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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냐고 물으신다면

흔들리며 피는 꽃 / 도종환

by 윤슬log


흔들리며 피는 꽃
-도종환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며 피었나니
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 어디 있으랴

젖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빛나는 꽃들도
다 젖으며 젖으며 피었나니
바람과 비에 젖으며 꽃잎 따뜻하게 피웠나니
젖지 않고 가는 삶이 어디 있으랴




"그래서 지금은 괜찮으세요?"

이 말 앞에서 나는 항상 우두커니가 된다.

이십 대 초 유방암을 겪을 후 몇 차례의 재발이 있었다. '재발'이라는 말은 암환자들에게 흡사 사형선고처럼 느껴지곤 해 마음 졸이던 순간도 있었지만, 불행 중 다행을 헤아리며 살아온 숱한 세월 덕분에 암이 퍼지지 않았음에 감사하고, 치료받을 수 있음에 안도하며 지난날을 보냈다.

하지만 막상 폐암이라는 2차 암을 마주했을 때에는 '불행 중 다행' 요법도, '다 지나간다'는 주문도 소용없었다. 흉강경 수술 이후 조금만 걸어도 숨이 찼고, 좋아하는 노래도 두 소절 이상 부를 수가 없었다.

"귀뚜라미가 또르르 우는 달밤에"

로 시작하는 동요가 있는데, 호흡이 딸려

"귀뚜~"

까지밖에 못 부르고 이내 시무룩해졌다.

"엄마, 나 이제 귀뚜~까지밖에 못 불러. 어떡하지? 이게 회복이 되려나?"

옆에서 운전을 하던 엄마에게 쫑알쫑알 서러움을 토해내고는 조금 더 목청을 가다듬고 "귀뚜~"를 열창했다.


슬펐지만 부지런히 산을 오르고 재활을 하며 건강을 회복했다. 내 나이 이제 막 서른을 넘길 때였다. 젊을 때 이렇게 자주, 많이 아픈 건 반칙 같았다. 그래도 회복속도가 빠르다는 장점 하나는 있었다. 내 이름은 '오뚝이'가 아닌데 넘어지면 일어나고 흔들리면 바닥을 치고 올라와 제자리를 찾는 시간들한동안 계속되었다.

많이 내려놨고 충분히 겸손해졌으며 좋은 일 많이 하면서 열심히 살았는데, 이쯤 했으면 그만할 때도 됐는데, 해도 해도 너무 하다 싶을 땐

'나는 아프려고 태어난 건가?'

하는 생각에 풀이 죽었다. 병에 관련된 생각들이 몰두하게 될 때면 한없이 침잠하게 되어 최대한 담담하고 산뜻하게 생각하려고 하지만, 나도 사람인지라 마음이 오락가락했다.




지금은 마지막 수술과 치료를 끝낸 지 3년이 되었다. 언제 다시 아플 수도 있지만 아프지 않을 수 있다. 쭉 건강할 수도 있다. 한 치 앞을 모르는 게 인생이고, 사람 일이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법이기에 별생각 없이 산다. 병원 검진일이 다가오거나 몸에 이상신호가 지속되면 건강 염려증이 발동하긴 하지만 그래도 대부분의 날들은 평화롭게 살려고 노력 중이다.

잦은 병치례를 경험하며 달라진 점이 몇 가지 있는데 그중 한 가지는 주변 사람들의 투병 소식이나 힘들어하는 이들을 쉽사리 지나치지 못한다는 점이다. 지인의 지인이나 일면식이 없는 사람도, TV나 SNS를 통해 알게 된 누군가여도 격려와 응원의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다.

오래전 내가 첫 항암치료를 막 마쳤을 때 한 신문기사를 보게 되었다. 백혈병을 앓는 환아를 위해 성금을 모은다는 기사였다. 독한 치료로 얼굴이 거뭇하고 머리카락은 없었지만 누구보다 환하게 미소로 웃고 있는 아이의 사진이 보였다. 용돈을 조금 쪼개 후원금으로 보냈다. 하지만 얼마 후 소년이 하늘의 별이 되었다는 소식을 접했고 착잡한 마음으로 성당에 미사를 올렸다. 지금도 직접 알지 못하는 사람이어도 가슴 아픈 일로 하늘로 떠났다는 걸 알게 되면 미사를 올린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그것뿐이라 미안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세상을 떠난 이의 영혼과 남겨진 가족들을 위해 기도를 드리고 나면 하늘빛이 조금 더 맑아 보이는 느낌이었다.




KBS '동행'이라는 프로그램에 나왔던 소아암 환우에게는 소정의 성금과 함께 긴 편지를 동봉했다. 이제 막 초등학생이 되어 학교에 가야 하는데, 머리도 없고 매일 마스크를 끼고 생활해야 하는 게 속상하고 부끄럽다는 아이의 투정을 보고 마음이 쓰여서였다.


'누나도 너처럼 수술을 하고, 항암 치료를 했는데 아픈 건 결코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고. 죄가 많아서도 아니고 우리가 잘못을 저질러서 벌을 받는 것도 아니라고. 지금처럼 씩씩하게 치료 잘 받고 다 나으면 얼마든지 친구들이랑 뛰어놀고, 마음껏 공부할 수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나는 어쩌면 나에게 하고 싶은 말을 글로 적었는지 모른다. 암으로 투병하면서 힘들 때마다 내가 붙잡았던 건 유년시절 즐거웠던 추억이었다. 푸르던 시절을 지나 원하던 대학에 입학을 해서 치료만 마치면 돌아갈 곳이 있다는 사실도 큰 위로가 되었다. 아픈 모습으로 친구들이 운동장에서 뛰어노는 걸 물끄러미 바라보는 아이의 모습에 나는 부모처럼 속이 상했다.


'많은 일을 해낼 수 있는 건강을 구했는데, 보다 가치 있는 일을 하라고 병을 주셨습니다.'

라는 문구가 담긴 성 프란치스코의 기도문도 함께 적어 보냈다. 몇 주 후 아이에게 후원된 내역을 소개하는 후속 취재에 내가 보낸 글을 보며 큰 위로가 되었다는 어머님과 소년의 모습이 장면으로 나왔다. 직접 만나 온기를 나누지는 않았지만, 내가 아파봤기 때문에 지금 몸이 아픈 누군가가 있다면 마음이라도 덜 아플 수 있게 돕고 싶었다.




애석하게도 모든 이들에게 완벽한 희망을 줄 수는 없었다.


한번 방문하고 좋았던 카페나 인상 깊은 장소들은 SNS를 통해 소식을 받고 있다.

속초의 한 카페도 그런 곳이었다. 몇 년 전 이곳 사장님이 유방암 치료를 앞두고 있다는 글이 올라왔다. 응원의 댓글도 달고 "할 수 있다. 으쌰으쌰!"를 함께 외쳤지만, 부쩍 줄어든 영업일 때문에 걱정을 하고 있던 차에 다른 종류의 암으로 다시 투병하게 되었다는 글을 보았다. 차분하게 써 내려간 글이었지만 이분의 마음이 어떨지를 생각하니 먹먹했다. 마침 그 주 주말은 생일 기념으로 속초에 가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나는 부랴부랴 집에 있는 카드 더미에서 가장 밝고, 최고로 희망적이어 보이는 엽서를 찾아 글을 써 내려갔다.


'나는 누구고, 이 카페를 아끼고 사랑했던 사람 중 한 명이라고. 지금은 속초에 살지는 않지만 남편과 함께 꾸준히 이곳을 찾아왔었다. 어릴 때 이런 병으로 여러 번 치료하고, 또 다른 암이 생겨 고생했지만 그래도 이렇게 잘 살아있다고. 나 같은 사람도 있으니 사장님도 할 수 있다고. 우리 다시 건강하게 회복해서 서로가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자고. 밝은 모습으로 다시 돌아오실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마지막에는 '기도 중에 기억하겠다는 말도' 빼먹지 않고 덧붙였다.

속초에서 가장 좋아하는 독립 서점인 <동아서점>에 들러 그분께 드릴 책도 골랐다. 투병을 앞두고 있거나 투병 중인 분들에게는 가볍게 읽기 좋은 시집이나 그림책을 주로 선물하곤 했다. 보라색 표지가 멋스러운 이원하 시인의 <제주에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라는 제목의 책을 골랐다. 병과는 1도 상관이 없는 책이었다. 희망의 메시지로 가득한 도서도 아니었다. 때로는 내가 환자라는 사실을 잊고 싶은 날이 있는데, 럴 때 보면 좋은 책이었다. 행여 구겨질세라 책 사이에 카드를 곱게 끼어 카페로 향했다. 그리고 가게 앞에서 길고양이 먹이를 주고 계신 사장님을 만났다.


나와 남편은 조심스럽게 인사를 건네고 내 소개를 했다. 다행히 사장님은 우리를 기억하고 계셨다.

"가끔 여기 오시잖아요."

그 한마디가 그렇게 반가웠다. 나는 그녀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를 전했고 별건 아니지만 작은 선물도 건넸다. 투병을 하다 보면 힘내라는 말은 많이 듣게 된다. 격려와 응원의 말, 기도와 따뜻하게 안부를 물어주는 이들도 정말 감사하다. 또 하나 강력한 치유제가 있다면 나보다 먼저 비슷한 길을 간 사람이 건강하게 살아있다는 사실이다. 완치가 되었거나 성공적인 사회 복귀까지 이루어졌다면 더없이 좋으리라.

어느새 사장님과 나는 두 손을 꼭 마주 잡고, 길가에 서서 한참을 이야기했다. 헤어질 때는 "한번 안아 드려도 되냐"며 수줍게 허그도 하고 돌아왔다.




사실 처음 사장님의 유방암 투병 소식을 알고, 카페를 나오며 이야기를 건넨 적이 있었다.

"그래서 지금은 괜찮으신 거죠? 다 완치되신 거예요?"

동그란 눈으로 희망에 차 묻는 그녀의 질문에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럼요. 지금 깨끗하게 다 완치됐어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너무나도.

애석하게도 나는 거짓말에 재능이 없었다.

"아... 그 후로 몇 번 더 치료하긴 했는데, 지... 지금은 그냥 정기검진만 하고 있어요. 아하하하."

멋쩍은 웃음으로 어색해진 공기를 서둘러 무마했다.


'잘할 수 있다고. 항암 치료 물론 힘들긴 지만 막 못 버틸 정도는 아니라고'

이야기해 주고 싶었는데 가장 중요한

'그래서 지금은? 완치가 되신 거죠?'

라는 물음 앞에서 나는 항상 벙어리가 되었다. 그냥 가만히 있을걸. 나 때문에 그녀가 더 심란하지만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완벽한 희망을 말할 수 없음이 아쉽긴 하지만 항상 투병 중인 분들이나 암을 경험하신 분들과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묘하고 끈끈한 유대관계가 생기는 것이 사실이었다.


물론 어디까지나 나의 이야기다. 어떤 사람은 '병'에 대해 누군가 알은체 하는 것이 부담이 될 수도 있다. 나의 병력을 공개하며 오지라퍼가 되면서까지 응원해주고 싶은 마음뿐이었는데, 비슷한 상황을 몇 번 겪다 보니 단발성 격려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가 끝까지 이 병을 잘 이겨내 완치가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지금은요? 지금은 괜찮으세요?"

라는 물음에 당당히 대답할 수 있도록. 어떤 격려의 말이나 짧은 응원 메시지보다 더 큰 힘을 줄 수 있도록. 장 강력한 희망이 되도록 말이다.




도종환 시인의 <흔들리며 피는 꽃>이라는 시와 같이 우리는 흔들리며 살고 있다. 때로는 흠뻑 젖은 채로 허송세월 해야 하는 순간도 찾아온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은 하나도 없으며 젖지 않고 피어나는 식물도 없다.


아마도 내가 뿌리내린 자리는 고산 툰드라 지방인가 보다. 세찬 바람이 끊임없이 불고 얼어붙은 대지에 공기는 건조하기만 하다. 하지만 이런 환경 속에서도 잘 자라는 식물들이 있다. 열악한 조건들을 이겨내고 꽃을 피우기 위해 자기만의 방식으로 생존 방식을 개발해 온 생물들이다. 난쟁이 패랭이꽃, 괭이눈이, 두메양귀비, 산매발톱꽃, 담자리참꽃나무 등은 키가 작고 위로 자라는 대신 옆으로 퍼져나가 지열을 최대한 이용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나는 양귀비를 좋아하니 두메양귀비 정도 되려나.


남보다 많이 흔들리는 삶이었다. 거세게 불어오는 바람이 몸을 제대로 가눌 수 없었던 적도 많았다. 비가 조금 덜 온다고 살만한 것도 아니었다.

누군가의 "이제는 괜찮냐는" 물음에 "진짜 괜찮다."라고 답하고 싶다.

'희망의 아이콘'이 되고 싶은 욕심은 없지만 나도 진짜 괜찮고, 듣는 사람도 정말 괜찮을 수 있도록.


그리하여 우리 마음에 오롯한 안심과 평온만이 깃들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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