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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읽는 헤드헌터 Dec 02. 2021

사랑의 시작 3

 

[그의 첫 번째 생일]


10월 1일 사태, 발단

해마다 10월 1일 국군의 날은 지난 27년 동안 내게 그다지 특별한 날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를 만나면서부터 그날은 1년 중 중요한 하루로 자리하게 되었다. 그의 생일은 10월 1일 국군의 날이다. 군대에 있는 2년 동안 미역국은 늘 챙겨먹을 수 있었다고 언젠가 그가 우스갯소리를 한 적이 있다. 


오늘은 오랫동안 기다려온 그의 생일. 

그런데 아직도 축하한다는 말조차 건네지 못하고 있다. 

 ‘생일 축하해’ 이 한마디 하기가 왜 이렇게 힘이 든 건지. 


그는 내가 왜 화를 내는지조차도 모르는데 나는 왜 그의 생일날 그에게 화를 내고 있는 걸까? 

그는 내가 원하지 않는 배려를 배려라는 이름으로 한다. 

나와 만날 때만 유독 피곤해 하는 그를 보는 것도 이제는 버겁다. 

예전에 그는 나를 비타민처럼 여겼었다. 피곤하다가도 나를 보면 기분이 좋아지고 힘이 생긴다고 했었다. 

그런데 요즘에는 내가 마치 그가 해야 할 수많은 레포트 제일 마지막 리스트에 껴 있는 것처럼 해결해야 할 과제 중 하나가 된 것 같아 속상했다.


“니네 누나와의 약속은 시간을 변경하면서까지 지키면서 내가 하고 싶어하는 것은 절대로, 절대로 안 되는거잖아, 넌. 난 달랐을 거야. 그래서 내가 어리석은 거지만. 나는 우리 언니와 언니의 남자친구랑 저녁 먹는 것쯤은 미련없이 취소해버리고 너에게로 달려 갔을테지. 그런 내가 못나고 어리석다고 해도 나는 앞으로도 그럴거야. 이런 나는 변하지 않을 거라고.”


나는 평소엔 하지 말아야 할 말들까지 재잘재잘 잘도 쏟아내면서도 화가 나면 입을 닫아버리는 성격이다. 

더 좋은 사람이 돼주고 싶다가도 한 없이 못되게 구는 나의 모습이 어떤 때는 나조차 이해가 안 갈 때가 있다. 분명 그도 그런 나를 이해 못할 테고 이렇게 떼쓰는 내가 마음에 들지 않을 것이다. 생일 축하한다는 말 못해줘서 너무 미안하다. 많이 미안해하고 있다는 거, 내가 말 안 해도 알고 있을 거라고 믿고 싶은데 그건 너무 큰 바람이겠지? 오늘…그 누구보다 더 기쁘게 축하 해주고 싶었다는 거, 그것만이라도 알아준다면 좋을텐데…

 


10월 1일 사태, 전개


그에게 화를 내고 집으로 향하는 동안 이정하의 시가 머리 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대 어디서 오고 있는가.
어디서 오기에 이토록 오래 걸리는가.
어리석고 어리석은 게 사랑이다.
오는 길만 제대로 알려줬더라면
이렇게 서로 안타까워하지 않아도 되는 것을.
그대 어디서 오고 있는가.
오는 길을 모르기에 마중을 나갈 수 없다.

-이정하 (기다림 혹은 절망수첩 중에서)

 

집으로 가는 길 내내 눈물이 났다. 

E&H,  눈먼곰을 만나면서도 그가 언제 오는지 시계만 봤는데..

그는 자꾸만 늦어지고, 그럴수록 나는 점점 더 화가 났다. 


하지만 그래도 그렇게 화를 내며 집으로 돌아온 건 명백한 내 잘못이다. 

그날 바로 미안하다고 말 했었어야 했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다. 친구들은 모두 그가 나한테 잘하는 거라고, 무슨 일이건 무조건 내가 잘못했다고 할 정도로 녀석의 편이다. 

그렇다면 내가 문젠걸까? 


누가 뭐라든 나는 그가 나를 좀 더 이해하는 공부를 했으면 좋겠다. 

다음 학기에는 생물학이나 통계학 말고 <말괄량이 제니퍼 길들이기>, <천방지축 사랑스런 제니퍼, 대체 그녀가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것도 과목도 좀 수강하고. 


지금 상황대로라면 이번 학기 그는 세 과목 모두 재수강해야 한다. 



P. S 저 당시엔 미처 알지 못했다. 

나도 그를 위한 공부를 더 해야했다는 사실을. 

나는 그를 알기 위한 과목을 하나도 수강하지 않고 그만 나를 알아주기를 바랐다. 


 


10월 1일 사태, 결말


사랑하는 그대.

지나간 그대 생일에 속상하게 해서 미안해요.

사랑하는 사이라도 서로에게 큰 상처를 줄 수 있다는 거 잘 알아요,

이번일 그대가 너그럽게 이해해준다면 못된 너구리양도 좀 더 인내할 줄 아는 예쁜 여자친구가 되어줄게요.

“앞으로 절대 그런 일 없을거야”, 라고 솔직히 장담은 못 하겠지만 적어도 앞으로 그대 생일엔 무조건 당신에게 충성 할께요, 그대는 저의 맞고참님 이시니까요"

 


[그 남자, 그 여자]


사랑을 한다는 건 귀찮고 힘든 일의 연속인 것 같다. 

서로의 일에 적당히 참견도 해줘야 하고, 괜히 아무 일도 아닌 일로 속상해하기도 해야 하고,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느라 애태워야 하고. 


사랑을 하는 동안에는 마음이 온유해 져야 한다고들 하는데 (성경에서)

나는 오히려 악마가 되어버리는 것 같다. 


공연히 트집을 잡고 공연히 화를 내는 이유도 아마 그에게 점점 더 기대하는 것이 많아졌다. 

그를 사랑할수록 점점 더 나는 왜 그에게 화가 나는걸까.


 

[못된 너구리 되는 방법에 관하여]


힘들어 죽겠다는 다람쥐에게

남들도 다 그런 힘든 시간 보냈으니 견뎌, 라고 냉정하게 말하기

따뜻한 위로가 필요하다는 다람쥐에게

위로라는 거 낯간지럽고 부끄러워서 못하겠어,라거나 누울 자리 보고 발 뻗으란 속담운운하며 김 빼놓기

해도 해도 줄어들지 않는 학과 공부로 지친 다람쥐에게

그럼 차라리 전과를 하거나 전학 가는 건 어떻겠니,

라고 말도 안 되는 충고해주기

책상 위 산적한 보고서와 빡빡한 기말고사 일정으로

오늘 데이트는 학교 근처에서 하자고 부탁에 가까운 제안을 하는 다람쥐에게

보고 싶으면 니가 우리집 쪽으로 오면 되잖아, 라고 버팅기기

마음에 없는 말 하기, 좋으면서도 귀찮은 척 하기,

목소리 들으면 반가워도 전화로 속 긁기 등 또한 

못된 너구리로 향하는 지름길~


 

실전 대사를 통해 알아 본 여중생과 대학생의 언행 패턴에 관한 연구

 

<사례 1>

이모 여중생: 있잖아요 오빠, 사랑은 끊임없이 참고 이해하는 거래요

최모 공대생: 그걸…… 아는 사람이……… 그래?

 

<사례 2>

이모 여중생: 오빠, 사람들 많은 곳에서 사랑한다고 외치고 뽀뽀해주세요.

최모 공대생: 전화 끊을께! (뚜…뚜…뚜)

 

<사례 3>

이모 여중생: 오빠, 방금 버스에서 내렸는데 졸리고 추워요, 그냥 집에 가도 되면 갈까 하는데. (‘그래도 오빠가 보고 싶다고 하면 바로 달려가야지!’)

최모 공대생: 그려 그럼 집에 가서 푹 쉬어!

이모 여중생: (‘헐, 내가 안 보고 싶은 게 틀림없어!’) 네 그럴께요.

다음에 뵈요. 오빠!

 

<사례 4>

이모 여중생: 오빠, 제 친구들이 오빠 보여 달라구 난리에요, 저는 제 친구들도 오빠를 좋아해줬으면 좋겠어요. 분명 그럴꺼에요! 그럼 우리 이번 주에 볼까요?

최모 공대생: 너는 항상 니 마음대로 약속을 정하는구나. 나는 니 친구들 보는 거 아직은 부담스러워, 차라리 단 둘이 여행을 가자!

 

<사례 5>

최모 공대생: 학교 끝났어?

이모 여중생: (‘헉! 오빠가 학교앞에 왔나보다’) 네! 지금 막! (완전 기대)

최모 공대생: 집에 잘 들어가 조심히!

이모 여중생: -_-a

 


 

[새벽 1시 40분, 키노 극장]


‘잠자는 공대생을 깨우지 말라, 그들은 항상 피곤하다’라는 말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가 보고 싶다며 그를 졸라 <잠실새내>로 와 달라고 억지를 부렸다. 

보고싶어 죽겠다는 나의 끈질긴(?) 요구에 그는 피곤한 몸을 이끌고 와주었다.

키노 극장 앞에 앉아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그를 보자마자 뛰어갔다.

과제로 바쁘다고 여기까지 와줄 양반이 아닌데, 그가 왔다. 


 

[크리스마스 이브 D-4]

어제 대학로에서 <미친 키스>라는 연극을 본 후, 그와 함께 집으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마침내 301번 버스가 도착했고, 내가 버스에 오르자마자 그는 지하철역 방향으로 걸어갔다.

 내 기억 속의 그는, 버스에 탄 걸 확인한 후 손까지 흔들어주고서야 제 갈 길을 가던 녀석이었는데

어젠 막차 시간이 임박해서 그랬을 거라고 이해할 수도 있지만, 

서운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요즘 그는 예전보다 훨씬 더 해야 할 일들이 많아졌다. 

그래서 시간 활용도 여유롭지 못하고 잠도 늘 부족해서 피곤한 눈치다. 

그나마 일요일이 유일하게 쉬는 날인데 주말엔 또 내가 가만히 두지 않는다. 


숙제로 낑낑대는 그에게 새로 산 침대 조립을 도와달라거나 쇼핑을 가자며 일주일에 단 하루뿐인 그의 귀중한 휴일을 빼앗는다. 쉬게해주기는커녕 늘 그에게 부담만 주는 것 같다. 나는 단지 그가 보고 싶은 건데, 내가 보고 싶을 때마다 그를 보는 건 지금 그의 상황으론 너무나 큰 무리처럼 여겨진다.


그는 내게 예쁘게 말하는 법을 가르쳐 준 남자였고, 나를 배려해주고 따뜻하게 안아준 사람이었다. 

그래서 더 소중한 그 녀석....을 사랑하면서도 그녀석이 원하는 게 아니라 내가 원하는대로만 하는 것 같아 미안한 생각이 든다. 이성적으로는 미안한데, 감성적으로는 화가나는 나날들이 이어지고 있다.


그에게 못된 행동만 골라 하고, 마음 넓게 이해해주지 못하는 날 볼 때마다 차라리 그를 사랑하지 않았으면 어땠을까 하는 쓸데없는 생각도 한다. 



 


[한결 같은 다람쥐와 변덕스러운 너구리]

컴퓨터가 많이 모여 있는 방 (일명 PC방), 원더걸즈류의 소녀떼

갓 구운 플레인 베이글과 필라델피아 크림 치즈, 그리고 비가 오는 날의 가로등.

다람쥐군이 좋아하는 건 한결 같아서 변덕쟁이인 너구리에겐 그 모든 것들이 너무 신기해 보였습니다.


" 네가 왜 좋은지 그때 물었었지? 

음.....그땐 잘 몰랐는데 내가 너를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는 말해줄 수 있을 것 같아. 

나는 너의 한결같음, 스테이블한 마음을 동경했었던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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