩의 내 사무실 자리너머에서는 흥국생명과 시티은행 그리고 S타워가 보인다.

S타워 꼭대기에 새겨진 큰 S자 이니셜이 마치 내 목걸이 팬던트 같아 왠지 그 건물이 마음에 든다. 

나중에 나의 그도 저 수많은 빌딩들 중 한 곳에서 일을 하게 되겠지?

그땐 내가 그가 내게 해준 것처럼 그의 회사 앞에서 그를 기다리고 싶다. 

같은 건물에서 일하게 된다면 더욱 좋겠지만 그렇게 되기는 힘들 테니까. 


창 밖으로 <갑자기> 비가 내린다. 

"밖에 비오는데 우산은 가져왔어?"


어떻게 내가 자기 생각하는 줄 알고 문자를 보냈을까. 

타이밍이 잘 맞은 거겠지만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텔레파시가 통하는 게 분명하다고 우기고 싶다.


비가 내린다는 일기 예보를 보고도 출근하는 순간 비가 오지 않으면 굳이 우산을 챙겨 나오지 않는 

준비성이 없는 편이다.

그러니까 오늘도 물론 우산을 가져오지 않았지만 그에게는 우산을 가지고 왔다고 문자를 보냈다. 

과외를 하러 간 그에게 괜한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았으니까. 


아주 어렸을 때부터 나는 사랑이란 일생에 단 한 번뿐이어야 한다고 믿었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고 힘들어하다가도, 금세 다른 사람을 만나 또 사랑에 빠졌다고 하는 친구들을 보면매번 신기했다. 물론 나도 심각하지 않게 짝사랑했던 사람들은 쉽게 잊고 또 다른 이를 좋아했던 적은 있지만 진심을 다해 그리고 마음을 다해 <함께 사랑한> 그 사람을 쉽게 잊을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모든 인간이 불완전하듯, 그렇게 불완전한 인간의 사랑도 불완전하다는 어떤 드라마 대사가 생각난다.


사람이 태어나면 죽는 것과 같은 이치로 사랑이란 감정도 어느 순간 피어올랐다가 점점 옆어져서 시들고 죽어가는, 그런 게 아닐까? 한 때 죽을 것 같던 사랑도 또 그 사람 아니면 안 될 것 같던 순간도, 지나보면 다 인생의 한 부분으로 자리할 뿐 흐르는 시간 속에 묻히기 마련이니까.


그러니까 어릴때부터 내가 믿어왔던, 사랑은 한번뿐이어야 한다는 그런 믿음부터 내려놓아야 할 것 같다. 

만약 그 믿음대로라면, 그와 헤어지고 난 후에는

내 인생에 사랑은 두번다시 찾아오지 않게 되는 끔찍한 상황이 벌어질테니까.


사랑의 시작은 늘 똑같다

어느 순간 그와 그녀가 만나, 서로가 서로의 눈에 들어오고 첫눈에 반하지는 않았다고 해도 한두 번 옷깃이 스치고 자주 마주치다 보면, 이제 그 사람이 보이지 않는 시간에도 그 사람이 궁금해지기 시작하고. 핑계를 찾아서라도 그 사람 근처에 있게 된다. 보고 싶으니까.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어도 내 눈에 들어오는 것은 오로지 그 한 사람.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 마음은 옅어지고 마침내 마음이 모두 빠져나가고 비어지면 이제 머리만 남아 사랑이라는 감정적 문제를 이성적으로 해결하려고 한다. 그렇게 되면 결론은 뻔한, 이별. 하지만 이별 또한 경험해봐야 하는 과정이다. 이별을 겪지 않고도 성숙한 사랑을 이뤄낼수있다면야 좋겠지만 어리석은 인간은 (나같은 부류) 잃어봐야 소중한 것을 지켜내는 방법에 대해 고민하고 노력할 거다. 

물론 이별의 구실이 나라면, 자책감을 견디기 힘들겠지만 이별의 구실이 상대에게 있다고 해도 원망이 쉽게 사그러들지는 않을 것 같다. 엎어치나 매치나 이별은 존재의 상실감으로 힘들 수 밖에 없다. 


이런 생각을 하던 즈음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라는 책을 다시 읽게 되었다. 조제, 는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며 살아 가고 있었다. 


 

조제-거기가 옛날에 내가 살던 곳이야. 깊고 깊은 바닷속, 난 거기서 헤엄쳐 나왔어. 너랑 세상에서 가장 야한 섹스를 하려고.
츠네오-그랬구나. 조제는 해저에서 살았구나…
조제- 그곳은 빛도 소리도 없고 바람도 안 불고 비도 안 와. 정적만이 있을 뿐이지.
츠네오-외로웠겠다.
조제-별로 외롭지도 않아. 처음부터 아무 것도 없었으니까. 그냥.. 천천히, 천천히, 시간이 흐를 뿐이지. 난 두 번 다시 거기로 돌아가진 못할거야. 언젠가 네가 사라지고 나면 난 길 잃은 조개껍질처럼 혼자 깊은 해저에서 데굴데굴 굴러다니겠지. 하지만 그것도 나쁘진 않아.

 

장애를 가지고 있던 조제는 자신만의 세계에 아무도 모르게 자신을 가두고 살다가 순박하고 착한 츠네오를 만나면서 사람과 함께 소통하고 또 살아가는 법을 배우게 된다. 츠네오가 함께 있으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동물이라 생각했던 호랑이도 더 이상 겁나지 않을 만큼 그녀는 사랑을 통해 강해진다. 결국 츠네오가 사라진 자리에 조제는 홀로 남았지만 또다시 자기 삶을 꾸려간다. 그들의 이별이 내게 가르쳐 준 사실은 이별=사랑에 실패했다는 뜻이 아니라는 거다. 둘이 헤어졌다는 사실이 여전히 아프고 슬프지만, 두사람에게는 이별의 때가 찾아왔을 뿐이었다. 


사랑한다고 해서 자꾸 그에게 무언가를 바라는 나와 마주할때마다 내게 실망하게 된다. 

그저 사랑하는 순간 행복했으면 된거지, 서로 좋아서 사랑하는건데도 사랑하니까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며

자꾸만 뭔가 더더더 그에게 바라는 것 같다. 


이별 후, 상황에 대한 걱정만 하고.


사랑할 수 있을 때 사랑하고 이별은 이별 후에 걱정해야 지나고 나서 후회가 없고, 그래야 지금 내가 행복할 텐데 나는 언제쯤 철이 들까.


사랑과 동시에 이별을 생각하는 나란 사람. 

진짜 힘들다. 상대에게도 나 자신에게도.



[그의 전 여자친구]

우연히 그의 미니홈피에서 예전 그의 여자친구 사진을 보게 됐다. 

나를 만나기 이전에 그 누군가를 만나 사랑을 나눴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으면서도 새삼 그렇게 기운이 쭉 빠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여자들은 착각한다.  

지금의 내 남자가 전에 그 누구를 만나 어떤 사랑을 나눴든 나는 과거의 그녀들과는 다를 거라는 것. 

나는 더 특별할 거라는 착각. 


 


<타임테이블>

전기회로, 전자장, 신호와 시스템 등 온통 머리 아픈 전공과목들로 가득찬 그의 시간표를 보고

속상해진 나는, 중간 중간 내 생각도 좀 해달라며 새로운 타임테이블을 만들어 선물했다. 

내가 만들어준 그의 타임테이블대로라면 목요일, 두 시, 지금쯤 그는 내 생각을 하고, 

세시 전공과목이 끝난 후 네 시에는 혹시라도 내가 화났는지 체크를 해야 하는데, 

아직 아무런 연락이 없다. 


쳇! 

 


[사랑하는 이의 부모님]

사랑하는 이의 부모님은 한번도 뵌 적이 없더라도 존경 받아 마땅하다. 

내가 사랑하는 이를 낳아주고 길러주신 분인 만큼 누구보다 소중한 분들이기에.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날 그는 아버지께 드릴 선물로 넥타이를 사고 싶어했다. 

하지만 시간이 여의치 않아 결국 넥타이를 사지 못하고 빈손으로 돌아갔는데, 그때 그가 못한 일을 나라도 해드리고 싶었다. 그래서 한번도 뵌 적 없는 그의 아버님을 위해 넥타이를 골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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