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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읽는 헤드헌터 Dec 01. 2021

그녀 이야기


세상에는 두 부류의 사람이 있다.

첫인상을 믿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굳이 분류하자면, 나는 첫인상을 믿는 타입의 여자다. 2007년 1월 중순, ‘그’를 처음 본 그 순간 나는 이 남자가 내 인생에 적잖은 파도를 치겠구나, 예상했다.


그를 처음 본 건 본머스(BOURNEMOUTH, 영국 남부 해안도시) 어느 펍에서였다.

본머스는 런던에 비해 조용한 도시다. 이곳 유학생들 대부분은 학교 수업을 마치면 제2의 스쿨이라 불리던 펍에서 축구 경기를 함께 응원하거나 그날 있었던 수업에 대해 이야기를 하며 저녁 시간을 보내곤 했다.


그는 곱슬거리는 머리에 약간은 검은 피부, 심성이 착한 누렁소의 순수한 눈망울을 가지고 있었다.

이미 유행이 지나고 목이 늘어난 회색 티를 입고 있었음에도 자체발광 빛이 났다.

패션센스는 없지만 잘 다듬으면 꽤나 멋있어질 것 같은 스물다섯살 청년.


금방이라도 비가 올 것 같은 영국의 하늘과, 추적추적 내리는 비에 어느 정도 익숙해질 무렵,

제 얼굴만한 가슴을 가진 하우스 메이트 마티나(당시 18살, CZHCH)의 초대를 받아, 마티나의 베프 알리(체코와 유고슬로비아가 체코슬로바키아이었을 때부터 친구다)의 생일파티가 열린다는 웨스트본 펍엘 가게 되었다.


그곳에서 우연히 같은 반 친구 sic (1982년생, 대구)를 만났다.

sic 옆에는 나와 동갑내기라는 문제의 남자, 그놈의 눈먼곰이 서있었고 sic 소개로 가볍게 눈인사를 나눴다. 첫인상이 심하게 별로였다. 갭 모자를 눌러 쓰고 구석에 앉아 연신 담배를 태우고 있었는데, 그때 녀석의 모습은 마치 크리스토퍼 로빈이 떠난 뒤 슬퍼하고 있는 가여운 곰돌이 푸처럼 서글퍼보였다.


“6개월 동안 열심히 어학연수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가서 토익 시험에 열중할꺼야.

졸업 전에 마지막으로 쉬는 거라 생각하고 공부도 하면서 인생도 좀 즐기려고 왔어.”


풉! 뭐지..이 거창한 포부는…;;


겉으로는 (비) 웃었지만, 삼성이나 현대 안전관리 담당자로 취업을 하는 게 목표라고 말하면서

그에 필요한 스펙을 하나하나 갖춰가고자 노력하는 면이 왠지 믿음직했다. 겉보기와는 달리 내실이 있는 타입같아 마음을 열어줬다. 그렇게 81년생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급속도로 친해진 눈먼곰과는 다른 클래스였음에도 불구하고, 거의 매일 통화를 하곤 했다. 대부분의 용건은 물론 술을 마시자는 것이었다.

날씨가 맑으면 맑아서 흐리면 또 흐리다는 핑계로, 학교를 마친 후에는 매일매일 술을 마셨다.


여느때와 다름없이 그날도 눈먼곰이 전화를 했다.

"야! 날씨가 너무 맑은데 술이나 한 잔 하자. 뉴스타 펍으로 나와.

이 오빠가 이번에 새로 이사 온 한국 유학생 소개시켜주께."


오빠는 무슨. 흰소리 전문가 눈먼곰 시키.

근데 웬일인지 녀석의 목소리가 한껏 들떠 있었다. ‘뉴스타 펍’은 눈먼곰과 우리집 한가운데 있는 펍이다.

즈음엔 주로 여기서 저녁 시간을 보내곤 했었다.


딱히 해야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심심하기도 하던 차 녀석의 전화가 내심 반가웠던 나는 서둘러 나갈 채비를 했다. 옆집에 사는 이사(ISA, 터키어로 JESUS라는 의미다)에게도 한국인 유학생 모임에 함께 나가지 않겠느냐고 물었더니 냉큼 좋다며 따라나섰다. 담배는커녕 술도 입에 대지 않는 무슬림 청년인데 유독 한국인을 좋아해서 웬만한 모임엔 매번 그를 초대하곤 했다. 그날도 이사를 데리고 평소와 다름없는 차림으로 뉴스타 펍엘 갔다. 펍에는 눈먼곰과 sic, K(1983년생) 그리고 E(1984년생)와 함께 ‘그’가 앉아 있었다.


잘생기고 반듯한 청년.


저녁내내 웃고 떠들고 맥주를 마시는 동안 시종일관 그에게'만' 눈길이 갔다. 손목에서 팔꿈치로 이어지는 전완근도 무척이나 근사했다. 그때 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몇마디 말을 나눠본 것도 아닌데, 돌아가신 아빠 눈에도 흡족할 만큼 그가 참 바른 청년이란 생각이 들었다.

나중에 결혼을 한다면 반드시 이런 남성이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두 번째로 그를 보게 된 건 Hogshead pub에서였다.

우리가 자주 가던 펍이 아니었는데. 거기서 그를 마주칠 줄은 몰랐다. 예기치 않은 장소에서 만나서 더 당황스럽고 떨렸지만 그에게 나라는 존재를 알리고 싶어서 용기를 내 그가 앉아있는 술 자리로 다가가 인사를 건넸다.


"안녕. 여긴 웬일이야?

이따가 술자리 끝나면 집에 같이 갈까?"


그와 나의 집은 '감사하게도' 같은 방향이었다. 학교를 기준으로 내가 제일 먼 동네에 살았는데, 그가 홈스테이 하는 곳은 우리집보다 조금 더 멀었다.


평상시 나라면, 그런 말을, 그것도 마음에 둔 남자에게 절대로 먼저 하지 못하는 편이다. 같이 걸어가자니?

그런데 왠지 그날은 누구든 용기를 내야할 것 같았고 그게 내가 먼저라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이 술자리를 파하고 나면, 드디어 그와 단둘이 집까지 함께 걸어가는건가?

도저히 술자리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호감이 가는 상대에게 호감을 표현한 일이 처음 있는 일이라 불안했고또 거절 당하게 될까봐 두려웠다.


“친구들이랑 술자리를 옮겨서 한 잔 더 하게 됐어요.

오늘은 집에 같이 가긴 힘들 것 같은데...아직 더 계실거죠? 혹시 생각보다 일찍 끝나면 연락할께요.”


역시나 거절인걸까?


그는 예의 그 해맑은 미소로 내 전화번호를 물었다. 나는 그의 전화기를 건네 받아 내 전화번호와 이름을 입력해 주었다. 처음 써보는 노키아의 휴대폰 문자 버튼이 익숙하지 않은 탓에 이름을 입력하는 데만 꽤 오랜 시간이 걸렸는데 결국 띄어쓰기 버튼 대신 + 버튼을 눌러 이름 중간에 +가 들어가게 (ES 가 아니라 E+S로) 잘못 저장 하게 됐다. 하지만 수정할 정신도 없고, 손도 떨리고 마음도 떨린 상태라 잘못 저장된 그대로 그에게 전화기를 건네 주었다.


그날 결국 그에게서 전화는 오지 않았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 후,

눈먼곰이 또 전화를 했다. "야, 비 온다. 나와라. 파크스톤 펍이다"


거기엔 당연히, 그도 있었다.

그날 펍에서 전화번호를 주고 받은 이후, 우연히 학교 까페테리아나 길거리에서 그를 마주칠때마다 더 신경이 쓰여서 그의 옆으로 지나갈때는 옆모습, 뒷모습에도 힘을 주고 걷곤했다.


내가 왔는데도, 그는 나는 안중에도 없이, 다른 사람들과 웃고 떠들고, 대화를 나누느라 바빠보였다. 게다가 Sunny(1984년생) 옆에 앉아 다정하게 사진을 찍고 있는 모습이라니!  내가 이런 꼴을 보려고 이 나이에 영국유학을 왔나, 별의별 한심한 생각이 다 들었다. 친구들에게는 ’속이 좋지 않아서 맥주는 그만마셔야 할 것 같다‘고 핑계를 대고 먼저 자리를 일어서려고 했다.


그, 순간 부드러운 그의 음성이 들려왔다.


“조금만 기다렸다가 같이 갈래요?

밖에 비가 많이 오는데 내가 데려다 줄께요.”


그래, 기다릴께.

나는 언제까지라도 그를 기다릴 수 있을 것 같았다.

다시 자리에 앉아 남은 술을 마저 마시면서 그가 나를 데려다 주는 그 순간을 기다렸다.

설레고 초조하고 또 불안한 마음으로.


그는 약속대로 술 자리가 끝난 후 집까지 바래다 주었다.


“가로등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 보이죠?

가끔 이렇게 비가 오는 날, 가로등 올려다 보는 걸 좋아해요.”


하마터면 "나는 너와 함께 걷는 지금 이 순간이 좋아" 라는 고백을 할 뻔 했다.

함께 우산을 쓰고 걷는 동안 가끔씩 나의 손이 우산을 든 그의 손에 부딪히곤 했다.

그때마다 그는 왜 그렇게 손이 차냐며 자신의 온기 가득한 손으로 나의 차가운 손을 덮어, 녹여주었다.


그날 이후로 친구들과 술자리가 있는 밤이면 언제나 그는 나를 집까지 바래다 주었다.

그때마다 우리 집이 조금 더 먼 곳에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당시엔 m이 눈엣가시였다. 그에게 콧소리를 내며 "오빠 오늘은 나 데려다주면 안돼? 언니는 DG오빠있잖아“라며 애인도 있으면서 매번 그에게 관심을 보이는 여자아이.


바보같이 그런 상황에서 나는 늘 그를 그애에게 양보하게된다. 속맘과는 다르게.

"그래 나는 괜찮으니까 민 데려다 줘"


m 말대로, 그가 아니어도 날 데려다 줄 남자사람친구는 둘이나 더 있었다. DG  그리고 sic.

그런데 어쩐 일인지, 매번 나를 데려다주는 일은 그의 차지가 되었다. 이유는, 매번 티 안나게 그가 나를 데려다줄 수 있는 구실을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봄 햇살이 완연한 3월.

아직은 조금 쌀쌀한 바람이 불었지만, 한국의 봄 햇살 못지 않게 따사로운 그 무렵.

학교에서 주최하는 봄 맞이 코치 여행 이벤트가 게시판에 떴다. 까페테리아에서 그가 그의 친구에게 자신도 그 여행에 함께 할 거라는 이야기 하는 걸 들었다. 오마이 갓! 나도 신청했는데!!

무려 2박 3일 동안 그와 함께 할 수 있는 걸까?

처음 그를 본 그때처럼 가슴이 마구 뛰었다.


코치 여행을 신청한 리스트를 보니 한국인은 그애와 나 둘뿐이었다.

나는 한국친구들 그 누구에도 이번 여행에 대해 발설하지 않았다. 그리고 속으로 기도했다.

제발 아무도 동행하지마라, 동행하지마라.


일주일 뒤, 우리는 함께 여행을 떠났다. 도버해협을 건너 벨기에와 독일을 다녀오는 코스!

한국 사람은 우리 둘 뿐이었다, 유후~


기대와 설레임으로 떠난 여행은 생각보다 일정이 빡빡해서 하루하루가 피곤했다.

하지만 버스안에서 언제나 자신의 어깨를 내어주며

가는 곳곳마다 친절하게 대해주는 그가 있어 편하고 행복하게 낯선 도시를 돌아다녔다.

쾰른 대성당에서 일행을 놓쳐 아찔했을 때도, 벨기에의 낡고 허름한 숙소에서의 하룻밤도 그가 있어 마냥 즐거웠다.


늦은 저녁 나란히 앉아 맥주를 함께 마실때, 버스에서 눈이 마주칠때, 이어폰으로 음악을 나눠 들을때, 매순간 가슴이 찌릿찌릿 심쿵했지만

아직 우리는 아무 사이도 아니기에, 자꾸만 부풀어 오르는 내마음을 진정시켰다.


그렇게 3일 간의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

이제는 제법 익숙한 그의 어깨에 기대, 수십번도 넘게 고민했던 팔짱도 끼고,

편히 기대 잠을 자고 있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나의 머리가 ‘쿵’하고 그의 가슴으로 떨어졌다.

잠이 깼지만, 창피해서 그의 가슴에 머리를 묻고 자는 척 계속 눈을 감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그러니까 나는 아직도 그 순간을 잊지 못한다.


그는 그의 가슴으로 떨어진 나의 무거운 머리를,

무언가 굉장히 소중한 것을 다루듯 조심스레 다시 그의 왼쪽 어깨로 올려 놓아 주었다.

내 몸 전체를 이루는 세포 하나하나에 까지 묵직한 파장이 퍼져 나갔다.


이 남자의 어깨에 기대서라면 세상 어떤 힘든 일도 왠지 다 이겨낼 수 있을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만약 누군가와 사랑을 시작 하게 된다면 그처럼 다정한 사람이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까부터 계속 창밖만 바라보고 있는 그녀석.

그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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