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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은 이겼지만, 층간 소음은 못 이겨

사바나의 아침

by 윤슬log


나는 우리 집을 '사바나 (열대 초원지대)'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아니면 '정글' 한복판에 살고 있다고. 얼룩말이 아침부터 뛰어다니고 물소 떼가 이동을 하고, 코끼리와 사자도 나왔다.

전면 바다뷰인 통창으로 붉은 해가 이글이글 떠오르면 사바나의 아침이 시작되었다.


소리에 이미 놀란 가슴은 시도 때도 없이 벌렁거렸고, 남편이 출근하면 혼자 집에 남겨지는 게 무서웠다.

'그냥 생활 소음'이라고 마인드 컨트롤도 해보았다가, 티비도 크게 틀어놓고 보다가, 마음이 잡히지 않으면 성경도 소리 내어 읽어보고, 청소기도 돌리고 별의별 짓을 다해도 소리와 울림은 가려지지 않았다. 꾹. 꾹 참다 인내심의 한계가 올 때면 미리 싸놓은 '피난 가방'을 둘러메고 나가 하루 종일 집 밖을 쏘다녔다.


1월의 주문진은 몹시 춥고 바람이 거셌다. 소위 강원도 '똥바람'이라고도 하는데, 사전적 의미로는 '헛바람'의 방언이며 쉴 틈 없이 부는 강한 바람을 뜻한다. 봄이 한창인 지금까지도 기본 4m/s, 조금 많이 분다 싶으면 7m/s까지 바람은 불고 또 불었다.

한겨울에 연고도 없는 지역에 와 밖에서 시간을 보내는 일은 몸도 정신도 고단한 일이었지만, 그래도 집 안에 있는 것보다는 마음이 편했다.


종일 참다가 밤늦게까지도 시끄러우면 경비실로 연락을 했다. 1년이라 정말 조용히 있다가 나가고 싶었지만 하루, 이틀이 아니었기에 간접적으로나마 우리의 의사를 타진한 것이다. 인터폰이 갔는지 금세 조용해졌다. 하지만 다음날이면 그냥 똑같았다. 며칠이 지나도 딱히 개선점이 보이지 않자 우리는 관리사무소에 도움을 구하기로 했다.


피난 나와서 바라본 1월의 주문진. 바다도 차고 내 마음도 시리고




1. 운명적인 만남


아침 내내 "쿵덕. 쿵덕. 쿵. 쿵" 소리를 들으며 외출 준비를 했다.

'내가 오늘 이 소리 뭔지 진짜 알고 만다!!!'

비장한 눈빛으로 엘리베이터를 탔을 때 아래층 아주머니를 만났다.

"안녕하세요. 저희 위층에 새로 이사 오셨죠? 근데 그 집... 좀 시끄럽지 않아요?"

"어머. 네... 저희 집 시끄러워요. 그래서 지금 관리사무소 가는 길이에요."

"원래 여기가 절간 같았는데. 너무너무 조용했는데 한... 달 반? 한두 달 된 것 같네. 그때부터 애가 엄청 뛰는 것 같던데. 그 소리가 우리 집까지 난다니까. 내가 소리가 하도 나서 00층 형님한테도 전화해 보고, 그 집 옆집 있잖우. 대각선에 00집 친구한테도 전화해 봤는데 거긴 또 조용하데. 0층까지 전화를 싹 다 돌렸다니까."

"하... 저희 집도 난리예요. 아침 7시부터 뛰어요. 근데 저희 전에 사셨던 분들은 제가 층간 소음 없냐고 여쭤봤을 때 전혀 없었다고 했는데... 대체 뭘까요?"

"없긴 왜 없어. 그 형님 시끄러운데 애가 뛰는걸. 앤데 어떡하냐고. 그러다가 이사 갔어."

"..."

이사 온 지 일주일. 나는 이미 안 먹던 신경안정제를 먹고 있었다.

"우리 집도 그런데, 그 집은 바로 아랫집이니 얼마나 힘들겠어. 관리실 가서 잘 얘기해 봐요."



2. 민원인을 빡치게 하는 관리사무소


'그래, 일단 우리 집 아래층까지 시끄럽다는 민원 접수.'

나는 당찬 걸음으로 관리실로 향했다. 우리 동 호수를 이야기하고 인사를 하자 사무실 안쪽 칸막이 뒤에서 중년 남성이 수첩을 들고 일어났다.

"아~ 이거 한번 이렇게 민원 넣으시는 분들이 계속 넣으시던데. 쩝."

갑자기 뭔가 굉장히 성가신 존재가 된 것 같았다.


우리는 차근히 우리의 상황을 이야기했다. 관리소장은 일단 본인이 가져온 빈 노트에 긴 줄을 하나 그렸다.

"애가요. 딱 뛰는 시기가 있어. 한 2살, 3살부터 7살까지 많이 뛰어요. 그리고 7살이 넘잖아? 그럼 또 좀 안 뛰어. 그래서 애가 뛰는 건 어쩔 수가 없고 사실. 뭐 앤데 뛰지 말라고 안 뛰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조금 기다리시면 애기가 커서 안 뛸..."

소장은 갑자기 생애 주기율표 비슷한 것을 그리더니 7살이라는 숫자에 연신 동글뱅이를 그렸다.

"저희는 올 해만 사는데요. 저희... 올 1년만 여기 사는데 그 애가 지금 뛰어요. 지금."

관리소장은 크게 동요하지 않고 본인의 경험담으로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넘겼다.

"저희 집도 위에 장난 아닙니다. 아침, 저녁 할 거 없이 난리예요. 그래도 뭐 어쩌겠어요. 아파트고 공동 주택이면 생활 소음이 다 있고. 서로 배려하고, 양보하고..."

"저희도 많이 참고 있는데 아침에도 밤에도 너무 시끄러우니까. 너무 힘듭니다. 안내 방송 좀 해주세요. 엘리베이터에 층간 소음 관련 게시물라도..."

"아이고. 요즘 마음대로 방송 못합니다. 방송하면 자는 데 깨웠네. 자주 방송하네 뭐니. 민원이 얼마나 많은데요. 게시물도 함부로 못 붙여요."

"하... 그러면 도대체 관리실에서 해주실 수 있는 게 뭐죠? 이 아파트의 층간 소음 매뉴얼을 말씀해 주세요."

"층간 소음 매뉴얼? 매뉴... 얼. 흠..."


나도 안다. 매뉴얼이 있을 리가 없다는 걸. 안내 방송도 못 해준다는데 체계적인 매뉴얼을 바라는 건 욕심이었겠지.

결국 관리사무소에서 줄 수 있는 도움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 채 나는 점점 부아만 치밀어 올랐고, 묵묵히 듣고 있던 남편이 입을 열었다.

"그래서 저희가 원하는 건, 방금 아침에도 그 소리를 듣고 나온 거라 지금 한 번 위층에 같이 올라가 주실 수 있는지. 저희만 불쑥 찾아가면 놀라실 수도 있고, 이웃 간에 감정싸움으로 번질까 봐..."


00층까지 가는 길이 왜 이렇게 먼지. 떨리는 마음으로 벨을 누르고 인기척을 기다렸지만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관리사무소에서 나왔습니다. 잠시만 문 좀 열어주세요."

관리소장님의 말에도 묵묵부답이었다. 우리는 한참을 서있다가 별 소득 없이 집으로 돌아왔다. 희한하게 현관문을 열면 "쿵덕. 쿵덕. 쿵. 쿵." 소리가 한창이었다. 관리실에 다시 연락을 하고 득달같이 올라갔지만 이번에도 문은 열리지 않았다. 희한했다. 무섭고, 겁나서 그런 걸 수도 있겠다 싶었다. 관리실에서는 그 집 문 앞에 쪽지를 남겨놓겠다고 했으니 조금 나아지겠지 한 가닥 희망을 가져보았다.



3. 법대로 하세요!


그날 오후 관리실에서 윗집에 붙여놓은 쪽지를 확인하고 우리는 두근대는 마음으로 주말을 맞았다. 하루 종일 속초에서 시간을 보내고 캄캄해져 집에 돌아왔을 때, 얼룩말과 물소와 코끼리 그리고 사자는 여전히 사바나의 초원을 질주하고 있었다. 더 이상은 참을 수가 없었다.

"여보, 옷 입어. 올라가자. 혹시 모르니까 경비실에 연락해 줘."

경비아저씨와 함께 잠옷 바람에 카디건만 걸친 채 위층으로 올라갔다. 싸움이고 뭐고 두 번, 세 번 젠틀하게 이야기했으면 알아 들어야지 해도 해도 너무하다 싶었다.


벨을 누르고 젊은 남자가 나왔다. 그가 어정쩡한 포즈로 눈인사를 건넸다.

"저희 왜 올라왔는지 아시죠?"

라는 남편의 한 마디가 그의 화를 돋웠다. 집에 들어와서 직접 보시라고, 자기네는 300만 원짜리 매트 시공을 다 했다고 말했다. 정말 집에 들어가서 보니 매트는 거실 가득 깔려 있었다. 인기척에 놀라 뛰어나온 아이는 사슴 뒷다리보다 작았다.

"저희 집에서는 얼룩말이 뛰는 소리가 나요. 저희 집 와서 한 번 들어보세요."

나의 말에 남자의 분노 게이지가 한 단계 더 상승하는 것이 느껴졌다.

"하, 참나. 저기요. 저희 애가 20개월이에요. 얘가 뛰어봤자 얼마나 뛰겠습니까? 매트도 다 깔았는데... 지난번에 밤에 연락 주셨을 때도요, 저희 애엄마가 애기 어린이집에서 픽업해가지고 막 들어와서 계란 프라이 하고 있었어요. 저희는 맞벌이고 아침에 나가서 6시까지는 사람이 없다고요."

남자는 아랫입술을 파르르 떨면서 이야기했다. 그가 우리보다 더 억울해 보였다.


"00이시랬죠? 법적으로 하세요. 공문 보내시고, 층간 소음 데시벨 낮이랑 저녁이랑 기준이 다른데 그거 다 소음 체크하셔서 법적으로 하세요! 공동 주택에서 그 정도도 못 참으시면 어떻게 하라는 거예요!"

남자는 남편의 회사를 어떻게 알았는지 직업을 들먹이며 법대로 하라고 큰 소리를 쳤다. 남편은 이미 넋이 나갔고, 나름 교양 있고 우아한 여성을 표방하던 나지만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었다.

"아니 그럼, 데시벨 체크해서 기준치 바로 아래면 계속 이렇게 지내실 거예요? 같이 살아야죠! 매일 7시에 일어나서 8시에 나가시죠? 저희 항상 그 소리에 깹니다. 그리고 밤에 나는 '오도도도도. 와다다다다.' 이 소리는 뭐예요?"

내가 정확한 시각을 말하자 남자는 살짝 수그러진 목소리로 그건 우리 애가 뛰는 소리가 맞다고 인정했다. 애가 안 뛸 수는 없다고 본인 입으로 말하면서도 끝까지 우리에게 양해를 구하거나 미안해하지는 않았다. 매트만 깔면 아랫집에서 피해를 호소해도 마음껏 뛰어도 되는 걸까.


우리에게는 적반하장이었던, 남자의 길길이 날뜀으로 우리는 '오해가 있었다'며 되려 사과를 하고 내려왔다. 남자도 '너무 시끄러우면 연락을 달라고' 말했다. 아이는 그날 밤도 여전히 뛰었다.


너무 억울했다. 나도 입술 떨면서 화낼 수 있는데, 머리 쥐어뜯으면서 괴로워할 수 있는데. 아이는 작아도 너무 작았고 거실에 매트도 다 깔려있어서 할 말을 잃었다. 무엇보다 낮에 하루 종일 비어있는 집이라는 것에 우리는 모든 전의를 상실했다.

이 와중에 선비 같은 남편은 왜 이리 더 꿀 먹은 벙어리가 된 건지 야속하기만 했다.



오랜 기간 암과 싸우며 한껏 쪼그라들었을 때가 있었다. 그래도 살아야 했기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고 싶었기에 험난한 치료와 암의 세력에 굴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 싸웠다. 지금도 아직 완치는 아니지만 언젠가 병원에서 "이제 그만 오셔도 돼요."라고 말하는 날을 상상하며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암에게 용맹히 맞서던 나도 층간 소음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인터넷으로 수없이 찾아본 바 '층간소음관리위원회'라는 것이 존재했고, 나라에서 분쟁을 조정하는 '이웃사이센터'도 있었다. 전자는 500세대 이상인 단지인데 우리 아파트는 해당되지 않았고, 후자 역시 분쟁 조정까지 상당한 시일과 절차가 필요했다.


유일하게 비빌 언덕이었던 관리사무소는 민원인을 더욱 빡치게 했고, 위층 남자는 남편의 직업까지 들먹이며 '법대로 하라'고 소리쳤다.

피해자는 우린데 남편의 개인 정보는 어디서 새나간 것이며, 시끄러워서 시끄럽다고 이야기한 건데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받는 느낌이었다.


우리는 급기야 우리의 선택을 자책하기 시작했다. 이 난국에 대한 한탄과 대응책이 번갈아 가며 이어지던 그때, 전에 살던 분들이 했던 새빨간 거짓말이 떠올랐다.

"와... 어른들도 거짓말을 하는구나. 집주인도 아닌데, 같은 세입자면 그냥 솔직하게 좀 말해주지."

"주차'는' 괜찮아요. 했을 때 그 '는'에서 알아차렸어야 했어. 주차만 괜찮다는 거였는데. 어흑."

남편은 괴로워했다.

이전 세입자도, 관리사무소도, 위층 가족도 어떤 부분에 있어서는 모두 이해가 갔다. 잘못이 있다면 이 깡통 같은 아파트에 있는 거라고 화살을 돌렸다.


최대한 이성적으로 생각해야지.

이제 남은 건 윗집애가 어린이집에 간 뒤, 낮에 나는 정체불명의 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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