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전하지 못한 말

산산조각 / 정호승

by 윤슬log


산산조각
- 정호승

룸비니에서 사 온 흙으로 만든 부처님이
마룻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이 났다

팔은 팔대로 다리는 다리대로
목은 목대로 발가락은 발가락대로
산산조각이 나
얼른 허리를 굽히고
무릎을 꿇고
서랍 속에 넣어두었던
순간접착제를 꺼내 붙였다

그때 늘 부서지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불쌍한 내 머리를
다정히 쓰다듬어주시면서
부처님이 말씀하셨다

산산조각이 나면
산산조각을 얻을 수 있지
산산조각이 나면
산산조각으로 살아갈 수 있지



'삶이 유한하다'는 사실이 불현듯 파고드는 순간이 있다.


H님은 유방암 카페에서 알게 된 분이었다. 검사 결과와 관련해 카페에 질문글을 남겨두었는데, 댓글을 주고받다 보니 친분을 쌓게 되었다. 동갑에 우리 둘 다 블로그를 하고 있어서 SNS를 통해 금방 가까워졌던 것 같다. 당시 나는 좋은 책이나 문장들을 발췌해 개인 블로그에 올려두었는데, 주로 투병 기간 동안 읽었던 '시련을 지나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들이었다. H님 역시 비슷한 책들을 찾아 읽고 있어 서로에게 책 추천도 해주며 온라인상의 좋은 지인이 되었다.


지금은 환우 모임에 대한 부담감이 없지만 한동안 나는 알고 지내던 이들이 하나, 둘 하늘로 떠날 때마다 일렁이는 마음의 파도를 넘어야만 했다. 아마 파릇한 나이 때문에 더 그랬는지도. '죽음'에 대해서는 한 순간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이제 막 '청춘'을 맞이했을 뿐, 죽음은 그저 남의 나라 먼 일이었다. 스무고개를 넘기자마자 암환자가 될 거라는 것도 몰랐지만, 암으로 인해 내가 죽을 수 있다는 것과 내 주변 사람이 같은 병으로 세상을 떠날 수도 있음은 꿈에서도 본 적 없는 이야기였다.

또래의 많은 사람들이 걸어가지 않는 길을 함께 걷고 있다는 점에서 환우들과의 만남은 큰 위로가 되었다. 하지만 마음을 나누던 이들의 비보를 들을 때면 그녀의 말갛고 앳된 얼굴들이 어김없이 눈물방울로 맺다. 차례 그런 일이 반복된 이후에는 한동안 환우 모임도, 병과 관련된 정보를 나누는 인터넷 카페도 모두 멀리하기도 했었다.

그러다 H님을 알게 되었다. 그녀는 유방암 수술 후 2년 만에 재발이 되어 다시 치료를 하고 있고 했다. 다른 장기로의 전이가 있었는데 항암제 내성 때문에 병원도 옮겨보고, 임상시험에도 참여하는 등 적극적으로 투병을 하고 있었다.


그녀의 블로그에는 남편과 어린 아들의 모습이 담긴 사진이 종종 올라왔다. 아주 단란하고 따뜻해 보이는 가족이었다.

시간이 흐르고 홈페이지에 올라오던 소식이 드문 드문 멀어졌. 건강식과 요리, 맛집이나 책 같은 주제에서 슬픈 마음을 털어놓는 글들이 부쩍 눈에 띄어 마음이 쓰이기도 했다. 댓글로 안부를 묻고 걱정스러운 마음을 전했지만 돌아오는 이야기는 늘 "더 안 좋아졌다."는 대답뿐이었다. 한동안은 일본으로 치료를 다니고 있다고 했었다. 그곳에서라도, 치료비가 얼마더라도 제발 차도가 있으면 좋겠다고 두 손을 모았다.


지리한 장마가 이어지던 어느 여름. 블로그에 이웃의 댓글이 달렸다는 알림에 들어가 보니 H님이 남긴 글이었다. 그녀는 다정히 나의 안부를 묻고는, 아이를 할머니댁에 보냈다고 했다. 자신이 떠나면 아이가 엄마 없는 생활에 적응해야 하기 때문에 할머니와 있는 시간을 늘리는 연습을 하고 있다고 하면서. 아이가 없는 나도, 결혼을 하지 않았던 나도 그녀의 야기에 마음이 러웠다. 사랑하는 아이와 남편을 남겨두고 어떤 마음으로 삶을 정리 중인지 그 심정을 미처 다 헤아릴 수가 없었다.

"끝까지 용기 잃지 말아야 한다고. 기도하고 있다고."

이런 말 밖에수가 없는 내가 싫었다.




산란한 마음은 이따금 책이나 기도, 명상으로도 종잡을 수가 없다. 그럴 땐 그냥 분주한 심상들이 흘러가길 기다려야 한다. 아무 노력도 하지 않는 것이, 애쓰지 않는 것이 때로는 최선일 수 있다.


무거운 대화가 오가기 전 우리는 서로의 번호를 교환했었다.

"속초에 오면 연락 달라고."

"서울에 오면 한번 얼굴 보자고."

이야기하면서 댓글로 서로의 이름과 연락처를 주고받았다. 그녀의 번호를 저장하고 실시간 메신저에 뜬 프로필 사진에는 유모차를 밀고 있는 작고 가냘픈 여인의 뒷모습이 보였다. '암'과의 사투는 이렇게 여리여리한 그녀가 짊어지기에는 너무 가혹한 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지된 사진 속 화면을 나는 한참 동안 멍하니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얼마 뒤 <산산조각>이라는 시가 그녀의 블로그에 올라왔다.

"산산조각이 나면 산산조각을 얻을 수 있지.

산산조각이 나면 산산조각으로 살아갈 수 있지."

라고 끝나는 시 함께

"산산조각 난 삶도 삶이지... 산산조각이 난 채로 살아가는 나날들도 생각만큼 나쁘지 않아. 혼자 며칠 째 되뇌며 위로받는 시. 깨어진 제 삶을 회복시키시고..."

라는 글 쓰여 있었다.


'산산조각이 난 삶'

그녀는 어떤 시간들을 보내고 있었던 걸까. 산산이 부서져버린 조각들을 붙잡고도 끝까지 살아가려 했던 나의 벗 H님.


<산산조각>이라는 시 이후 그녀의 블로그는 여전히 2020년에 머물러있다. 산소포화도가 너무 떨어져 응급실에 간다는 글이 마지막이었다. 글 아래 댓글로 안부를 물었지만 아직 답장이 없다. 몇 달이 지나고 몇 년이 흘렀지만 갈 곳 잃은 내 질문만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마음이 시렸다.

카카오톡 프로필 속에 있는 그녀의 모습은 여전히 유모차를 밀고 어디론가 고 있었다. 오랫동안 망설이다 용기를 마저 내지 못했다. 누구보다 그녀가 건강하게 살아있길 바라는 나의 바람이 산산조각 날까 봐. 그런데 그것이 호기심을 빙자한 이기심일까 봐. 정말 힘든 사람에게 그 질문조차 실례가 될까 봐... 무수한 생각들에 나를 에워쌌다.




멈춰버린 그녀의 블로그 화면을 바라보고 있으면 H님에게 전하지 못한 말들이 차오른다. 속초에서 전업 치병 생활을 했을 때에 비해 지금은 몸도 마음도 조금은 여유가 생겨 이제 정말 그녀를 만나러 갈 수 있는데. 무 멀리 가지만 않았더라면 내가 가면 될 텐데. 기다리는 대답은 기약이 없다.


지금 이 순간 어딘가에서라도 그녀가 잘 지내고 있었으면 좋겠다. 시 산산조각 났던 몸과 산산조각 났던 인생을 메우고 기워가며 악착같이 붙들고 있었으면 좋겠다. 뭇잎처럼 여리고 고운 손을 잡고 한 번은 말해주고 싶었다.

"많은 것을 잃었으니 이제 얻을 것만 남았다고. 다 비우고 전부 내려놓았으니 쌓아 올릴 일만 남은 거라고. 지금까지 버텨온 사력으로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무엇보다 당신의 인생은 한 조각 파편으로 설명될 수 없다고."


부질없는 말들은 내 속에서 아우성치다 한숨처럼 흩어진다. 사는 게 허무한 순간이다. 신은 정말 있는 걸까.

keyword
이전 18화괜찮냐고 물으신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