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려 / 강원석
배려
- 강원석
바람도
때로는 갈대를 피해서 분다
빗물도
가끔은 나뭇잎을 적시지 않는다
달빛도
한 번쯤 별빛에게 밤을 양보한다
오늘은
꽃잎을 바라보는 그 눈길도
잠시 거둔다면 좋겠지
마냥 아름다울 수는 없으니
살면서 한 번쯤 누군가의 진한 배려를 경험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부모님, 친구, 선생님, 길에서 마주친 이들. 만일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사람이 베푼 배려라면 어떤 느낌일까?
지인의 배려가 아닌 낯선 이의 따스함을 느낀 경험이 있다. 속초에는 ‘설악산 자생식물원’이라는 생태공원이 있다. 시에서 운영하는 무료 식물원으로 다양한 종류의 꽃과 나무, 아름다운 정원을 감상할 수 있는 곳이다. 울산바위와 웅장한 설악산의 능선을 바라보며 산책할 수 있어 ‘속초의 숨겨진 관광 명소’라고 불리기도 한다.
동시에 ‘설악산 자생식물원’은 이곳을 찾는 관광객들이 설악산과 동해 바다를 먼저 둘러보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외지인들의 발길이 덜한 곳이기도 하다. 덕분에 사시사철 언제 가도 한적하고 여유롭게 공원을 즐기며 거닐 수 있었다.
크게 식물원을 한 바퀴 돌다 보면 숲 속 산책로, 명상의 길, 때죽나무 숲 등 테마 별로 가꾸어진 공간을 마주하게 되는데, 종종 보수가 필요한 부분들이 눈에 들어오기도 했다. 식물원 뒤쪽으로 난 울창한 숲길을 걸을 때면 여기저기 움푹 팬 물웅덩이를 지나야 했기 때문에 깨금발을 들고 바짓단이 닿지 않도록 조심히 건너곤 했었다. 갖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신발은 더러워지는 것을 피하기는 어려웠다.
그러던 어느 날 누군가 어디에서 구했는지 넓적한 나무판자를 깔아 놓은 것을 보았다. 두툼하고 튼튼한 통나무 덕분에 남녀노소 편히 웅덩이를 지날 수 있게 된 것이다. 조금 더 가면 멋들어지게 조성해 놓은 빨간 아치형 철골 다리도 있지만 지금 막 밟고 지나온 누군가의 배려가 더 마음이 깊이 와닿은 날이었다. 그 후로는 식물원 구석구석을 다 둘러보아도 진흙과 젖은 낙엽 대신 아름다운 꽃, 나무들만 마음 가득 담아 올 수 있었다.
모르는 이가 베푼 배려를 느낀 경험은 또 있었다. 몇 년 전 봉사활동의 일환으로 찾게 ‘사랑의 선교회’는 마더 테레사 수녀가 세운 시설로,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의 벗이 되신 성녀의 가르침을 본받아 전 세계로 퍼져나간 수사회이다. 서울에는 한성대입구역 근처에 자리하고 있는데, 거동이 불편하거나 정신적으로 힘들어 보살핌이 필요한 형제님들과 인도 수사님 두 분 그리고 한국인 신부님들이 생활하고 계셨다. 성당에서 청년 활동을 하며 가게 된 곳인데, 단체 활동이 끝난 이후에도 개인적으로 계속 인연을 이어가고 있었다.
내가 돌보는 아저씨들은 요셉아저씨와 프란치스코 아저씨였다. 두 분은 사고로 목 아래로 신경이 마비되었고, 30년이 넘게 침대에서만 생활하고 계셨습니다. 처음에는 낯선 공기, 생경한 풍경에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당황스러웠지만 차차 그분들이 필요한 일을 찾아서 할 수 있었다. 설거지, 빨래, 청소 같은 노력 봉사부터 요셉 아저씨의 딱딱하게 굳은 손톱을 깎는 일, 귀 청소, 연고 바르기, 밥을 먹이고 이빨을 닦아 드는 일 등 할 수 있는 일이 아주 많았다. 무엇보다 세상을 경험하지 못해 답답한 형제님들께 말벗을 해드리는 일에 가장 많은 보람을 느꼈다. 사람이 그리운 아저씨들은 제 할 일을 다 하고, 충분히 함께 시간을 보낸 후 일어서도 봉사자들을 필사적으로 붙잡으셨다. 그분들의 마음을 헤아려야 하지만
“또 언제 올 거냐. 다음 주에도 오면 안 되냐.”
귀여운 투정을 부리는 아저씨들을 놓고 돌아서야 하는 마음은 매번 편치가 않았다.
그날도 무거운 마음으로 수사회 현관을 나와 섰다. 내가 벗어두고 간 신발이 가지런히 돌려져 있었다. 바로 신고 나가기 편하도록 정갈하게 돌아앉은 모습이었다. 전에도 수사회를 찾을 때면 한두 번 이런 일이 있었지만 모두 우연이라고 생각했다. 아니 어쩌면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는 것이 더 맞는 표현일 것이다. 같은 일이 여러 번 반복된 후 저는 비로소 깨달았다. 수도원을 찾는 사람들, 봉사자들을 위한 누군가의 작은 배려라는 것을. 그것이 신부님들이 하신 일이든, 신체적인 불편함이 있어도 마음만은 누구보다 따뜻한 형제님들이 하신 것이든 정말 감사하고 감동적인 순간이었다.
그래서 나도 다른 누군가를 위한 배려를 실천해보고 싶었다.
땅속에서 7년을 살다가 보름을 울고 죽는 매미가 있다. 내 방 방충망에 붙어 하루 종일 목청을 높여도 날려 보내지 않고 들어주는 일. 꼬불낭 꼬불낭 거리는 매미의 허리동이를 감상하며 그저 아름다운 노랫소리인양 감상하고, 처절한 생애를 반추해 보는 일. 그가 어떻게 세상에 왔다 가는지 한 번이라도 떠올려 본다면 함부로 잡아 죽이거나 재미 삼아 날개를 떼는 일 따위는 없을 것이다.
성당에서 초를 켜고 기도할 때 나와 내 가족, 사랑하는 사람들 외에도 주님의 돌봄이 필요한 가정을 위해 초 하나를 더 봉헌하는 일도 잊지 않고 있다.
애정하는 모교의 강의실, 영랑호의 습지, 속초 바다를 둘러싼 송림을 걷다 쓰레기를 줍기도 하고, 주인 없이 길 위를 떠도는 개와 고양이들을 위해 사료와 간식을 차에 싣고 다니며 먹이를 주기도 한다. 나를 기억하고 따르지는 않는 것이 아쉬울 때도 있지만 그래도 한겨울 도로에서 보낼 녀석들을 생각하면 어떻게 해야 편하게 많이 먹일 수 있을까를 고민하게 된다.
세상이 아름다운 것은 인간의 욕망이 다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내가 원하는 바를 다 이룰 수는 없지만 누군가의 하루, 아니 누군가의 ‘한 순간’이 기쁨으로 빛나게 할 수 있다면 충분히 가치 있는 삶일 것이다. 나의 가족, 사랑하는 지인 그리고 잘 알지 못하는 이들과 말 못 하는 동물들에게 내가 베푼 사랑이 작은 힘이 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따뜻한 배려가 널리 퍼져 온 세상 구석구석을 환하게 비추는 날이 오기를 희망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