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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문진 해변에서 나는 울었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동의 눈물을 흘린 이유

by 윤슬log


* 글을 시작하기에 앞서 이 글의 제목은 파울로 코엘료 작가의 <피에트라 강가에서 나는 울었네>에서 차용했음을 밝힙니다.



주문진으로 이사 온 후 나를 펑펑 울게 만든 것은 바다였다. 그리고 그것은 슬픔의 눈물이 아닌 감동과 감사의 눈물이었다.


'한바탕'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길고 징했던 층간 소음 난리는 여전히 진행 중이고, 인간은 적응의 동물인지라 나 역시 몸서리치게 못 견딜 지경에서는 벗어나고 있었다. 살겠다고 몸이 적응하고 있는 사실이 웃기면서도 슬펐다.


정신없는 와중에 한 줄기 위안이 된 건 주말에 남편과 함께 해안선을 따라 드라이브를 다녀오는 것이었다. 주문진에서 시작해 위로는 양양-속초-고성, 아래로 달리면 강릉을 지나-동해-삼척까지가 당일 코스로 딱이었다. '바다'를 보며 살겠다는 일념으로 이곳까지 온만큼 문만 열고 나가면 바다라는 사실이 좋았다.



그날은 이사 온 뒤 처음 맞는 주말이었다. 해안도로를 따라 익숙한 속초까지 가보기로 했다.

주말에는 특히 붐비는 수산시장을 지나 주문진 해변 쪽으로 차가 들어섰다. 소돌해변에서 주문진 해수욕장까지 한적하고 탁 트인 바다가 가슴 안으로 들어왔다. 창문을 내리고 밖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시원한 공기가 손끝을 스쳐갔다. 라디오에서는 박효신의 '숨'이라는 곡이 흐르는 중이었다.

"이거 내가 좋아하는 노래라 볼륨 좀 올릴게."

나는 모든 창문을 내리고 박효신의 목소리로 차 안을 가득 채웠다.


그러다 별안간에 갑자기 울음이 터졌다. 걷잡을 수 없이 흐르던 눈물은 이내 통곡이 되었고, 나의 맥락 없는 울음에 남편은 당황한 모습이었다.

"여보, 고마워. 나는 내가 다시 강원도에 와서 살 수 있을지 몰랐어. 속초 떠날 때만 해도 너무 암담했는데... 이렇게 여보랑 결혼하고 여기 내려와서 같이 살 수 있어서 너무 좋다. 엉엉엉."

남편은 말없이 휴지를 꺼내 건네주었다.

"그리고 이 노래... 내가 항암 치료 하면서 설악산 다닐 때 듣던 노래야. 이 노래 부르면서 매일 혼자 흔들바위까지 올라갔었는데. 여기서 다시 들으니까 너무 기분이 이상하다. 흑흑."

슬프지 않던 나는 이미 누구보다도 서럽게 울고 있었다.

사람에게는 저마다 잊지 못하는 풍경이 있다. 잊을 수 없는 향기와 잊을 수 없는 음악도 있다. 바쁜 세월에 떠밀려 살다가 그것과 우연히 마주하게 되었을 때, 해묵은 감정들이 올라와 폭발하는 경험을 나는 지금 하는 중이었다.

나는 남편에게 "나랑 결혼해 줘서 고맙다고. 이곳에 데려와줘서 고맙다고." 바다 앞에서 한참을 이야기하고 나서야 기쁨의 눈물을 거둘 수 있었다.




그랬다. 뭐 하나 쉬운 게 없었다.


이십 대 초반 겪은 유방암은 8년이 지나 몇 번이나 재발을 했고, 급기야 폐암이라는 두 번째 암을 감당해야만 했다. 간절히 살고 싶은 마음에 폐 수술 이후 회사도, 서울 살이도 모두 정리한 채 강원도로 내려왔다. 아는 사람 하나 없었던 이곳에서 나는 매일같이 산을 오르고 바다를 걷고, 호수를 달리며 몸과 마음을 추슬렀다.

젊은 나이라 혈기가 왕성해서 그런지 '정신수양'이 제일로 필요했다.


나에게 바다와 산, 호수와 들판... 강원의 모든 자연은 건강 회복과 마음의 안정을 가져다준 보배였고, 나를 살린 '제2의 고향'이었다. 태어난 곳은 서울이었지만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어 다시 살 수 있게 해 준 곳은 이곳이었다.


'삶의 가장 절망스러운 순간 이곳으로 내려오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라는 생각을 가끔 해보지만 상상이 잘 가지는 않는다.


모든 것을 다 잃고 속초에 내려와 나의 반려인 남편을 만났고, 마음속으로만 품고 있었던 '글쓰기'에 대한 연정을 무한정으로 펼칠 수 있었다. 평생 동반자가 될 '글과 벗'이라는 두 문우를 모두 만난 것이다.

사람의 백 마디 말보다 한 번 부는 바람이 힘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해 준 것도 강원이었고, 말 없는 동물들이 건네는 위로를 처음 느낀 곳도 여기였다. 이런 나에게 있어서 강원도의 수려한 산과 드넓은 동해 바다 사이에 사랑하는 사람과의 보금자리를 꾸릴 수 있음은 실로 감동적인 일이었다.

4년간의 속초살이를 끝내고 가족이 모두 서울로 올라가게 됐을 때에도, 나는 가능하다고만 하면 이곳에 남고 싶었다. 사시사철 예쁘게 옷을 갈아입는 설악산을 두고, 말없이 풍요로운 저 바다와 호수를 두고 어떻게 떠난단 말인가?

하지만 혼자 남기에는 경제적인 여건이 되지 않았고, 체력은 더욱 따라주지 않았다. 무엇보다 부모님 입장에서 아무리 자연이 좋은 곳이라도 아픈 딸을 홀로 남겨두고 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리고 이어진 시간들은 투병보다 나를 더 힘들게 했다. 사랑 하나로 행복했던 남자친구와의 결혼은 그쪽 부모님의 반대로 난관에 부딪쳤고, 재취업을 목표로 자격증이며 원서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또 한 번 발을 겪으면서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었다. 이렇게 산전수전 다 겪고 나니 아름다운 강원도의 자연이 눈물 나게 그리웠다. 컨디션이 나아지는 날에는 남자친구 (지금의 남편)와 함께 속초로, 강릉으로 여행을 떠나긴 했지만 돌아서는 발걸음에는 항상 아쉬움뿐이었다.


그래서 이곳. 동해안의 푸른 바다를 마음껏 즐길 수 있고, 설악산의 품에서 하루 종일 뛰어놀 수 있는 곳에 오기를 희망했던 것이다. 그런 곳에 사랑하는 남편과 무사히 결혼해 함께 왔으니 감동은 배가 되었다. 부디 우리의 앞날이 희망차고 창창하기를. 여기서는 정말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용기도 백배였다.


지금 우리 집에서는 바다가 아주 잘 보인다. 눈을 뜨고 잠들 때까지 바다의 모든 하루를 함께할 수 있다.


요즘 나는 바다를 보며 매일 글을 쓰고, 그동안 읽지 못했던 책도 원 없이 읽고, 물기를 촉촉하게 머금은 바닷가 모래사장에 나가 어씽 (맨발 걷기)도 하고, '솔향 강릉'이라는 표어처럼 소나무향 가득한 송림에 들어가 피톤치드 샤워도 하며 건강과 글쓰기에 정진하며 지내고 있다.


비 오는 바다, 눈이 오는 바다, 태양이 미광을 비추는 한낮의 바다, 바다의 단짝 파도, 파도가 내는 소리, 갈매기의 날갯짓, 고기잡이 배와 유람선, 갸륵한 등대의 불빛, 바다를 보며 행복해하는 사람들까지...

바다가 준 선물들은 헤아릴 수가 없었다.




속초에 내려와 항암 치료가 한창이던 2018년 어느 여름날. 나는 파도처럼 부서진 몸과 마음을 붙잡고 아야진 바닷가에 앉아 있었다. 약기운 때문에 걸을 힘은 없고 집에만 있기에는 답답해서 정처 없이 차를 몰고 해안가를 달리던 중이었다. 아야진항을 돌아 나오자마자 펼쳐진 황홀한 바다의 모습에 저절로 발길이 멈췄다.


갯바위에 앉아 나는 한번 크게 울고 켜켜이 쌓인 상한 마음들을 모두 털어버렸다. 신기하게도 그렇게 바다 곁에서 울음을 토해내고 나면 가슴이 시원하게 열리는 느낌이었다. 파도가 곁에서 같이 울어주기도 하고, 눈물을 닦으라고 손을 내밀기도 했다.


오늘의 나는 슬픔의 눈물 대신 기쁨과 감동의 눈물을 바다에게 건넨다. 여전히 건강을 걱정해야 하고 꿈을 이루어가는 중이지만, 그래도 앞이 하나도 보이지 않던 캄캄한 현실에서 벗어나 지금은 새로운 꿈도, 희망도, 사랑하는 사람도 생겼다.


달팽이와 거북이처럼 가는 내 인생이지만

조금의 전진이 있었음에 감사하고

여전히 이 자리에 살아있다는 것에 감사하며.

나는 매일 새로운 마음으로 바다와 만난다.



- 박효신

오늘 하루 쉴 숨이
오늘 하루 쉴 곳이
오늘만큼 이렇게 또 한 번 살아가

침대 밑에 놓아둔
지난밤에 꾼 꿈이
지친 맘을 덮으며
눈을 감는다 괜찮아

남들과는 조금은 다른 모양 속에
나 홀로 잠들어
다시 오는 아침에
눈을 뜨면 웃고프다

오늘 같은 밤
이대로 머물러도 될 꿈이라면
바랄 수 없는걸 바라도 된다면
두렵지 않다면 너처럼

오늘 같은 날
마른 줄 알았던
오래된 눈물이 흐르면
잠들지 않는 내 작은 가슴이
숨을 쉰다

끝도 없이 먼 하늘
날아가는 새처럼
뒤돌아 보지 않을래
이 길 너머 어딘가 봄이
힘없이 멈춰있던
세상에 비가 내리고
다시 자라난 오늘
그 하루를 살아

오늘 같은 밤
이대로 머물러도 될 꿈이라면
바랄 수 없는걸 바라도 된다면
두렵지 않다면 너처럼

오늘 같은 날
마른 줄 알았던
오래된 눈물이 흐르면
잠들지 않는
이 어린 가슴이 숨을 쉰다
고단했던 내 하루가
숨을 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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