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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읽는 헤드헌터 Dec 01. 2021

그의 이야기



어쩌다 보니 나는 학교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곳에 사는 ‘한국인 유학생’이 됐다.

걸어서 50분 정도 되는 거리를 매일 통학하는 것은 무척이나 심심하고 지루한 일이다.

하루빨리 자전거를 한 대 사야겠다고 생각했다. 


“너희 집보다 한 블록 아래, 왜 언덕길 오르기 전에 노란색으로된 이층집 있잖아.

거기 나랑 동갑인 여자애가 사는 데 이따 소개해줄테니 꼭 나와. 

맥주나 한 잔 하자.”


형 또래 여자애? 그럼 나보단 두살 위겠군.

내일부터는 함께 걸어갈 수 있는 두살 위 여자사람 친구가 생길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날 밤, 

우리집 바로 아래 블록에 산다는 ‘그녀’를 소개받았다. 


그녀가 펍에 들어온 순간, 영화처럼 한줄기 후광이 비쳤다. 

터키쉬 친구와 함께 나타난 그녀는 짧은 반바지 차림에 캐주얼한 블랙 상의를 입고 있었다. 

머리는 어깨에 살짝 닿을 정도로 길렀고, 웃는 모습이 예쁜 사람이었다. 


한국에서 기자 생활을 하던 그녀는 통역사 없이 영어로 인터뷰를 하고 싶어서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영국엘 왔다고 했다. 당당한 말투로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그녀의 모습에 호감이 생겼다. 

왠지 그녀 옆에 있으면 유쾌한 일이더  많이 생길 것만 같았다.


그녀는 결코 미인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몸짓이며 분위기가 사랑스럽고 매력적인 여자였다.

먼저 그녀와 친구가 된 형들도 이미 그녀의 매력에 매료돼 있는 것 같았다. 


다음날, 우연히 학교 복도에서 다른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그녀와 마주쳤다.

오후에 주로 수업이 있던 나와 달리 그녀의 수업은 대부분 오전 중에 끝이 났다. 

그래서 가끔 이렇게 수업을 일찍 마치고 나온 그녀와 마주치는 것을 제외하면 학교에서 그녀를 볼 수 있는 기회는 좀처럼 없었는데 오늘은 그녀를 볼 수 있어서 기분이 좋았다. 


무렵의 나는 학교를 마치면 어김없이 집에 돌아와 그날 배운 부분을 암기하는데 대부분의 시간을 할애했다. 군대 제대 후 복학전에 어렵게 짬을 내서 온 연수라, 후회 없이 공부만 하고 가자고 다짐했던 터였다. 

딴짓은 거의 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그런 나의 흐름을 방해하는 건 언제나 형의 전화였다. 

처음에는 술 마시자는 형의 전화를 모두 거절하고 공부에만 열중했다. 

하지만 형들도 포기하지 않고 집요하게 전화를 했다.

" 야 임마! 펍에서 맥주를 마시며 보낸 시간도 지나고 나면 다 뼈가 되고 살이 되는거여. 나와, 올때까지 기다린다" 해야할 공부량을 다 채우고 난 후에, 그러니까 형들이 이미 거나하게 취해있을 때쯤 나는 늘 제일 느즈막이 술자리에 합류하곤 했다. 


“호그세드 펍에서 간단히 맥주 한 잔 하자.”

웬일로 형들이 아닌 동갑내기 친구 K로부터 호출이 왔다. 친구의 부름이니, 바로 나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간편한 외출복 차림으로 갈아 입고, 호그세드 펍으로 향하던 중 문득 

'지금 이 시간 그녀는 뭘 하고 있을까?' 그녀의 안부가 궁금해졌다. 


그녀를 생각하며 펍에 다다랐는데 놀랍게도 호그쉐드 펍에, 그녀가 있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곳에, 그녀가 있어서 당황했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그녀에게 인사를 건넸다. 자연스럽게 전부터 알고 싶었던 그녀의 전화번호를 물어보았다. 그녀는 내 휴대폰에 직접 자기 전화번호를 입력해주었다. 이름 가운데 플러스를 넣었네? ES가 아니라 E+S? 플러스가 의미하는 게 뭘까?

그녀는 다른 사람과는 다르게 모든 것이 왠지 좀 특별했다. 

이름가운데 +를 넣는 건 그녀만의 방식일까?

그녀에 대해 궁금한게 늘어간다.


그녀가 사는 집은 전형적인 영국식 단독 주택이다. 

언젠가부터 술을 마시고 늦게 집에 들어가는 밤이면 그녀의 집 2층 창문을 올려다 보는 버릇이 생겼다. 


오늘은 E의 남자친구 H형이 영국에 온 기념으로 E&H 네 집에서 다같이 모여 맥주 파티를 하기로 한 날이다.

(E와 H 두사람은 한국에 돌아와 결혼했다). 형네 집으로 가는 길에, 그녀의 방에 불이 켜져 있는 것을 보고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즈음엔, 어디든 그녀와 함께 가고 싶었다. 


창문 틈 사이로 희미하게 그녀의 실루엣이 보였다. 

분명히 집에 있는데 그녀는 내 전화를 받지 않았다. 안들리는 걸까?

조심스레 아주 작은 돌을 집어 들어 그녀의 창문을 향해 던져 보았다. 

한 번, 두 번, 그리고 세 번째 돌을 던졌을 때 드디어 그녀가 창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고전적인 방식이지만 통했다)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맨 어깨와 젖은 머리의 그녀는 방금 막 샤워를 마쳤다고 했다.

헤어드라이어로 머리를 말리고 있어 전화벨소리를 듣지 못했다는 그녀는 잠시만 집 앞 모퉁이에서 기다려 달라고 했다. 


5분도 채 되지 않아 미처 다 마르지 않은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그녀가 나왔다.

뭐가 그렇게 급했는지 한 손으로는 허리띠를 청바지에 넣으면서 젖은 머리 그대로 걸어나오는 그녀가 나를 보며 말했다.


 “기다리게 하고 싶지 않았어. 

근데 여기, 운동화 끈좀 매줄래?”


허리띠를 청바지에 넣으면서 그녀는 너무도 자연스레 내 앞으로 발을 내밀며 그녀의 컨버스 운동화 끈을 매달라고 했다. 나는 이때까지 단 한번도 여자의 운동화 끈을 매 본적이 없다.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뭔가에 홀린듯이 상체를 숙여 그녀의 왼쪽 운동화 끈을 묶어 주었다. 

간신히 운동화 끈을 다 묶었을 때, 갑자기 오른쪽 운동화 끈을 매던 그녀가 내 쪽으로 확 고개를 돌렸다. 

순간 나의 얼굴에 그녀의 머리카락이 닿았다. 

그녀의 샴푸 향기도 나의 코끝에 닿았다. 

술을 마시기도 전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마음이 부풀어올랐다.


그녀의 샴푸 향과 맥주에 취했던 그날, H형 집에서 술을 다 마시고 그녀와 둘이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무엇이든 해야했다. 그녀에게로 향해 있는 마음을 꾹꾹 담아놓다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하지만 용기가 잘 나지 않았다. 

혹시라도 어린애 취급하면 어쩌나, 그녀는 내 맘과 다르면 어쩌나, 영국에서 보낼 6개월간 공부만 하기로 했는데 연애를 시작해도 되는건가, 내가 지금 용기 내지 않으면 그녀를 놓칠 거 같은데....

모든 것이 혼란스러웠다. 


말을 하는게 나을까. 그냥 이렇게 지내는게 좋을까. 

집에 혼자 있을 때면 언제나 그녀의 웃는 모습이 떠오르고, 그녀를 보면 자꾸만 그녀의 손부터 잡고 싶고 또 안고 싶어지고, 매일 그녀를 생각하는데.....


생각이 복잡해진 나는 함께 나란히 걷던 그녀를 앞질러 무작정 세차게 달렸다.

 

나란히 걷다가 혼자 앞서 달려간 나를 의아하게 바라보는 그녀. 

한참을 앞서 뛰어가다 멈추고 뒤돌아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말없이 손을 내밀었다. 

아무말을 하지 않았지만 내맘을 찰떡같이 알고, 

그녀가 내게로 다가와 내가 내민 손을 따뜻하게 그러쥐었다.


됐다...

그녀가 내가 내민 손을 잡았다.

두손을 꼭 잡은 채 그녀의 집까지 걸어갔다. 


그리고 마침내 도착한 그녀의 집 앞. 

떨리는 목소리로 그녀에게 '잘자'라는 인사를 건네고 돌아서려는데,


그녀가 나를 돌려세워 갑자기, 

내 볼에 입을 맞추었다. 


그녀는 언제나 예기치 못한 행동으로 나를 당황하게 만든다. 

그럴 때마다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 밖에 없었지만 이제는 어쩔수가 없다. 

나는 인정해야 한다. 

나는 그녀가 좋다, 그냥 좋은게 아니라 너무, 좋다.


그녀는 이번 겨울 휴가는 이탈리아에서 보낼거라고 했다.

긴 휴가 전에, 우리는 함께 영화를 보러갔다. Music and Lyrics.

영화를 보는 동안 영화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머릿속은 온통 그녀의 손을 잡고 싶고 키스를 하는 상상으로 가득했으니까. 

하지만 아직 아무 사이도 아닌데 그녀에게 키스를 할 수는 없었다. 

아쉬움 한가득 안고 그녀 집앞에서 헤어졌다.


그리고, 그녀가 이탈리아로 떠난 지 열흘 하고도 하루.

그녀는 도착하는 여행지마다 안부를 전해왔다.

그녀가 보고 싶었다.


드디어 며칠 후면 그녀가 돌아온다. 

그녀가 돌아오면 아주 로맨틱한 방식으로 그녀에게 고백할 작정이다. 

프로포즈 장소도 미리 물색해 두었다. 나와 그녀의 집 중간에 위치한 바로 그 공원.

고백을 하기에 더할나위없이 좋은 장소다. 

아름드리 나무 아래에 그녀에게 줄 장미꽃을 숨겨 두었다가 꽃과 함께 진심을 전해야지.


그녀를 생각할때마다 저 밑 어딘가부터 묵직하고 뜨거운 무언가가 올라오는 것만 같다.

이토록 뜨거운 내 마음을 그녀는 알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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