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 앞, 장례식장 바로 앞
"집 바로 앞이 병원이네. 큰 병원이 있어."
이사하던 날 엄마의 말에서 생기가 돌았다. 꽤 크고 번듯한 병원 건물이 우리 집과 마주 보고 있었다.
남편의 직장을 따라 연고지가 아닌 곳에 머물다 보니 갑자기 아픈 곳이 생길 때마다 잘하는 병원 찾기가 쉽지 않았다. 주문진에 저 정도로 건물 한 채를 다 쓰는 병원이 있을 줄이야. 번거롭게 강릉 시내로 나가지 않아도 되겠다는 생각에 흡족한 미소가 지어졌다.
그런데 이상했다. 번듯하게 잘 지은 건물인데, 분명 OO병원이라고 간판도 대문짝만하게 붙어있는데 드나드는 사람이 없었다. 주차장도 늘 한가했다.
'병원이 망하기도 하나?'
고개를 갸웃하며 인터넷 검색창에 병원 이름을 넣어보았다. 상호명은 검색됐지만 무슨 과 진료를 보는지, 전문의 수가 몇 명인지 등의 기본 정보들이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병원의 존재는 금방 잊혀졌다.
그날은 남편이 회식이 있어 늦게 귀가하는 날이었다. 편치만은 않은 집 덕분에 (feat. 층간소음) 종일 밖에 나가 운동하고, 도서관에 앉아 글 쓰고, 관광객 모드로 여기저기 탐방도 해보았지만 신랑이 돌아오려면 아직 먼 시간이었다. 간단히 때운 저녁 식사에 조금 출출하던 찰나 칠흑 같은 야경 속에서 유난히 밝은 빛을 뽐내고 있는 불빛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그건 바로
편. 의. 점
나는 회심의 미소를 띠며 유유히 편의점으로 향했다. 건강상의 이슈로 편의점에 있는 많은 맛있는 것들은 이미 멀리한 지 오래였다. 인간적인 면 빼면 시체인 나로서는 물론 가끔 먹긴 하지만, 남편이 알면 속상해할 거라는 건 잘 알고 있었다. 전에도 몰래 수미칩을 숨겨놓고 먹다가 신랑에게 걸린 적이 있었는데, 남편은
"여보... 나쁜 거 먹고 싶으면 무무 (남편의 애칭) 얼굴 한번 떠올려주라."
하며 눈썹이 여덟 팔자가 되도록 울상을 지었다.
'안 먹어야 하는데, 올해 딱 한번 먹는다면 그건 바로 지금~^^ ^^ ^^'
이라고 생각하면서 룰루랄라 횡단보도를 건너 편의점으로 향했다. 그러다 누군가와 눈이 마주쳤다. 그건 바로 누군가의 '영정 사진'이었다.
"헉."
예상치 못한 만남에 숨이 턱 막혔다. 편의점으로 가기 위해 집 앞 병원을 지나던 중이었다. 나는 찬찬히 건물을 살펴보았다. 병원 정문이 아닌 오른쪽 문에 지하로 연결되는 계단이 보였고, 그 문 위로 커다란 전광판이 눈에 들어왔다. 거기에는 이름, 상주, 발인 날짜가 적힌 정보와 함께 고인의 사진이 걸려있었다.
우리 집 앞에 있던 크고 번듯했지만 아무도 드나들지 않던 그 병원의 정체는 바로 '장례식장'이었다.
나중에 찾아보니 병원 건물로 지어졌다가 지금은 장례식장으로만 사용되고 있다고 했다. 어느 날 창밖을 내려다보면 유난히 차들이 많이 주차되어 있을 때가 있었는데, 그때는 장례식이 있는 날이었던 것이다.
남편 몰래 과자 한 봉지 사 먹고 입 닦으려고 했던 나의 야무진 꿈은 뜻하지 않던 영정 사진과의 만남으로 쫄아붙었다.
편의점을 나온 나는 목적에 충실하게 과자 봉지를 뜯어 얼른 입 속으로 넣었다. 과자 맛이 훌륭했다. 그리고 줄곧 땅만 보고 걷다가 다시 고개를 돌려 장례식장 입구를 바라보았다. 아까 본 영정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회색 양복을 말끔하게 잘 차려입은 신사가 보였다. 누군가의 남편, 누군가의 아버지, 회사원, 평범한 가장... 그런 느낌이었다.
'저분은 저 사진을 찍었을 때 영정 사진이 될 줄 알았을까?'
한눈에 보기에도 신분증에 쓰이는 일반 증명사진이었다. 말쑥한 정장에 잘 빗어 넘긴 머리가 그의 마지막을 알리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성호가 그어졌다. 그의 사진을 한번 더 바라보며 꼭 좋은 곳으로 가시라고 정성껏 한번 더 성호를 그었다.
예전에 이탈리아 아씨시의 한 성당에서 장례 미사에 참석한 적이 있다. 우리는 성지순례 중이었는데 우연히 들른 성당에서 누군가의 장례 미사가 거행 중이었던 것이다. 모두들 숨을 죽이고 성당 맨 뒤에 서서 고개를 숙이고 두 손을 모아 기도했다. 낯선 노신사의 관은 우리를 지나쳐 성당 밖으로 향했다. 뜻밖의 만남이었지만 장엄한 분위기에 압도되어 잠시나마 인간의 생사고락에 대해 상념에 잠기기도 했었다.
"저분은 우리와 전생에 어떤 인연이 있길래 이렇게 먼 이태리까지 와서 장례 미사를 보는지. 참 신기하네."
가만히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엄마가 말했다.
그때도 참 기분이 묘하고 신기했는데, 나는 또 어떤 인연으로 세상과 작별하고 있는 그 분과 눈이 마주친 걸까.
그 후로 아침에 환기를 하려고 창문을 열 때마다 병원 쪽으로 신경이 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 되었다.
병원 앞에 차도 사람도 많은 날에는 마음이 착 가라앉는다. 부슬비라도 내리는 날에는 더 그렇다. 상복을 입고 삼삼오오 모여있는 사람들, 유족이 탈 대형버스, 근조 화환을 실을 트럭, 검은 옷을 입고 병원 안으로 뛰어들어가는 사람을 보면 마음이 쓰였다.
가끔 복을 누리고 오래 산 사람의 상사(喪事)를 일컬어 '호상(好喪)'이라는 말을 사용하는데, 나는 그 말이 달갑지 않다. 나이 들어 병 없이 천수를 누리다가 자는 듯이 가는 것은 틀림없는 '복'이지만, 남은 가족들에게 '좋은 죽음'이 어디 있단 말인가?
글을 쓰기 위해 'OO병원'에 대한 자료를 찾아보던 중 이곳이 원래는 '예식장'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예식장이던 건물을 2013년 병원으로 리모델링했고 내과, 정형외과, 가정의학과 등의 진료를 보았지만 현재는 장례식장으로만 사용 중이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1층에 우체국이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다른 곳으로 이전한 지 오래였다.
생각해 보니 하나의 건물 안에 '희로애락'이 모두 담겨있었다. 누군가에겐 새 출발이었을 것이고, 아픈 사람들에게는 치료의 손길을 준 곳. 기쁘고 슬픈 소식이 오가던 곳. 그리고 지금은 세상과 이별하는 이들이 잠시 머물다 가는 곳이 되었다. 그야말로 삶의 새로운 시작과 마지막을 함께하고 있는 건물이었다.
여전히 창 밖을 바라볼 때면 나의 시선은 늘 넓게 펼쳐진 쨍한 색깔의 '바다'에 머문다. 하지만 가끔 우리 집과 바다 사이 초연한 모습으로 서있는 병원을 바라볼 때면 복잡해지는 마음은 어쩔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