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휴식

쉬어도 피곤한 당신에게

by 방수진

멈추지 않으면 나를 만날 수 없다. 아침이 밝으면 고2, 중3, 중1 아이들의 목소리와 발걸음이 집 안을 가득 채운다. 대화와 웃음, 책가방을 메고 오가는 소란까지 합쳐져 하루의 풍경이 된다. 그 속에서 나는 잠시 멈춘다. 눈을 감고 깊게 호흡하며 마음의 중심을 찾아본다. 아주 짧은 시간이지만, 그 멈춤은 내 안의 공간을 다시 열어준다. 명상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저 가족과 건강한 관계를 이어가고 싶을 뿐이다. 거창한 사건이 아니라, 반복되는 작은 행동들이 관계를 천천히 바꿔 간다.


엄마라는 이름 앞에 ‘친절한’, ‘다정한’ 같은 단어를 붙일 수 있는 것도 이 일시 정지 버튼 덕분이다. 물론 몸과 마음이 지쳐 아무런 형용사조차 붙이지 못하는 날도 있다. 그러나 멈추려는 작은 시도들이 쌓이면, 아이들과의 대화가 부드러워지고, 사소한 표정 속에 담긴 마음까지 읽어낼 수 있게 된다. 여기까지 오기 위해 쏟아낸 눈물은 아마 석촌호수를 채우고도 남을 것이다.


아이들이 학교로 향하고 집이 고요해지면, 비로소 또 다른 아침이 시작된다. 커피 한 잔을 손에 들고 창가에 서면, 햇빛에 반짝이는 나뭇잎, 바람에 흔들리는 가지, 구름 사이를 스쳐 가는 빛까지 모두가 눈에 들어온다. 나뭇잎이 흔들리듯 삶도 끊임없이 흔들리지만, 빛은 언제나 그 틈을 찾아 스며든다. 작고 사소해 보이는 장면들이 일러 주는 것은 흔들려도 괜찮다는 사실이다. 이런 깨달음이 쌓일수록 삶을 대하는 마음이 조금 더 단단해진다. 어제의 피로도, 내일의 걱정도 아닌 오직 현재만이 눈앞에 선명하게 다가온다. 순간의 아름다움에 시선을 머물다 보면 복잡했던 마음의 선이 풀리고, 다시 숨을 고를 수 있다.



방수진 <푸른 휴식>, Mixed media on canvas 15.5x15.5cm, 2025



작업실에 들어서면 또 다른 형태의 멈춤이 기다린다. 팔레트 위에서 색을 섞을 때, 물감이 붓에 스미는 순간, 캔버스 위로 푸른빛이 번져 나갈 때 긴장이 풀리고 고요가 스며든다. 손끝에 닿는 감각, 붓질의 리듬, 색의 농도와 흐름은 현재를 단단히 붙잡아 준다. 그림을 완성하는 일보다 중요한 것은 바로 이 과정이다. 섞인 색 하나, 붓질 하나가 오늘을 견디게 하는 힘이 된다. 그 순간만큼은 어떤 역할도 아닌, 오롯이 존재 자체로 머물 수 있다. 그림을 그리는 행위가 곧 존재의 증명이 된다. 색과 선을 선택하는 이 과정은, 누가 대신해 줄 수 없는 자기만의 세계를 만들어 가는 연습이기도 하다.


오늘날은 선임의 조언이나 누군가의 지침만으로는 단단히 살아가기 어려운 시대다. 정보는 넘쳐나고, 비교는 일상처럼 스며든다. 성장은 남이 알려준 길에서가 아니라, 스스로 구축한 세계 속에서 이루어진다. 그러나 자기만의 세계를 지켜낸다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다. 세상은 늘 더 빨리, 더 많이를 요구하고, 무수한 정보와 경쟁은 호흡을 쉽게 빼앗아 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멈춤이다. 특별한 무엇이 아니라, 팔레트 위에서 물감을 섞고 손끝에 묻은 색을 바라보는 아주 작은 멈춤. 그 순간은 세상의 속도와 무관하게 각자의 리듬을 회복하게 한다. 누군가의 조언보다, 화면 위에 번져 나가는 푸른빛이 오히려 더 큰 위로와 답이 되기도 한다.

그 경험은 삶을 지탱하는 더 깊은 결로 이어진다. 삶에는 세 가지 결이 있다. 하루를 이어가기 위한 반복의 결, 무언가를 이루고 쌓아가는 결,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다움을 증명하는 결. 이 셋 중에서 삶을 단단하게 만드는 것은 대개 마지막일 것이다. 나에게는 그림이 그 결이 되고, 팔레트 위의 작은 멈춤이 곧 ‘나로 살아간다’는 증언이 된다.


정보의 파도 속에서 방향을 잃을 때, 우리를 붙드는 것은 거대한 해답이 아니다. 오직 자기만이 아는 손끝의 감각, 일상에 스며든 작은 의식, 그것이 곧 지켜주는 힘이 된다. 그러나 이 힘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작품이 스케치에서 완성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붓질이 필요하듯, 자신답게 살아가기 위해서도 인내심이 필요하다. 드로잉 시범을 보여줄 때마다 짧은 시간 안에 그림이 탄생한다고 놀라는 이들이 있다. 그럴 때 이렇게 말하곤 한다.


“고등학생 때부터 그림을 그려왔습니다. 수십 년의 인내가 쌓여 지금의 한 장면이 된 거예요.”


삶도 마찬가지다. 핸드폰만 열면 쏟아지는 정보와, 걱정이라는 이름으로 던져지는 타인의 조언 속에서 자신으로 살아가려면 인내가 필요하다. 인내는 각자의 세계를 지켜내는 힘이 되고, 서로 다른 세계를 응원하며 연결하게 만든다. 서로의 세계를 응원하는 일조차 결국은 자신의 힘이 바탕이 되어야 가능하다. 그러나 인간의 힘은 유한하다. 쉼조차 완전한 회복을 보장하지 못하고, 오히려 피로가 더 짙게 드리우는 날이 있다. 그 순간은 몸의 고단함이 아니라, 자신의 한계를 자각하는 시간일지도 모른다.

그런 날에는 팔레트 위에 번져 나가는 푸른빛에 잠시 기대어 본다. 붓질 하나가 호흡이 되고, 작은 색의 울림이 마음을 붙든다. 어쩌면 필요한 휴식이란 그저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세상의 속도와는 조금 다른, 자신만의 리듬을 회복하는 순간. 그 순간이야말로 삶에 스며드는 가장 푸른 휴식일 것이다.





당신의 하루에 건네는 작은 질문


1. 오늘 하루, 어디에서 잠시 멈추고 있나요?


멈추게 한 순간:

잠시 호흡을 고른 자리:


2. 멈춤이 당신에게 건네준 힘은 무엇인가요?


멈춤 속에서 내가 얻은 힘:

멈춤이 내게 준 작은 변화:


3. ‘과정’ 그 자체가 지탱해 준 순간은 언제였나요?


과정을 통해 얻은 배움:

시도와 실패 속에서 붙잡은 깨달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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