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은 "그러나게"
나는 백만 원짜리 깡통집에 산다.
우리 집은 아침, 점심, 저녁 골고루 시끄러운데 다만 한 가지 위안을 찾자면 바다가 아주 잘 보인다는 점이다. 지금은 어느 정도 익숙해졌지만 이사 온 후 처음 세 달은
'왜 이런 지옥 같은 마음으로 바다를 바라봐야 하지?'
라는 생각에 많이 속상하기도 했다.
강릉으로 이사 온 것은 순전히 남편의 직장 발령 때문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이곳은 우리가 원하던 곳이기도 했다. 아직 신혼인 우리 부부에게 생활 지원금을 받을 수 있는 좋은 기회였으며 바다를 좋아하는 둘에게는 최적의 환경이었다.
나는 사년 간 속초에서 치병 생활을 했고, 남편 역시 속초에서 군생활을 했던 터라 우리는 어느 곳에 있든 항상 바다를 그리워했다. 작년 한 해 내륙의 신도시에서 지냈을 때에도 우리는 틈만 나면 "바다, 바다 가고 싶다"를 외쳤다.
그런데 정말 바닷가에서 살아볼 수 있는 기회가 생긴 것이다. 그것도 꽤 괜찮은 조건으로.
전에 살던 곳에서 강릉까지는 차로 3시간 30분. 휴게소에 한 번 쉬면 넉넉잡아 4시간이 걸렸다. 우리는 이 길을 부지런히 오가며 좋은 집. 즉 예산과 시기가 맞으면서도 깨끗하고 전망 좋은 집을 찾아 부지런히 발품을 팔았다. 한겨울의 칼바람도, 영동지방에 폭설도 '바닷마을 다이어리'를 꿈꾸는 우리의 바람을 막을 수는 없었다.
집을 알아보면서 가장 중요한 건 남편 직장과의 거리였다. 강릉 시내에로 오가는 셔틀이 있긴 했지만, 회사가 주문진에서 더 가까웠기 때문에 애매했다. 출근 시간 기준으로 강릉 시내에서 주문진읍까지는 보통 25분에서 30분 정도 걸리는데, 정류장까지 도보로 이동하고 버스를 기다리는 시간을 고려하면 회사 가까이 사는 것과 비교해 약 1시간은 더 일찍 나서야 했다. 아침잠이 많아 직주근접(職住近接)이 최우선인 남편에게는 어려운 조건이었다.
무엇보다 보조되는 생활 지원금의 금액도 강릉 시내에 월세를 얻기에는 부족했으므로 우리는 별다른 고민 없이 주문진으로 보금자리를 결정했다.
어느 정도 지역이 좁혀지고 난 후 나는 본격적으로 맘카페와 인터넷 정보들을 뒤져가며 우리가 살 집을 물색하기 시작했다. 회사 근처의 특정 장소에서는 돈사, 농공단지 냄새가 난다는 고오급 정보를 알게 되었고, 그쪽을 피하기로 했을 때만 해도 우리는 스스로 되게 똑똑하고 현명하게 잘 진행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무엇보다 우리에게는 한 가지 로망이 더 있었는데, 바다가 보이는 '오션뷰'의 집이었다. 사실 이 조건은 그야말로 '드림'이라 크게 기대하지는 않았지만, 부동산에서 보여준 세 곳의 매물 중 한 군데가 탁 트인 바다 전망이었고 덕분에 사그라들 뻔한 우리의 꿈은 금세 부풀어 올랐다. '새 집 증후군'이 있는 나에게는 딱 알맞은 연식에, 넉넉한 주차 공간까지 완비된 곳이었다.
집을 보러 갔을 때 우리는 생각지도 않은 전면 오션뷰에 뻑이 갔다. '넋이 나갔다.'라고 좀 더 갖춰서 표현하고 싶지만 정말 우리는 말 그대로 뻑이 갔다. 늘 바다를 꿈꿔온 우리 부부의 눈앞에 파-란 동해바다가 일렁이고 있었던 것이다. 마침 그날은 날씨도 화창해 바다 색깔도 더없이 아름다웠다. 거실과 안방, 서재방, 작은방에서 모두 바다가 보이는 백 점짜리 집이었다. 요즘 지어진 아파트답게 넉넉한 드레스룸이며, 천장에 달린 시스템 에어컨도 모두 마음이 쏙 들었다.
서재 방에는 창문 쪽으로 나란히 책상을 두 개 놓아서 나는 글을 쓰고 남편은 책을 읽거나 게임을 하는 흐뭇한 상상까지 마친 우리는 누가 봐도
'이 집, 곧 저희가 계약할 것 같아요~'
라는 눈빛을 발사하며 거주하고 있었던 분들에게 한 가지 질문을 던졌다.
"여기 층간 소음은 어때요?"
태어나서 줄곧 아파트 생활을 했지만 '층간 소음'으로 문제가 있었던 적은 사실 한 번도 없었다. 그래도 몇 차례 내가 살던 곳으로 집을 보러 온 사람들이 건넸던 질문이
"여기 층간 소음 있나요? 위층 많이 시끄럽나요?"
였기 때문에 나도 한 번 따라서 해보았다. 이왕이면 조용하면 좋으니까.
우리 부모님 연배보다 조금 더 나이가 든 노년의 부부는 서로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며 말했다.
"아니요. 살면서 딱히... 느껴본 적 없는데요."
거짓말 같지 않았다. 점잖은 어르신들이 저렇게 태연하게 말씀하시는데 아무렴.
우리는 별다른 고민 없이 그 집을 계약하기로 했다. 전월세 계약이 통상적으로 2년인데 반해 우리는 근무 여건상 1년 거주 예정이었고, 이 조건과 더불어 금액, 위치, 평수와 구조, 연식, 주차 편의성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했을 때도 여기만 한 곳이 없었다. 집주인 내외분도 너무 인자하고 좋으셔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우리의 주문진 살이는 시작되었다.
이삿짐을 나르는 동안 가구 배치가 다 된 작은 방에 옹기종기 모여있을 때 알았더라도 이미 늦은 거겠지.
'쿵. 쿵. 쿵. 쿵.'
'도도도도. 다다다다'
천장 위로 발소리가 크게 들렸다.
"윗집에 애가 있나 보다."
이사를 도와주러 온 엄마가 말했다. 소리도 소린데 천장과 벽을 타고 내려와 공간을 울린다는 게 더 문제였다. 정신없었던 이사가 끝나고 소고기집에 가서 거하게 저녁 식사를 했다. 부모님과 함께 케이크도 불며 주문진에서의 우리의 새 출발을 축하했다.
'도도도도. 우다다다다다.'
머리 위로는 소리가 계속이었다.
'나만 이렇게 예민하게 느끼나? 좀 시끄러운 집이네.'
이사한 첫날 잠을 잘 자고 싶은 마음에 샤워를 하고 산뜻하게 누웠지만 어느 집에서 내는지 알 수 없는 화장실 소음, 플라스틱을 퉁 퉁 내려치는 소리, 어른의 발망치 소리, 아이가 뛰는 소리... 온갖 소리가 다 들려왔다.
'자겠지. 저 사람들도 자겠지. 밤인데 자겠지.'
백번쯤 몸을 뒤척였을 때 핸드폰 불빛으로 시간을 확인하니 밤 12시 20분. 누운 지 2시간도 더 된 시각이었다. 이제 좀 잘 수 있나 했는데...
"멍. 멍멍. 왈왈. 왈."
이번엔 개가 짖었다. 작은 개가 아니었다. 최소 진돗개나 누렁이의 목청이었다.
'아 맞다. 여기 시골이지...'
난 직감적으로 알았다. 망했다는 걸.
매일이 새 날이라는데, 우리 집에서 나는 소리들은 참으로 한결같았다.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었고 소음은 계속되었다. 나는 형사처럼 소리의 출처를 찾아다녔다.
일단, 우리 집 위층에는 아이(들)가 있는 게 맞았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우리 라인에서 아이(들)가 있는 집은 우리 윗집뿐이었다. 우리는 매일, 하루도 빠짐없이 윗집 발도장 소리에 잠을 깼다. 이렇게 강제로 기상을 하고 나면 7시였다. 주말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다시 잠을 청할 수도 없게 뜀박질은 이어졌고, 잠을 포기하고 씻고 아침을 차려먹고 다 치우고 나서 시계를 보니 8시 40분이었다. 채 9시도 되기 전이었다. 참담했다.
(참고로 우리 부부의 주말 평균 기상 시간은 10시에서 11시 사이다. 깨우지 않으면 남편은 오후까지도 잔다.)
몇 살인지, 몇 명인지도 모를 아이(들)는 아침부터 뛰기 시작했고, 운이 나쁜 날에는 6시 30분부터 요이땅이었다. 그리고 10분, 30분, 길게는 1~2시간도 이어졌다. 물론 중간에 쉬는 타이밍도 있으니 내내 난 것은 아니지만, 아래층에서 그 소리와 울림을 온몸으로 체감하고 있는 나로서는 골이 울리고 진절머리가 나는 시간이었다.
낮에도 또 다른 종류의 소리가 났다.
"쿵. 쿵. 쿵. 쿵."
"쿵덕. 쿵덕. 쿵덕"
너무 희한해서 녹음을 해서 들어봤지만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이렇게 하루 종일 시끄러운 집이 존재하다니.
야속하게도 집 밖에서는 자주 개가 짖었다. 내려다보니 아파트 앞에 주택과 인근 업장에서 실외에 묶어놓고 키우는 개들이 보였다. 이것만이었다면 그래도 다행이었을 텐데, 집 근처에는 용접을 하는 곳이 있는지 망치로 두드리고 땜질하는 소리가 오목한 아파트 구조를 타고 올려와 귓전을 때렸다.
그렇다. 아파트에서 들을 수 있는 모든 소음이 우리 집에서 났다.
귀가 트인 나는 작은 소리에도 심장이 벌렁거리기 시작했고, 다급한 손가락으로 '층간소음 대처', ' 층간소음 마인드 컨트롤' 등을 찾아봤지만 미봉책에 불과했다. 막 이사를 왔는데 이 소리들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적응해야 할지, 대처할 수는 있을지 감이 서지도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웅~~ 우웅~~ 덜컹. 덜컹.'
남편은 샤워 중 나는 혼자 거실에서 티비를 보고 있었다. 덜그럭 거리는 진동 소리에 귀 기울여보니 우리 집에서 나는 소리였다. 소리의 출처는 작은방에서 돌린 스. 타. 일. 러
전에 살던 곳에서는 돌아가는지도 몰랐던 스타일러가 웅장한 사운드를 뽐내며 작동 중이었다.
"여보 스타일러 밤에 돌리면 안 되겠다. 모았다가 낮에 돌리자. 소리가 너무 크네."
작은 소리에도 예민해져 이 소리가 크게 들리나 했지만, 나는 곧 알게 되었다.
안방에서 그리고 거실에서도 남편 이름을 부르면 소리가 울렸다. 메아리처럼 두 번, 세 번 울리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목욕탕처럼 들리는 건 부정할 수 없었다.
"여보, 우리 아무래도 깡통집에 이사 온 것 같아."
예전에 들은 우스갯소리가 있다. 어느 단역 배우가 자신에게 주어진 대사를 너무 열심히 연습한 나머지
"그러게나."
를
"그러나게."
라고 말해버렸다고 한다. 백 번, 천 번 연습했지만 너무 잘하려는 마음에 긴장해서 말이 헛나간 것이다.
피식 웃고 넘겼는데, 생각해 보니 정녕 우리 집은 '그러나게'였다.
돈사, 축사, 수산 냄새, 농공단지를 모두 훌륭하게 잘 피해 우리는 깡통집으로 이사 왔다. 모든 소리가 났고 작은 소음도 크게 들렸다.
너무 잘하려고 하다 보니 그렇게 된 걸까. 많은 것을 고려하다 보니 그랬을까. '장고(長考) 끝에 악수(惡手) 둔다'라고 하지만, 살아보지 않고 누가 층간 소음을 알 수 있단 말인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스스로 다독여봐도 소용이 없었다. 생각을 정리하고, 남편과 나를 위로하고 있던 순간에도 여러 가지 소리들이 날아들었다.
그렇게 며칠이 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