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에게 꽃이다 / 강원석
너에게 꽃이다
- 강원석
마음을 접고 접어
꽃 한 송이 만들고
사랑을 품고 품어
향기 한 줌 모으고
두 손에 가득 담아
너에게 주느니
꽃처럼 피고
꽃처럼 웃어라
세상은 온통
너에게 꽃이다
꽃을 든 사람은 아름답다. 곧 누군가의 품에 안길 한 다발의 꽃을 보고 있노라면 내 볼도 덩달아 발그레 해지는 느낌이다. 아무리 값진 선물로도 마음을 전하기 부족할 때. 반대로 주머니 사정이 여의치 않을 때에도 꽃 한 송이의 선물은 주고받는 이에게 부담 없는 행복을 선사한다. 나비가 날개를 펼친 듯 상대방의 얼굴에 미소를 띠우는 꽃의 기적. 그날도 마로니에 공원에 앉아 장미 꽃다발을 들고 가는 남자를 보며 즐거운 상상에 빠져 있었다.
약속 시간보다 조금 일찍 도착한 나는 공원 벤치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오가는 사람들이 분주해 보여 눈길 둘 곳이 마땅치 않다고 생각할 즈음 바바리코트를 입은 남자가 이쪽으로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빠른 걸음으로 길을 재촉하던 남자의 손에는 가을 단풍잎보다도 붉은 장미 꽃다발이 들려있었다. 누군가의 생일이거나 연인에게 줄 선물이라고 생각하니 왠지 모르게 사내의 발걸음이 한결 가벼워 보였다. 남자는 곧 공원 한 편의 동상 앞에 멈추더니 꽃다발을 내려놓고 고개를 숙였다. 꽃을 든 남자를 보며 낭만적인 상상에 잠겼던 나의 마음은 금세 호기심으로 바뀌었다. 남자는 진지한 모습으로 잠시 묵념을 하더니 빨간 장미만 남기고 사라져 버렸다.
그가 머물렀던 자리로 가보았다. ‘김상옥 열사의 상’ 일곱 글자가 눈에 다 들어오기도 전에 마음을 울렸다. 대학로라면 학생 때부터 숱하게 왔던 곳이지만 공원 뒤편에 이런 동상이 있다는 것은 미처 몰랐다. 나는 약속 시간이 다 된 것도 까맣게 잊은 채 동상의 이곳저곳을 둘러보았다. 정갈하게 빗어 넘긴 머리. 다부진 눈매와 양복을 잘 차려입은 풍채 좋은 몸까지. 역사책 어딘가에서 본 그 모습 그대로였다. 동상 하단에는 의열단으로 활동하며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하고 순국한 열사의 삶이 기록되어 있었고, 의거를 결심하며 남긴 말도 보였다. 한 평도 채 안 되는 공간을 내가 걸을 수 있는 가장 느린 걸음으로 돌아 다시 정면에 섰다. 잠시 잊고 있던 꽃다발에 눈길이 갔다.
"영원한. 해방된 조국을 위해 고생하셨습니다."
반듯한 정자체로 한 글자 한 글자 눌러쓴 글씨였다. 남자는 어디서부터 이 꽃을 들고 왔을까. 선물을 고르고 포장하고, 열사에게 하고 싶은 말을 준비해 적기까지 이 아름다운 풍경의 시작은 어디였는지 궁금했다. 젊음의 거리답게 활력이 넘치는 대학로에서 가장 외로운 모습으로 서 있었을 동상 앞에서 그렇게 한참을 머물렀다. 당연히 사랑하는 사람에게 갈 것이라 생각했던 장미꽃은 남자가 생각하는 고마운 사람, 소중한 사람, 특별한 사람인 김상옥 열사 앞에 놓였다.
꽃은 본래의 모습만으로도 아름답지만 꽃을 들고 있는 사람은 그보다 더 어여쁘다. 주변의 이목에 신경 쓰지 않고 망설임 없이 헌화를 하고 경의를 표한 그의 마음은 김상옥 열사가 조국 독립을 위해 바친 선혈만큼 붉은 장미와 함께 고이 전해졌으리라.
꽃을 든 사람이 특별하게 느껴진 기억이 하나 더 있다. 십여 년 전 여느 때와 다를 것 없었던 오월 어느 날. 수업을 마치고 건물 밖으로 나오는 나를 붙잡은 건 누군가의 목소리였다. 짧고 굵은 부름에 뒤를 돌아보았을 때 친한 동아리 선배가 장미꽃을 들고 있었다. 웬 꽃이냐며 반색을 하는 내게 그는
"오늘이 성년의 날이라 성인이 된 후배들에게 줄 장미를 샀다." 고 말했다.
정작 당사자인 나는 모르는 채로 오늘을 지나칠 뻔했지만 해가 넘어갈 즈음 알게 된 ‘성년의 날’이라는 존재를 통해 나는 갑자기 어른이 된 것만 같아 우쭐해졌다. 사랑하는 사람의 키스와 향수 선물은 없었지만 선배가 손에 쥔 빨간 장미가 성년이 된 나를 축하해 주기에 충분했다. 우르르 몰려나오는 인파 속에서 한참을 서성이다가 꽃을 전하던 선배의 모습은 시간이 흘러도 잊히지 않는다. 장미는 미성년인 나를 성년으로 만들어 준 마법의 성장촉진제처럼 느껴졌고, 그 후 매년 성년의 날이 돌아올 때마다 꽃을 들고 가는 학생들을 보며 기분 좋은 추억을 떠올릴 수 있었다.
꽃을 든 사람은 아름답다. 오죽하면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라는 노래 가사도 있겠는가. 꼭 연인에게 주는 사랑의 징표가 아닐지라도 꽃의 용도는 다양하고 저마다 가치가 있다. 결혼식 날 신부의 고운 두 손에 들린 부케는 좋은 기운을 담아 또 다른 사람에게 전해진다. 또 지상에서 마지막 인사를 나누는 장례식에서도 사람들은 고인의 사진 옆을 꽃으로 장식하고, 한 송이씩 정성껏 헌화하며 애도를 표한다. 즐거울 때나 슬플 때나 꽃은 늘 우리와 함께인 것이다.
어느 가을 마로니에 공원에서 본 순국선열을 닮은 장미꽃과 이십 대의 시작을 근사하게 열어준 꽃 선물은 내 삶에도 작은 변화를 가져왔다. 언제부터인가 명동 어귀에 세워진 나석주 열사의 동상이 눈에 들어왔다. 퇴근하는 직장인들 사이로 우두커니 서있는 그분의 모습이 무척이나 쓸쓸해 보였다. 대학로에서 본 풍경이 떠올라 나도 가던 길을 멈추고 꽃다발을 사 동상 앞에 섰다. 추워진 날씨에 코트 깃에 얼굴을 묻고 총총히 걸음을 옮기는 사람들이 보였다. 아무도 그에게는 관심이 없는듯하여 괜스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속으로 감사의 인사를 하고 가만히 꽃을 내려놓았다. 거리를 지나던 한 무리의 관광객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꽃다발 하나로 전하기에는 부족한 마음이었지만 그래도 한 조각의 붉은 마음을 선생께 드리고 싶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일상생활에서 꽃 선물을 즐겨하게 되었다. 꼭 장미가 아니어도 좋다. 해바라기, 수국, 총 천연색의 안개꽃, 드라마 인기에 힘입은 목화 꽃까지 요즘은 종류도 다양해 고르는 즐거움도 느낄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은 아버지께 꽃을 선물해야겠다. 꽃은 곧 어머니의 품으로 가 두 분을 그리고 보는 이를 행복하게 해 줄 것이다. 평범한 날을 특별하게 만들어 줄 꽃다발에 내 마음을 담뿍 담아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