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 어싱(earthing) 다이어리
나는 매일 지구와 만난다.
어싱(Earthing, 접지)
맨발로 자연과 직접 접촉하여 몸에 축적된 정전기를 방출하고 자유전자를 흡수하는 건강 습관이다. 이를 통해 혈액순환 개선, 염증 감소, 스트레스 해소, 수면 질 향상 등의 효과를 얻을 수 있다.
맨발 걷기를 처음 시작한 건 3년 전이다. 지금은 지자체에서도 나서 맨발 걷기 황톳길을 조성하고 있고,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맨발 걷기가 건강에 좋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3년 전만 해도 대중화되지는 않았었다. 무릎과 허리가 아픈 어르신들 혹은 특별히 몸이 안 좋아 맨발 걷기의 효능에 사활을 걸고 있는 사람들 외에는 분명 생소한 운동이었다.
내가 자주 가던 곳은 '응봉 근린공원' 황톳길이었다. 언덕 위에 자리하고 있었지만 건강해지려고 운동 삼아 가는 거니까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주차도 가능, 세족시설 완비, 무엇보다 집에서 걸어갈 수 있는 거리였다. 나는 부지런히 응봉 근린공원에 올라 황톳길 코스를 뱅글뱅글 돌았다. 그리 길지 않은 길이었지만 함께 운동하는 몇몇 분들이 계셔서 외롭지 않게 한 줄로 서서 황토흙을 밟았다.
차갑고 말랑한 촉감이 처음에는 이상하기만 했다. 하지만 금방 익숙해져 발가락에 힘을 줄 때마다 폭신하게 들어가는 감촉을 느끼며
'지금 내 몸이 건강해지고 있다. 내 몸은 점점 건강해진다.'
를 주문처럼 외웠다.
그곳에는 늘 같은 시간에 모여 운동하는 할머니분들이 있었다. 한 번은 씩씩한 걸음으로 황톳길을 누비고 있는 내 뒤를 따라오며 어르신들끼리 대화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젊은 사람이 이런데 왜 와. 여기 다 환잔데. 아픈 사람들이나 이런 거 하지, 이 시간에 젊은 사람들이 맨발을 왜 걸어?"
"그치 그치."
'...
지금 여기 걷는 사람 중에 젊은 사람이라고는 나 하난데, 나한테 하는 소린가?'
고개를 갸웃했지만 곱씹을수록 기분이 안 좋아졌다. 나이가 적든 많든, 아프건 말건간에 다 같이 건강해지자고 운동하는 거지. 젊은 사람이 낮에 맨발 걷는 일이 흉이 되는 것처럼 쑥덕이는 게 이상했다.
그 후로 나는 한동안 맨발 걷기를 하지 않았다.
따지고 보면 그 어르신의 말이 틀린 말도 아니었고, 남이야 어떻게 생각하든 내 할 일을 하는 게 제일이라는 것을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속은 상했다.
그 일이 있은 후 불과 1~2년 사이 맨발 걷기 붐이 일었다. 이제는 맨발 걷기의 효능을 일일이 설명하지 않아도 모두가 알고 있고, 각 지역마다 삼삼오오 모여 맨발 걷기를 하는 동호회도 생겨났다. 가까이는 부모님도 맨발 걷기 운동을 하고 계신다. 내가 살았던 세종과 속초 영랑호에도 맨발 걷기 황톳길이 조성되어 남녀노소, 관광객, 현지인 할 것 없이 모두가 즐기고 있었다.
바야흐로 맨발 걷기의 시절이 도래한 것이다.
이제 낮 시간에 혼자서 맨발을 걷는다 해도 나를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젊은 사람이 어디가 아파서 이런 데를 걷는가...?" 하는 걱정 어린 호기심도 이제 그만.
(생각은 속으로 해주세요. 어르신들 작게 말하신다고 해도 다 들려요... 또르륵...)
그래서 나는 더 당당하게 고개를 치켜들고, 허리를 쫙 피고, 앞 뒤로 손을 휘적휘적 파워워킹을 하면서 맨발로 걷는 즐거움을 누리고 있다.
결혼에는 본격적으로 어싱의 세계에 입문했다. 신혼살림을 꾸린 세종에는 <금강수목원> 안에 '메타세콰이어 황톳길'이 조성되어 있었다. 맨발 걷기만으로도 오감이 만족되는데, 그 길이 메타세콰이어 숲길이라니. 눈을 들면 앞으로는 하늘로 높게 솟은 풍성한 메타세콰이어 나무들이 일렬로 늘어서있고, 발아래는 촉촉한 황톳길을 밟는 느낌이란. 숨 한번 크게 쉬면 폐 속 깊이 지구의 숨결을 불어넣는 것 같았다.
새소리, 바람 소리, 맨발로 걸으며 행복해하는 사람들의 기분 좋은 웅성거림 속에서 나는 늘 황홀한 시간을 보냈다.
다만 비가 내린 후 황토흙이 유실되거나 대기가 건조해져 황톳길이 쩍쩍 갈라졌을 때는 보수 작업이 필요했기 때문에 지구와 만나는 일은 다음을 기약해야 했다.
그리고 올해 주문진으로 이사 왔다. 드디어 나의 로망이었던 바다 어싱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본디 어싱이란 지구와의 접지로 수분을 머금은 곳에서 하는 것이 가장 효과가 있다고 들었다. 물론 맨발로 대지를 걷는 것만으로도 효과가 있다지만 이왕이면 촉촉한 황토흙이나 바다, 강가의 모래사장을 걸으면 훨씬 좋다는 것이었다.
자주 가는 운동 코스인 주문진 해변에서 어싱을 시작했다. 아직 한 여름이 아니라서 평일에는 비교적 사람이 적고 한산했다. 바다 어싱을 위해 구입한 크록스 신발을 벗고 천천히 바다 앞으로 걸어 나갔다. 파도치는 해안가에 다다를수록 바람이 서늘했다. 점점 촉촉해지는 모래사장을 느끼며 가만히 숨을 들이쉬어 본다. 눈은 저 멀리 망망대해 수평선에 머문다.
'흡- 하-'
천천히 코로 숨을 들이마시고 더욱 천천히 내쉬었다. 심호흡을 몇 번 하고 나서 오른쪽으로 걸을지, 왼쪽으로 걸을지 좌우를 살펴보았다. 이왕이면 경치가 더 좋은 곳을 바라보며 걷고 싶었다. 오른쪽. 소돌아들바위 공원 전망대가 보이는 오른쪽으로 가보기로 한다.
'찰싹- 찰싹-'
발끝에서부터 올라온 짜릿짜릿한 청량감이 정수리 끝까지 전해지는 기분이란! 머리 위로 뜬 한낮의 태양을 가리기 위해 선글라스도 장착했고, 바닷바람에 대비하고자 점퍼도 단단히 챙겨 입었으니 오늘은 조금 더 오래 걸어볼 수 있겠다 싶다.
이윽고 걸어온 길을 돌아봤을 때 모래사장 위로 남겨둔 발자국을 파도들이 부지런히 지우고 있었다. 육지에 이르면 엷은 초록빛을 내는 바닷물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자니 저절로 카메라에 손이 갔다. 깨끗한 물이 밀려와 발등을 적시고 빠져나가는 장면을 하염없이 바라보면서 발가락을 꼼지락 움직여 보았다. 물거품이 몽글몽글 발을 간지럽혔다.
다음으로는 세족장도 있고, 사람들도 더 많은 안목해변으로 향했다. 커피의 거리로 유명한 안목항에는 사시사철 관광객이 넘친다. 나는 바다 어싱을 하며 커피 대신 바닷물을 내 몸 가득 흡수하기로 했다.
강릉으로 놀러 온 사람들을 보며 어싱을 하는 것도 나름대로 재미가 있었다. 갈매기에 과자를 주다가 갈매기 폭탄을 맞은 사람들, 강아지와 산책하는 사람, 가족끼리 놀러 와 사진을 찍고 있는 분들, 해변을 바라보며 사랑을 속삭이는 연인들... 소소하지만 확실한 즐거움을 주는 풍경들이다. 관광지에 사는 현지인의 '소확행'이랄까.
울창한 소나무 숲으로 가득한 송정해변도 어싱하기에 딱 좋은 장소다. 이곳은 한쪽은 바다 다른 한쪽은 송림으로 바다 어싱과 솔숲 어싱이 둘 다 가능하다. 바닷가에 가서 발을 담그고 솔숲으로 들어와 피톤치드로 샤워하며 걸으면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다. 이렇게 좋은 환경에서 숨을 쉬고 운동을 하는데 몸이 건강해지지 않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정신과 마음이 릴랙스 됨은 물론이거니와 그동안 쌓인 스트레스까지 훌훌 털어버릴 수 있다.
바다 어싱은 나의 오랜 꿈이었다.
가끔 바다로 놀러 갈 때마다 그곳에 제주든, 속초든, 서해안 어디든 잠깐 발을 담그고 걸어보긴 했지만, 이렇게 좋은데 매일 올 수 없으니 아쉬운 마음도 있었다.
'언젠가 바닷가에 살게 되면 매일 맨발로 걸어보리!'
라고 다짐하며 그날을 기다렸는데, 정말 문만 열고 나가면 바다인 곳으로 이사를 왔다. 심지어 집 안 어느 곳에서도 바다가 보였다.
지난 일들로 받았던 크고 작은 스트레스와 상처, 찌뿌둥한 몸과 마음 모두 바다 어싱을 하며 날려버린다. 파도가 끊임없이 밀려들고 나가면 아픈 마음에 새 살이 돋아나는 기분이었다. 뚜벅뚜벅 천천히 걸으며 만나는 지구는 나에게 새로운 활력과 에너지를 불어넣고 있다.
아직은 수온이 그리 높지 않아 오랫동안 걷지 못하지만 그래도 가능하다면 자주, 조금씩 시간을 늘려가며 바다에 머물고 싶다. 이제 5월. 계절은 한 여름으로 달려가고 있으니 조금 더 진하게 지구와 만날 수 있는 날이 곧 오겠지.
나는 매일 바다 어싱을 하며 나를 살리고 사랑하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