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시 하나쯤 가슴에 품고 산다> / 김선경
◉ 이누이트 족의 언어에 ‘훌륭한’이라는 단어가 없는 이유
알래스카 원주민 이누이트족의 토착어에는 '훌륭한'이란 단어가 없다고 한다.
그래서 훌륭한 사냥꾼도 없고, 훌륭한 남자도 훌륭한 여자도, 훌륭한 인간도 없다.
우리는 존재하므로 살아간다. 그러니 시시한 인생도 훌륭한 인생도 없다. 세상은 지금 나의 존재만으로 충분하다.
이론 물리학자인 로렌 크라우스는 말했다.
"목적이 없는 우주에서 산다는 것은 정말로 놀랍고도 신명 나는 일이다. 우주에 아무런 목적이 없었기 때문에 우연히 탄생한 생명과 의식이 더욱 값지게 느껴진다. 이 가치가 얼마나 지속될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태양이 살아 있는 동안은 결코 퇴색하지 않을 것이다."
지나치게 훌륭해지려는 노력들이 우리를 상심에 빠트리고 아프게 한다.
더 이상 훌륭해지려고 너무 애쓰지 말라. 스스로를 괴롭히고 있다면 틱낫한 스님의 말을 기억하라.
"한 송이 꽃은 남에게 봉사하기 위해 무언가를 할 필요가 없다. 오직 꽃이기만 하면 된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한 사람의 존재는 만일 그가 진정한 인간이라면 온 세상을 기쁘게 하기에 충분하다."
- 김선경 <누구나 시 하나쯤 가슴에 품고 산다> 中
이누이트족의 언어에는 '훌륭한'이라는 단어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어린 시절
"OO이는 왜 공부하니?"라는 어른들의 물음에 으레
"커서 훌륭한 사람 되려고요."가 정답인 줄로만 알았다.
기성세대가 만드는 사회 분위기는 요즘도 비슷한 것 같다. 몇 년 전 집집마 찾아다니면서 한 끼를 함께하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유명 코미디언과 매 회 다른 게스트들이 나왔는데, 한 번은 가수 이효리가 패널로 출연했다. 동네를 지나는 학생에게
"너 너무너무 예쁘다. 나중에 크면 어떤 사람이 될 거예요?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지~"
하는 진행자의 말에 그녀는
"뭘 훌륭한 사람이 돼. (하고 싶은 대로) 그냥 아무나 돼."
하고 시크하게 되받아쳤다.
'크. 역시. (엄지 척)'
꽤나 인상 깊었는데, 어느 순간 그 장면이 짧은 동영상으로 편집되어 SNS를 돌아다니는 것을 보았다.
사실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지 하고 생각한다면 내가 그 훌륭함에 도달하지 못했을 때 섣불리 좌절감을 느낄 수 있다. 인생의 어떠한 목표도 없이 아무렇게나 살라는 말은 아니지만 꼭 자신의 삶을 '훌륭한 어른, 행복한 인생, 착한 사람...' 이런 달콤한 단어에 꿰맞출 필요는 없다는 이야기다.
한때 나도 내가 짜놓은 인생의 항로에서 어긋나게 되면서 심하게 방황하던 시기가 있었다. 한 번이면 족했을 '암'은 두 번, 세 번, 네 번... 끝없이 이어졌고 2차 암이 되어 또다시 문을 두드렸다. 수술과 항암, 방사선 표준 치료를 모두 마치고 겨우 몸을 추스를만하면 재발이 찾아왔다. 오뚝이처럼 일어나려고 수도 없이 발버둥 치며 노력해 보았고, '다 지나간다' 생각하면서 체념하고 묵묵히 기다리는 시간도 여러 해였다.
망망대해에 뗏목을 타고 혼자 떠 있는 느낌이었다. 육지도 인적도 보이지가 않았다. 어디로 가야 할지 배도, 나침반도, 식량도 아무것도 없는데 엎친데 덮친 격으로 하나 남은 허름한 뗏목마저 침몰시키려는 듯 매일같이 폭풍우만 몰아쳤다. 그 위에서 나무 하나 붙잡고 맨 몸으로 오들오들 떨고 있는 모습이 나의 삼십 대였다.
하루는 혼자 밥을 먹다가 적적해 '사명'이라는 성가를 틀어놓았다. 단조에 비장함이 깃든 노래여서였을까 꾸역꾸역 넘기는 밥에 목이 메더니 이내 서러운 울음이 차올랐다.
'사회에 보탬이 되는 훌륭한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자주, 많이 아파서) 그러지 못했다.
가정을 이루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아이를 낳아 기르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했다.
나는 아프려고 태어난 걸까. 밥만 축내는 식충이, 쓸모없는 사람....'
부정적인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을 때였다.
'열심히 공부해서 훌륭한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내 인생도 또래들처럼 평범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독한 항암제보다 나를 더 힘들게 만든 건 이런 상념들이었다.
여기서 '훌륭한 사람'이란 세종대왕이나 이순신 장군처럼 나라를 구하고 국가를 위해 큰 업적을 이룩한 위인이 아니다. 그저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배운 것을 잘 활용해 경제활동을 하고, 내 가정을 꾸리고, 식구들을 건사하며 성실하게 살아가는 소시민이다.
평범하게 사는 게 제일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깨닫고 나는 '남들보다 잘 살기'가 아닌 '남들처럼(만) 사는 것'이 꿈이 되었다.
요즘의 나는 더 이상 '훌륭한 사람'이 되려 애쓰지 않는다. 내 인생이 마냥 '행복'할 거라는 야무진 꿈도 갖다 버린지 오래다.
그저 '좋아하는 일을 열심히, 꾸준히 하다 보면 뭐라도 되겠지. 아니면 어쩔 수 없고.'라고 생각한다. '일체개고(一切皆苦)'라는 불교의 진리처럼 비록 인생은 괴롭지만 때로는 꽃길도 깔리고 행복한 순간도 있으니 무탈이 답이라고 여기며 큰 욕심 없이 산다.
'올 해는 살을 몇 킬로 빼고 싶다. 바닷가 옆 산책로를 더 자주 걷고, 날이 따뜻해지면 설악산에 가야지.'
'매일 글을 쓰고, 사놓고 읽지 못했던 책들을 봐야지.'
'건강한 음식으로 식사하고, 달콤한 디저트 종류는 조금 멀리해야지.'
새해가 되면 세우는 이런 계획들은 변함이 없지만 지켜지지 않는다고 해서 엄청나게 비극적이거나 슬프지는 않다. 내년에 또 세우면 되니까.
나는 내가 부디 오래오래 건강하고, 명랑하고 활력 넘치는 지금의 모습이 조금이라도 더 지속됐으면 좋겠다. 내가 이 세상의 전부인 사랑하는 남편과 백년해로하고, 새소리 바람 소리 자연이 좋은 곳을 찾아 지낼 수 있다면 기쁠 것이다.
아픈 청춘도 나였고, 아픈 삶도 내 것이었다. 훌륭한 무언가는 아니지만 꿋꿋하게 살고 있다. 모진 세월 어렵고 힘든 시간들이었지만 흔들리되 꺾이지 않았고, 모든 걸 포기하고 싶은 순간에도 버티고 다시 일어섰다.
나는 한 송이 꽃도, 무엇도 아니지만 다만 한 가지. 암과 함께했던 긴 시간 속에서 비가 와도 춤을 추는 법을 배웠다. 맑은 날만 가득했다면 더 좋았을 테지만 뭐 어쩌겠는가. 아무리 기다려도 지나가지 않는 폭풍우라면 비바람이 몰아쳐도 내 길을 가야만 했다. 잔뜩 움츠린 채 운명을 탓하며 시간을 보낸 적도 있지만, 그런다고 인생이 달라지지는 않았다.
그래서 요즘은 지금 내가 선 자리에 만족할 줄 아는 사람.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사람이 되려고 한다. 밥을 차리고 매일 운동을 하고 글을 쓰는 일. 대단한 일은 아니지만 쉬운 일도 아니다. 소소한 하루하루가 모여 큰 일을 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일주일에 한 번 발행하는 브런치 글을 읽어주는 이웃들에게 감사하고, 가끔 정성 어린 댓글을 달아주시는 구독자분들께도 감사하다. 얼굴은 모르지만 한 분, 한 분의 인생이 총천연색으로 빛나고 있음을 나 또한 그들의 글을 읽으며 깨닫는다. 존재만으로 아름다운 우리의 삶을 응원한다.
훌륭하지 않아도 좋다.
대단하지 않아도 좋다.
그냥 나여서 그냥 당신이라서 좋다.
우리 존재 파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